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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 [[동양]]과 [[서양]]은 좀 차이가 있다. ===동양의 경우=== 현대 총력전 체계와는 다르긴해도, 원시적인 총력전 체제를 [[춘추전국시대|기원 전부터]] 갖추었다. 이는 정치체계의 발달과 지리기후적 요소가 겹친 결과로, [[쌀]]을 위시한 곡물로 인구 부양력이 높으며, [[유교]]적 문화로 일찍부터 중앙집권체제를 갖출수 있었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 즉, * 중앙집권제는 곧 [[관료제]]의 정비며 이는 국가 구성원을 체계적으로 관리할 수 있다는 소리다. 당연히 효율적인 징병을 할 수 있는 제도적 바탕이 된다. * 풍부한 강수량을 바탕으로 대량 생산에 적합한 쌀, 보리 등 곡물의 존재는 인구수 증가와 더불어 회복에도 큰 도움이 되었다. 그렇기에 [[아시아]], 특히 [[동아시아]] 지역은 일찍부터 전시 동원병력수가 서양에 비해 높았다. (예를들어 당장 한국사만봐도 11세기초 [[고려]]는 [[거란]]과의 전쟁을할때 작은반도국에서 20만이라는 그당시로서는 대규모의 징병을통해 전쟁을치뤘는데 사실 이숫자는 말그대로 고려의 인적자원을 모두짜낸것으로 사실상 이때 고려는 원시적인 총력전에 돌입했다할수있겠다.) ===서양의 경우=== 근대 이전까지 전쟁에서 동원된 총 병력 수가 15만을 넘지 않았다. [[로마제국]] 멸망 이후 [[중세]] 서양의 정치제는 [[봉건제]]를 기초로 두었으며, 이 시기엔 왕이라 해도 봉신들의 병력을 마음대로 동원하지 못했다. 계약관계라는 독특한 관계와 더불어 그 근간이 [[장원제도]]라는 체계에 묶여있었기 때문이다. 중세가 지나 근세에 이르러도 여전히 병력규모가 크질 못했는데, [[용병]]들이 각국 군대의 근간을 이루었기 때문이다. 국가의 지배자는 용병을 '고용'해 전쟁을 수행했으니, 돈이 아무리 많아도 이런 군 체계로는 대규모 [[상비군]]을 유지할 수 없었다. ㄴ단 발칸은 사정이 달랐다. 1453년에 콘스탄티노플이 따먹히고 오스만이 등장하면서부터 발칸은 땅따먹기가 아니라 정말로 생존을 위한 전쟁으로 돌입했고 이때부터 발칸 내에서는 서유럽식이 아닌 대규모 전투가 자주 벌어졌다. 하지만 [[프랑스 대혁명]]부터 서양 군사사상에 일대전환이 일어난다. [[루이16세|왕 모가지]]를 [[단두대|날려버리고]] 세워진 [[공화국]]의 전쟁이란, 왕들의 전쟁이 아닌 '''국민들의 전쟁'''이 되버린다. [[징병제|국민 개병제]] 개념이 등장했고, 시민의 의무의 하나로서 국가의 수호라는 개념이 등장한다. 이전에 비해 훨씬 저렴하게 대규모 병력을 항시 보유할 수 있는 기반이 등장한 것이다. [[프랑스]]에 맞서는 국가들도 이에 맞서기 위해선 대규모 병력을 유지해야 했고, [[영국]]과같은 [[입헌군주제]]국가는 [[왕권신수설]]이라는 개념을 버린지오래라 국민개병제로 빠르게 갈아탈수있었고 [[프로이센]]도 늦지만 어느정도 신분평등과같은 국민의권리를 인정해주면서 자연스레 국민개병제가 정착하게되었다. 결국 서구의 전쟁규모는 이전시기와는 비교하기 어려울 정도로 커진다. 그리고 또 한편으론 [[산업혁명]]으로 생산력이 급증했다는 점을 들수있다. 생산력의 증가는 [[군대]]의 [[무기]]와 보급을 더 저렴하게 할 수있는 기반을 제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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