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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도: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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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문서: {{다른 뜻 넘어온다|북간도|소설|북간도 (소설)}} '''간도'''(間島, {{zh-stp|s=间岛|p=Jiāndǎo|h=젠다오}})는 압록강 상류와 두만강 북쪽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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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만주 지역.
'''간도'''(間島, {{zh-stp|s=间岛|p=Jiāndǎo|h=젠다오}})는 [[압록강]] 상류와 [[두만강]] 북쪽의 조선인 거주 지역을 일컫는 말로, 간도의 범위에 관하여는 여러 이견이 있다. 일반적으로 간도라 하면 현재의 [[연변 조선족 자치주]] 지역을 가리키며, [[두만강]] 북쪽인 [[연변]] 지역을 '북간도'(또는 '동간도'), 그 서쪽인 [[압록강]] 북쪽 지역을 '서간도'라 부르기도 한다.


간도(間島)는 글자 그대로 풀이하면 '''사이섬'''(사잇섬)으로, 그 어원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한데, 그 가운데 '사잇섬'이란 말 뜻에 비추어 '간도'가 본래는 [[압록강]]과 [[두만강]]의 [[하중도]](河中島)를 가리키는 말이었다가 두 강의 북안(北岸)을 가리키는 말로 그 의미가 확장·변형된 것이라 보는 견해가 유력하다.<ref>[[청나라|청]]의 봉금령 위반과 [[조선]]의 '월강죄'(현종실록, 현종 2년(1661 신축) 4월 1일 3번째기사 등)는 [[사형]]으로 논하는 중죄였다. 그러나, 좁고 척박한 토지와 상습적인 기근에 시달리던 [[함경도]] 농민들은 죽음을 무릅쓰고 사이섬(間島, 간도)에 간다는 핑계를 대며 몰래 강건너 비어있는 땅에 가서 도둑 농사(사이섬 농사)를 지었다.(김동석, 《한국 현대소설의 비판적 언술 양상》, 소명출판, 2008년 263쪽 등)</ref>
고구려때 우리나라가 한번 먹었고 발해때 한번 더 먹었지만 현재는 중국으로 소유권이 넘어간곳이다. (정확히는 청나라가 이 곳에서 발흥했다가 청나라 망하면서 땅까지 중국으로 넘어감)  


[[19세기]] 말, [[조선]]과 [[청나라]]가 [[백두산정계비]]에 쓰여진 "토문(土門)"을 서로 달리 해석하면서 이 지역(북간도)에 대한 귀속 문제가 불거졌다. 당시 [[조선]]은 [[정계비]]의 위치상 '토문은 [[두만강]]과 별개의 강이다'고 주장하였고, [[1903년]]에는 [[이범윤]]을 간도관리사로 파견하여 간도에 대한 실효적 지배를 시도하기도 했다.
여기서 살았던 놈들이 [[만주족]].


== 역사 ==
== 역사 ==
=== 18세기까지 ===
===일제 강점기 이전===
'''간도'''(間島)는 [[고대]]에는 [[부여]]와 [[북옥저]], [[고구려]], [[발해]]의 영역이었다가 [[고려]]시대부터 [[조선]] 중기까지는 [[여진족]]이 흩어져 살았다. [[조선]]은 건국 초 [[세종대왕]] 집권기에 [[압록강]]과 [[두만강]] 남쪽의 여진족을 쫓아내거나 귀화시켜 [[4군]]과 [[6진]]을 설치했으나, 두 강의 북쪽으로 영토를 밀어올리지는 않았다.
고구려와 발해때 우리땅이었다. 근데 두나라 다 망함.  
 
[[1616년]]에 [[누르하치]]가 [[후금]]을 세운 후 [[1644년]]에 [[청나라]]가 [[명나라]]를 멸망시키면서, [[만주족]](여진족의 후신)의 상당수가 군사들을 따라 이 지역에서 중국 본토로 옮겨갔다. 이 과정에서 본래 만주족들이 살던 지역이 공동화(空洞化)되자, [[청나라|청]](淸)은 [[강희제]] 집권기인 [[1677년]]에 '[[흥경]] 이동, [[이통주]] 이남, [[백두산]]·[[압록강]]·[[두만강]] 이북 지역'을 [[청조]]의 발상지라 하여 '''봉금지'''(封禁地)로 정하고 [[만주족]]이 아닌 타민족의 거주와 개간, 삼림 벌채, 인삼 채취 등을 엄금하였다.<ref>[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544733&cid=1587&categoryId=1587 두만강(豆滿江)] 한국민족문화대백과(한국학중앙연구원)</ref> [[1636년]]에 [[병자호란]]을 겪으며 청의 위세를 실감한 [[조선]] 역시 [[압록강]]과 [[두만강]]의 북쪽 연안에 대한 도강을 엄금하고 '월강죄'로 다스렸다.<ref>{{뉴스 인용|제목=간도이주 조선 초부터 시작됐다. |url=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14&oid=033&aid=0000003663 |출판사= 경향신문 |저자= 유병탁 기자 |날짜=2004-04-09}}</ref>


간도는 두만강과 그 지류인 해란강(海蘭江), 가야하(嘎呀河, 알아하), 훈춘하(琿春河, 혼춘하) 등 여러 물길의 연안을 중심으로 한 분지와 구릉으로서 땅이 기름지고 산림이 무성한 땅이었으나, 만주족은 농경보다 유목·수렵에 종사하였기 때문에 이 지역은 오랫동안 개간되지 못했다. 게다가 청나라의 봉금정책으로 인해 150년 가까이 이 땅은 청조 통치자들을 위한 수렵지이자 삼() 등 약재의 채집지로 독점적으로 이용되는 상황이었다.
이후 고려와 조선 시절 중국으로 넘어갔고 청이 중원을 먹은 이후에는 여기가 만주족 새끼들의 발상지라서 한족은 다 내쫓고 만주족만 남아서 먹고 살았다.(봉금령)


=== 19세기 이후 ===
[[19세기]]에 들어서 서슬퍼런 봉금령도 부패와 혼란으로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1800년]] [[조선]]은 왕권 강화를 위한 개혁정책을 추진하던 [[정조]]가 사망하면서 [[세도정치]]의 전횡과 부패로 민생이 도탄에 빠지고, [[청나라]] 역시 [[건륭제]] 말년에 [[화신 (청나라)|화신]]의 전횡과 부패로 국정이 문란해지면서 [[백련교도의 난]]([[1796년]] - [[1804년]]) 등 거듭되는 반란이 일어나 국운이 기울기 시작했다.


[[19세기]] 초부터 [[세도정치]]의 학정(虐政)과 지방 수령의 수탈을 견디다 못한 조선의 농민들이 봉금령에도 불구하고 조선의 관권(官權)이 미치지 않는 [[두만강]] 이북으로 건너가 이주하기 시작했다. 게다가 [[청나라]]가 [[아편전쟁]]([[1839년]] - [[1842년]] / [[1856년]] - [[1860년]])과 [[태평천국의 난]]([[1851년]] - [[1864년]])으로 혼란에 빠져 월강에 대한 단속이 느슨해지고 [[조선]]의 [[함경도]] 지방에서 [[1869년]](기사대흉년), [[1870년]](경오대흉년) 대흉년이 들자 수많은 조선사람들이 [[압록강]] 상류와 [[두만강]]을 건너 단속 자체가 어려운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청나라|청]]의 봉금령은 계속되었기 때문에 그 단속을 피해 간도에서 [[연해주]]로 다시 이주하는 주민들도 있었지만 이주민은 줄어들기는커녕 갈수록 늘어났다.
그러던 중 조선에서 탐관오리한테 쳐맞던 흙수저들이 많이 넘어가면서 영토분쟁 발생.


[[1881년]]에는 청나라가 '봉금령'을 폐지하였고, [[1883년]]에 조선이 '월강금지령'을 폐지한 데 이어 [[1885년]]에 청나라가 조선인에 대한 만주 이주 금지령을 철폐하면서 조선인의 간도 유입 현상은 더욱 증가하였다.
숙종때 이를 해결하고 영토를 확실히 정하고자 청에서 관리를 파견했다.  


[[20세기]] 초에도 [[일본 제국]]의 침략과 수탈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또는 항일 운동을 위해서 많은 조선인들이 이 곳으로 계속 이주했다. [[1932년]]에 일본 제국은 만주에 괴뢰 국가인 [[만주국]]을 세우고 간도를 관할하는 [[젠다오 성]](間島省, 간도성)을 설치했다. 간도는 [[1949년]]에 [[중화인민공화국]]의 통치 하에 들어갔고, 현재는 [[연변 조선족 자치주]]와 [[장백 조선족 자치현]] 등이 중국 행정구역으로 편제되어 있다.
조선과 청은 백두산을 중심으로 서쪽은 압록강, 동쪽은 두만강을 경계로 국경을 정하려 했고, 두 강이 시작되는 지점에 정계비를 세워 표시하고자 했다.


== 백두산 정계비 ==
{{인용문|...청 관리가 백산(白山) 산마루에 올라 살펴보았더니, 압록강(鴨綠江)의 근원이 과연 산 허리의 남변(南邊)에서 나오기 때문에 이미 경계(境界)로 삼았으며, 
{{본문|백두산정계비}}
[[1712년]]([[조선 숙종|숙종]] 38년), [[백두산]] [[천지]](天池)의 남동쪽 4&nbsp;km 지점에 [[조선]]과 [[청나라]]의 [[국경]]을 확인하는 [[백두산정계비]]가 세워졌다. [[정계비]]에는 [[조선|조]]·[[청나라|청]] 양국의 경계를 '서위압록 동위토문(西爲鴨綠 東爲土門)'이라 하고, 정계비는 그 분수령에 세워졌음을 명기하였다.<ref>숙종실록, 숙종 38년(1712 임진) 5월 23일 1번째기사 "토문강(土門江)의 근원은 백두산 동변(東邊)의 가장 낮은 곳에 한 갈래 물줄기가 동쪽으로 흘렀습니다. 총관 목극등이 이를 가리켜 두만강(豆滿江)의 근원이라 하고 말하기를, '이 물이 하나는 동쪽으로 하나는 서쪽으로 흘러서 나뉘어 두 강(江)이 되었으니 분수령(分水嶺)으로 일컫는 것이 좋겠다.'하고, 고개 위에 비(碑)를 세우고자 하였습니다."</ref>
<ref>정계(定界)에 참여했던 사람들의 기록 : 김지남(백두산 정계시 역관), 《북정록》. 박권(백두산정계시 조선측 대표, 접반사), 《북정일기》. [[홍세태]], 《백두산기》 김지남의 아들인 역관 김경문의 이야기를 듣고 글로 옮김.</ref>
그러나, 청()의 목극등(穆克登)이 사계(査界)를 한 이후에 조선 측은 '정계비로부터 동쪽 수계(水界)까지' 설책(設柵)을 하는 과정에서 목극등이 정한 수계가 [[두만강]]이 아닌 [[송화강]]으로 흘러들어가는 문제를 발견하였다. 이에 조정에서 파견한 북평사는 설책 공사를 중지하라고 하였지만, 정계(定界)에 참여한 이들이 정계를 잘못한 책임을 지는 것이 두려워 목극등이 정한 수원(水源)에서 남쪽으로 20리 떨어진 곳에 새롭게 설책하였다.<ref>숙종실록, 숙종 38년(1712 임진) 12월 7일 3번째기사.</ref> [[조선]] 조정은 이후에 이 사실을 알게 되었지만, 이를 청나라가 알게 되면 목극등이 견책 받고 다른 청나라 사신이 와서 영토가 축소될 수도 있다는 우려 때문에 이런 상황을 그대로 두었다.<ref>[[이익 (학자)|이익]], 《[[성호사설]]》 제2권 천지문편 "토문은 두만강이고, 음이 비슷해 잘못되었다."</ref>
<ref>[[한치윤]], 《[[해동역사]]》 속집 제12권 조선편 "[[혼춘]](渾春)은 그 서쪽의 토문강까지가 20리이며, 조선과 경계이다."</ref>
<ref>[[정약용]], 《다산시문집》 15권 강계고 서편 "[[세종]] 때에는 두만강 남쪽을 모두 개척하여 육진을 설치하였으며, [[선조]] 때에는 다시 삼봉평(三蓬坪)에 무산부(茂山府)를 설치하여 두만강을 경계로 천참의 국경으로 삼았다. 두만강 북쪽은 곧 옛 [[숙신]](肅愼)의 땅으로서, 삼한(三韓, [[삼국시대]]) 뒤에는 우리의 소유가 아니었다. [[두만강]]과 [[압록강]]이 모두 [[장백산]](長白山)에서 발원(發源)하고, 장백산의 남맥(南脈)이 뻗쳐 우리나라가 되었는데, 봉우리가 연하고 산마루가 겹겹이 솟아 경계가 분명치 않으므로 [[강희 (연호)|강희]](康熙) 만년에 오라총관(烏喇總管) 목극등(穆克登)이 황명을 받들어 [[정계비]](定界碑)를 세우니, 드디어 양하(兩河)의 경계가 분명해졌다."</ref>
<ref>[[이긍익]], 《[[연려실기술]]》 별집 제16권 지리전고 "두만이 곧 토문이다."</ref>


== 영유권 분쟁 ==
'''토문강(土門江)의 근원은 백두산 동변(東邊)의 가장 낮은 곳에 한 갈래 물줄기가 동쪽으로 흘렀습니다. 청 관리가 이것을 가리켜 두만강(豆滿江)의 근원이라 하고'''
=== 19세기 말의 상황 ===
[[1800년대]] 초부터 [[조선]]의 [[함경도]] 사람들이 [[두만강]]을 건너 '''간도'''(間島)로 이주하기 시작하여 [[1881년]]에는 [[연변]] 지역의 조선인이 1만명에 이르렀다. [[1860년]] [[베이징 조약]]으로 러시아에 연해주를 빼앗긴 [[청나라]]는 만주 개발을 위해 [[1881년]] '봉금령'을 폐지하고 본토 주민들이 이 지역으로 이주하도록 하였다. 이 과정에서 간도에 있던 조선인과 청인 사이에 마찰이 생기면서 조선과 청나라 사이에 간도에 대한 영유권 문제가 본격적으로 대두되었다.


이에 조선은 [[1883년]]에 '월강금지령'을 폐지하고 [[어윤중]]·[[김우식]]에게 정계비와 그 주변 지형을 조사하게 하여 [[송화강]]의 한 지류로 토문강이 있음을 확인한 뒤, 간도가 조선의 영토임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청나라]]는 양국의 기본적인 [[국경선]]이 [[두만강]]이라는 전제하에 도문강([[두만강]])의 도문(圖們)과 토문(土門)은 모두 [[만주어]]에서 그 음이 비슷하기 때문에 취한 것(借字, 차자)이므로 '토문은 곧 두만강을 지칭한다'고 주장하였다.
말하기를, ‘이 물이 하나는 동쪽으로 하나는 서쪽으로 흘러서 나뉘어 두 강()이 되었으니 분수령(分水嶺)으로 일컫는 것이 좋겠다.’ 하고, 고개 위에 비()를 세우고자 하며...|숙종실록}}
''


[[조선]]과 [[청나라]]는 을유년(1885년)과 정해년(1887년)에 [[백두산]]과 그 동쪽의 국경을 명확히 획정하기 위한 감계(勘界) 회담을 가졌으나, 서로의 주장이 엇갈려 모두 결렬되었다.<ref>이중하(을유·정해감계에 참여), 《백두산일기》.</ref>


=== 20세기 이후 ===
당시의 토문강은 두만강 또는 두만강의 상류로 인식되어 있었으며 조선과 청 모두 이견이 없었다.  
[[1903년]]([[광무 (연호)|광무]] 7년) [[대한제국]]은 간도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는 동시에 간도관리사 [[이범윤]]을 간도에 파견(1903년 10월 - 1905년 5월)하기도 했다. 당시 청나라는 [[의화단 사건]]의 여파로 만주 일대를 [[러시아 제국]]에 점령당하다시피 한 상태였다. 이러한 러시아 제국의 남진은 [[1904년]]에 발발한 [[러일 전쟁]]의 불씨가 되었다.


일본 제국은 [[1907년]] [[8월 23일]], 간도에 헌병과 경찰을 들여보내 [[용정]](龍井)에 [[통감부]] 간도파출소를 설치하였으나, [[1909년]] [[9월 4일]] 청나라와 [[간도 협약]]을 체결하여 이 지역에 대한 청나라의 법적 권한을 인정하고 파출소를 철수하였다.([[간도 협약]]이 체결된 당일, 청나라와 일본 제국은 [[만주 5안건 협약]]을 체결하였다.)
문제는 청 관리새끼가 송화강의 수원을 두만강의 수원으로 착각해 그곳에 서위압록 동위토문이라고 정계비를 뚝딱 처 세웠다는거다.


[[1962년]] [[10월 12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중화인민공화국]]은 [[조중 변계 조약]]을 체결하여 [[백두산]]과 [[두만강]] 상류의 국경선을 명확히 획정하고, [[두만강]] 이북 지역에 대한 영토권이 중화인민공화국에 있음을 확인하였다.
국경도 정했겠다 물길을 따라서 푯말을 세울려 한 조선은 시발 물이 오랑캐영토로 흐르는거보고 데꿀멍.


2000년대에는 [[한국]] 사회에서 [[간도 협약]]에 대한 이의를 제기할 수 있는 시한이 100년이기 때문에 2009년 9월에 그 시효가 완성된다는 일방적 주장이 신뢰할 만한 근거 제시 없이 사실인냥 유포되는 소동이 있기도 했다.<ref>{{뉴스 인용|제목= "간도반환 소송가능시한 3주밖에 안남아" 재미동포 피맺힌 절규|url=http://www.newsis.com/article/view.htm?cID=&ar_id=NISX20090812_0002939369|출판사= 뉴시스|날짜=2009-08-12 }}</ref>
<ref>{{뉴스 인용|제목= 학계 "간도 100년 시효설 터무니없어"|url=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01&aid=0002846871|출판사= [[연합뉴스]]|날짜= 2009-09-03}}</ref>


== 더 보기 ==
{{인용문|...흐름을 따라 거의 30리를 가니 '''이 물의 하류는''' 또 북쪽에서 내려오는 딴 물과 합쳐 점점 동북(東北)을 향해 갔고, '''두만강에는 속하지 않았습니다.'''
* [[백두산정계비]]
* [[조중 변계 조약]]
* [[간도 문제]]
* [[간도 협약]]
* [[연변 조선족 자치주]]
* [[장백 조선족 자치현]]
* [[녹둔도]]
* [[한국의 민족주의]]


==각주==
'''기필코 끝까지 찾아보려고 한다면 사세로 보아 장차 오랑캐들 지역으로 깊이 들어가야 하며''',만약 혹시라도 피인(彼人)들을 만난다면 일이 불편하게 되겠기에 앞질러 돌아오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각주|2}}


== 바깥 고리 ==
대개 '''청 차관은 단지 물이 나오는 곳''' 및 '''첫 번째 갈래와 두 번째 갈래가 합쳐져 흐르는 곳만 보았을 뿐'''이고, '''일찍이 물을 따라 내려가 끝까지 흘러가는 곳을 찾아보지 않았기 때문에''',  
*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00512 〈간도〉],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http://www.cybernk.net 국가지식포털 북한지역정보넷]
*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910051742585&code=210000 경향신문 63 창간특집-못박힌 철조망 앞에서 간도·녹둔도를 기억하다 이이화 역사학자 2009-10-06]
* [http://www.nkland.org/ 조병현의 북한토지 연구소]
* [http://www.wallsan.co.kr/home/main.php?link=boardsdview&boid=30194018&vmod=GNR&pageno=1&list_no=6&vid=20060119164605&tg=&key=&opp=&csno= 백두산 지도 (분할 표시)]


{{동아시아, 남아시아, 동남아시아 지역의 영토 분쟁}}
그가 본 물은 딴 곳을 향해 흘러가고 중간에 따로 이른바 첫 번째 갈래가 있어 두 번째 갈래로 흘러와 합해지는 것을 알지 못하여, '''그가 본 것이 두만강으로 흘러 들어가는 것인 줄 잘못 알았던 것이니''', 이는 진실로 경솔한 소치에서 나온 것입니다.


[[분류:지린 성]]
이미 '''강의 수원이 과연 잘못된 것'''을 알면서도 청 차관이 정한 것임을 핑계로 이 물에다 막바로 푯말을 세운다면,
[[분류:중국의 지리]]
 
[[분류:중국-한국 관계]]
'''하류는 이미 저들의 땅으로 들어가''' 향해간 곳을 알지 못하는데다가 국경의 한계는 다시 의거할 데가 없을 것이니, 뒷날 난처한 염려가 없지 않을 것입니다...|숙종실록}}
[[분류:조선-청나라 관계]]
 
[[분류:일본-중국 관계]]
조선은 이거 청에 안 알렸다가 나중에 밝혀지면 좆되는거 아니냐? 라며 전전긍긍했지만
[[분류:일본-한국 관계]]
 
[[분류:만주]]
어쩌피 정계비만 잘못 박았을 뿐, 국경을 압록강 두만강으로 타결한건 누구나 아는 사실이라 스리슬쩍 넘어간걸로 보인다. 하지만...
[[분류:중화인민공화국의 영토 분쟁]]
 
[[분류: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영토 분쟁]]
 
[[분류:아시아의 영토 분쟁]]
이후 이 정계비를 빌미삼아 [[고종|군밤]]<ref>이 정신병자새끼는 지 나라도 좆망해가는 와중에 청 망해간다고 간도에 찝쩍대고 의화단진압에 숟가락 올리려고했다. 뭐 이딴 새끼가 다 있지?</ref>이 간도에 욕심이 생겨서 깃발을 꼽자 2차적으로 영토분쟁 발생.
 
조선이야 다 좆망해하는 쓰레기였으니까 조선만 주장한다면 그냥 밟아버렸으면 되지만
 
조선 뒤에 일본이 있었기 때문에(간도가 조센땅? 응 그럼 우리 닛뽄꺼~)쓸데없이 일 길어질걸 염려한 [[청나라]]가 안 생까고 일본이랑 간도협약 맺었다.
 
===일제 강점기===
조선이 좆망하기 전부터 슬슬 조선인이 넘어가다가 조선이 아예 먹힌 뒤로 조선인들이 엄청 넘어가서 조선인들이 드글드글한 땅이 되었다.
 
독립군이랑 일본이 술래잡기하면서 로맨스 찍던곳.
 
독립군 세력은 먼지만도 못했지만 생각의 차이가 뭐라고 먼지들이 서로 엄청 분열했다.
 
합치자 합치자 말했지만 결국 간도에서 독립운동 하던놈들이 단일단체 제대로 구성한적은 한번도 없음.
 
만주사변 터지고 간도를 일본이 먹자 독립운동 하던놈들은 대부분 쫓겨났고, 일본 피해서 간도로 도망쳤던 조선인들은 일본한테 존나 쳐맞으면서 착취당하게 된다.
 
===2차대전 종료 이후===
불곰이 일본을 쫓아내고 중국이 다시 먹었다.
 
불곰은 중국 견제하려고 북한한테 간도를 넘겨주려고 했지만<ref>간혹 가다 '조선의용대가 국공내전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기 때문에 중공으로부터 받아낸거다'라고 하는 국뽕들이 있다. 택동이가 또라이인건 사실이지만 그딴 이유로 자국 영토를 떼어주겠냐?</ref> 일성이가 남한이랑 불장난 하는바람에 실패.
 
이후 쭉 중국이 먹으면서 중국땅으로 자리잡았다.
 
== 영토분쟁 ==
우선 알아두어야 할 것은 영토분쟁지역이라고 헬조선만 주장한다는 거다. 짱깨는 우리의 이 주장에 대꾸조차 안하고 있고 국내 역사학자들의 대다수도 아 씨발 이건 좀 아니지 않나요? 하고 있는데 역사조무사 설읍읍만 주장하ㄴ..읍읍 퉤퉤 뭐야 시발 당신 누구야 당신 누군데 나한테 김치를 먹이는 ㄱ...읍읍
===백두산정계비===
조선인들이 자꾸 넘어오자 청과 조선 사이의 영토를 확실하게 설정하기 위해서 세웠던 비석.
 
하지만 일처리 대충해서 좆망함. 다만 청나라나 조선이 이후 별말 안했던걸 보면 귀찮아서 대충 넘어간듯.
===간도협약===
군밤이 지 본진 털리는데 좆도 모르고 간도에 깃발을 꼽으면서 시작된 일.
 
군밤이야 뭘하든 일본은 상관 없었지만, 간도가 조선의 영토로 편입될 경우 일본이 간도를 먹는거라서 일본이 은근히 밀어줬다.
 
일본이 자꾸 지랄하면 귀찮아질걸 염려한 청나라가 철도부설권 넘겨주고 대신 간도 영토를 청나라 것으로 확정 받는걸로 상황 정리.
 
==결론==
중국땅 맞다.
 
 
 
에초에 시발 간도는 발해 이후로 쭉 만주족의 땅이였다. 고려때 동북9성은 관리가 안되서 여진족에 돌려줬고
 
세종때 4군6진 점령해서 사민정책으로 가까스로 우리땅 만든게 끝이다. 압록강 두만강 이북은 조선시대에 우리영토로 생각을 안했다.
 
뭐 우리 선조들은 만주벌판을 뛰어댕겼당께요 라는 생각은 했지. 그래도 실효지배가 되든해야 우리땅이라 우길수있는거 아니냐?
 
그럼 제주도도 옛날에 독립국이였으니 지금 딴나라였겠네?
 
북벌도 생각으로만 그쳤을뿐 조선시대에 간도에 지방관을 파견한적도 없을뿐더러 '월강죄'라 하여 국경을 넘을시 처형하던게 조선이다.
 
청이 좆망해가고, 조선땅=우리땅이라는 꿍꿍이를 가진 좆본놈들을 등에업어 이것저것 쑤셔볼수 있던 대한제국시절에
 
청견제용으로 정계비 북위토문 트집걸고, 간도관리사 한번 파견했다고 우리영토랜다 ㅉㅉ
 
당시 청나라가 응 그래 내땅줄게 하던것도 아닌데. 트집잡아가며 대륙 땅따먹기하던 열강들하고 비슷한짓 하는 수준 ㅆㅅㅌㅊ
 
 
 
아니 정계비를 세울당시, 상식적으로 청나라 만주족새끼들이 자기들의 발상지라고 신성시하며 봉금령으로 출입금지조치까지 내린 땅을
 
조선의 영토로 내줬을까?것도 병자년에 찌발린 놈들한테???
 
토문강 논쟁은 청 관리새끼의 직무유기로 벌어진 일이고, 조선도 정계비가 잘못된걸 인식하는 내용이 조선왕조실록에 자~세히 기록되있다.
 
나중에 곶종새끼가 트집잡아서 그렇지.
 
 
 
발해,고구려시절엔 우리땅이였다면서 간도가 우리땅이라 주장하는 새끼들은 환빠새끼들이랑 다를바가 없다. 양심무엇?
 
그런논리면 몽골도 원나라때 지들이 지배한 땅들을 주장할수 있으며,
 
짱깨들도 한사군 운운하며 한반도북부 지들꺼라 지랄'만' 하는건 가능하다.
 
영토가 밥먹듯이 바뀌던 전근대시기에 우리땅이었다는 이유로 현재에 와서 영유권을 주장해봤자 당사국들은 콧방귀만 뀔 뿐이다.
 
꼬우면 전쟁하던가 시발 미쳤냐 응 절대안줘~
 
 
 
마찬가지로 당시 우리민족이 많이 넘어가 살았다고 우리땅이라는 논리도 좆까라고 하면 된다.
 
실효지배하던것도 아니고 걍 넘어가서 살던걸로 영유권을 주장할수 있으면 싱가포르도 중국땅이고 제주도도 중국땅이겠네?
 
코리안타운도 영유권 씹가능하냐?
 
 
 
지금 북한과도 통일을 못한 마당에 간도 내놔라 해봤자...짱깨새끼들의 북한 무력 분할점령 가능성이나 걱정해야 할때 아니냐?
 
통일하면 응 시발 간도 내놔~할 새끼들을 지들 분할될까봐 동북공정 벌이는 짱깨들이 잘도 방관해 주겠고,
 
남한주도의 평화적인 통일을 지지하는 국제사회가
 
고토수복을 주장하며 영토확장하려는 지극히 민족주의스러운 새끼들을 잘도 좋아라 해주겠다.
 
 
 
간도회복 주장은 걍 외교용이고 중국견제카드일뿐
 
민족주의적인 사관에 입각한 간도회복론을 진짜 믿고 주장하는 국뽕새끼들은?
 
진짜 꼬우면 지들이 전쟁터 나가서 점령하던가 그것밖에 가능성 없음.
 
 
현재 간도, 만주는 한국 땅이라고 하는 국뽕들의 논리는 90%이상이 일제로부터 가져온거다.
 
일제도 만주 먹을라고 어용사학자들 동원했었는데 이새끼들 논리를 국뽕들이 쓰고있거든. 내선일체 ㅍㅌㅊ?
 
일단 짱깨들이 개새끼인 걸 떠나서 이 쓰잘데기 없는 땅을 다시먹을 필요도 없는 데다 만에 하나 통일된 다음 여기 먹으면 한국의 짱깨 비율만 늘어날 뿐이다. 아니 비율이 늘어나는 정도가 아니라 한국인이 소수민족 되어버린다. 간도에 사는 중국인 수가 남북한 합친 인구보다 더 많은데 뭐ㅋㅋㅋ 걍 중공 해체된 다음 조약을 맺어서 무슨 역사연구니 뭐니만 하면 된다.
 
ㄴ 지랄마라 씨발 간도 영유권을 주장해야 따먹을 각을 0.000001%라도 볼 수 있지 그 짱깨몽 좆무위키조차 간도 우리 용유권 얘기기 무근거 개소리 취급하진 않는데, 국뽕 민좆주의 까면 다 좋은 줄 아는 쿨찐들 역겹노. 가령 중국이 [[양안전쟁]]을 벌인다거나 혹은 [[중소 국경분쟁]] 시즌 2 터져서 정신없을때 우리가 북한이랑 손잡고 간도회복전쟁 벌일 가능성을 조금이라도 남겨두는 편이 좋지 않겠냐?
 
{{각주}}

2023년 8월 2일 (수) 13:53 기준 최신판

남만주 지역.

고구려때 우리나라가 한번 먹었고 발해때 한번 더 먹었지만 현재는 중국으로 소유권이 넘어간곳이다. (정확히는 청나라가 이 곳에서 발흥했다가 청나라 망하면서 땅까지 중국으로 넘어감)

여기서 살았던 놈들이 만주족.

일제 강점기 이전

[편집 | 원본 편집]

고구려와 발해때 우리땅이었다. 근데 두나라 다 망함.

이후 고려와 조선 시절 중국으로 넘어갔고 청이 중원을 먹은 이후에는 여기가 만주족 새끼들의 발상지라서 한족은 다 내쫓고 만주족만 남아서 먹고 살았다.(봉금령)


그러던 중 조선에서 탐관오리한테 쳐맞던 흙수저들이 많이 넘어가면서 영토분쟁 발생.

숙종때 이를 해결하고 영토를 확실히 정하고자 청에서 관리를 파견했다.

조선과 청은 백두산을 중심으로 서쪽은 압록강, 동쪽은 두만강을 경계로 국경을 정하려 했고, 두 강이 시작되는 지점에 정계비를 세워 표시하고자 했다.

...청 관리가 백산(白山) 산마루에 올라 살펴보았더니, 압록강(鴨綠江)의 근원이 과연 산 허리의 남변(南邊)에서 나오기 때문에 이미 경계(境界)로 삼았으며, 

토문강(土門江)의 근원은 백두산 동변(東邊)의 가장 낮은 곳에 한 갈래 물줄기가 동쪽으로 흘렀습니다. 청 관리가 이것을 가리켜 두만강(豆滿江)의 근원이라 하고

말하기를, ‘이 물이 하나는 동쪽으로 하나는 서쪽으로 흘러서 나뉘어 두 강(江)이 되었으니 분수령(分水嶺)으로 일컫는 것이 좋겠다.’ 하고, 고개 위에 비(碑)를 세우고자 하며...

 
— 숙종실록


당시의 토문강은 두만강 또는 두만강의 상류로 인식되어 있었으며 조선과 청 모두 이견이 없었다.

문제는 청 관리새끼가 송화강의 수원을 두만강의 수원으로 착각해 그곳에 서위압록 동위토문이라고 정계비를 뚝딱 처 세웠다는거다.

국경도 정했겠다 물길을 따라서 푯말을 세울려 한 조선은 시발 물이 오랑캐영토로 흐르는거보고 데꿀멍.


...흐름을 따라 거의 30리를 가니 이 물의 하류는 또 북쪽에서 내려오는 딴 물과 합쳐 점점 동북(東北)을 향해 갔고, 두만강에는 속하지 않았습니다.

기필코 끝까지 찾아보려고 한다면 사세로 보아 장차 오랑캐들 지역으로 깊이 들어가야 하며,만약 혹시라도 피인(彼人)들을 만난다면 일이 불편하게 되겠기에 앞질러 돌아오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대개 청 차관은 단지 물이 나오는 곳첫 번째 갈래와 두 번째 갈래가 합쳐져 흐르는 곳만 보았을 뿐이고, 일찍이 물을 따라 내려가 끝까지 흘러가는 곳을 찾아보지 않았기 때문에,

그가 본 물은 딴 곳을 향해 흘러가고 중간에 따로 이른바 첫 번째 갈래가 있어 두 번째 갈래로 흘러와 합해지는 것을 알지 못하여, 그가 본 것이 두만강으로 흘러 들어가는 것인 줄 잘못 알았던 것이니, 이는 진실로 경솔한 소치에서 나온 것입니다.

이미 강의 수원이 과연 잘못된 것을 알면서도 청 차관이 정한 것임을 핑계로 이 물에다 막바로 푯말을 세운다면,

하류는 이미 저들의 땅으로 들어가 향해간 곳을 알지 못하는데다가 국경의 한계는 다시 의거할 데가 없을 것이니, 뒷날 난처한 염려가 없지 않을 것입니다...

 
— 숙종실록

조선은 이거 청에 안 알렸다가 나중에 밝혀지면 좆되는거 아니냐? 라며 전전긍긍했지만

어쩌피 정계비만 잘못 박았을 뿐, 국경을 압록강 두만강으로 타결한건 누구나 아는 사실이라 스리슬쩍 넘어간걸로 보인다. 하지만...


이후 이 정계비를 빌미삼아 군밤[1]이 간도에 욕심이 생겨서 깃발을 꼽자 2차적으로 영토분쟁 발생.

조선이야 다 좆망해하는 쓰레기였으니까 조선만 주장한다면 그냥 밟아버렸으면 되지만

조선 뒤에 일본이 있었기 때문에(간도가 조센땅? 응 그럼 우리 닛뽄꺼~)쓸데없이 일 길어질걸 염려한 청나라가 안 생까고 일본이랑 간도협약 맺었다.

일제 강점기

[편집 | 원본 편집]

조선이 좆망하기 전부터 슬슬 조선인이 넘어가다가 조선이 아예 먹힌 뒤로 조선인들이 엄청 넘어가서 조선인들이 드글드글한 땅이 되었다.

독립군이랑 일본이 술래잡기하면서 로맨스 찍던곳.

독립군 세력은 먼지만도 못했지만 생각의 차이가 뭐라고 먼지들이 서로 엄청 분열했다.

합치자 합치자 말했지만 결국 간도에서 독립운동 하던놈들이 단일단체 제대로 구성한적은 한번도 없음.

만주사변 터지고 간도를 일본이 먹자 독립운동 하던놈들은 대부분 쫓겨났고, 일본 피해서 간도로 도망쳤던 조선인들은 일본한테 존나 쳐맞으면서 착취당하게 된다.

2차대전 종료 이후

[편집 | 원본 편집]

불곰이 일본을 쫓아내고 중국이 다시 먹었다.

불곰은 중국 견제하려고 북한한테 간도를 넘겨주려고 했지만[2] 일성이가 남한이랑 불장난 하는바람에 실패.

이후 쭉 중국이 먹으면서 중국땅으로 자리잡았다.

영토분쟁

[편집 | 원본 편집]

우선 알아두어야 할 것은 영토분쟁지역이라고 헬조선만 주장한다는 거다. 짱깨는 우리의 이 주장에 대꾸조차 안하고 있고 국내 역사학자들의 대다수도 아 씨발 이건 좀 아니지 않나요? 하고 있는데 역사조무사 설읍읍만 주장하ㄴ..읍읍 퉤퉤 뭐야 시발 당신 누구야 당신 누군데 나한테 김치를 먹이는 ㄱ...읍읍

백두산정계비

[편집 | 원본 편집]

조선인들이 자꾸 넘어오자 청과 조선 사이의 영토를 확실하게 설정하기 위해서 세웠던 비석.

하지만 일처리 대충해서 좆망함. 다만 청나라나 조선이 이후 별말 안했던걸 보면 귀찮아서 대충 넘어간듯.

간도협약

[편집 | 원본 편집]

군밤이 지 본진 털리는데 좆도 모르고 간도에 깃발을 꼽으면서 시작된 일.

군밤이야 뭘하든 일본은 상관 없었지만, 간도가 조선의 영토로 편입될 경우 일본이 간도를 먹는거라서 일본이 은근히 밀어줬다.

일본이 자꾸 지랄하면 귀찮아질걸 염려한 청나라가 철도부설권 넘겨주고 대신 간도 영토를 청나라 것으로 확정 받는걸로 상황 정리.

중국땅 맞다.


에초에 시발 간도는 발해 이후로 쭉 만주족의 땅이였다. 고려때 동북9성은 관리가 안되서 여진족에 돌려줬고

세종때 4군6진 점령해서 사민정책으로 가까스로 우리땅 만든게 끝이다. 압록강 두만강 이북은 조선시대에 우리영토로 생각을 안했다.

뭐 우리 선조들은 만주벌판을 뛰어댕겼당께요 라는 생각은 했지. 그래도 실효지배가 되든해야 우리땅이라 우길수있는거 아니냐?

그럼 제주도도 옛날에 독립국이였으니 지금 딴나라였겠네?

북벌도 생각으로만 그쳤을뿐 조선시대에 간도에 지방관을 파견한적도 없을뿐더러 '월강죄'라 하여 국경을 넘을시 처형하던게 조선이다.

청이 좆망해가고, 조선땅=우리땅이라는 꿍꿍이를 가진 좆본놈들을 등에업어 이것저것 쑤셔볼수 있던 대한제국시절에

청견제용으로 정계비 북위토문 트집걸고, 간도관리사 한번 파견했다고 우리영토랜다 ㅉㅉ

당시 청나라가 응 그래 내땅줄게 하던것도 아닌데. 트집잡아가며 대륙 땅따먹기하던 열강들하고 비슷한짓 하는 수준 ㅆㅅㅌㅊ


아니 정계비를 세울당시, 상식적으로 청나라 만주족새끼들이 자기들의 발상지라고 신성시하며 봉금령으로 출입금지조치까지 내린 땅을

조선의 영토로 내줬을까?것도 병자년에 찌발린 놈들한테???

토문강 논쟁은 청 관리새끼의 직무유기로 벌어진 일이고, 조선도 정계비가 잘못된걸 인식하는 내용이 조선왕조실록에 자~세히 기록되있다.

나중에 곶종새끼가 트집잡아서 그렇지.


발해,고구려시절엔 우리땅이였다면서 간도가 우리땅이라 주장하는 새끼들은 환빠새끼들이랑 다를바가 없다. 양심무엇?

그런논리면 몽골도 원나라때 지들이 지배한 땅들을 주장할수 있으며,

짱깨들도 한사군 운운하며 한반도북부 지들꺼라 지랄'만' 하는건 가능하다.

영토가 밥먹듯이 바뀌던 전근대시기에 우리땅이었다는 이유로 현재에 와서 영유권을 주장해봤자 당사국들은 콧방귀만 뀔 뿐이다.

꼬우면 전쟁하던가 시발 미쳤냐 응 절대안줘~


마찬가지로 당시 우리민족이 많이 넘어가 살았다고 우리땅이라는 논리도 좆까라고 하면 된다.

실효지배하던것도 아니고 걍 넘어가서 살던걸로 영유권을 주장할수 있으면 싱가포르도 중국땅이고 제주도도 중국땅이겠네?

코리안타운도 영유권 씹가능하냐?


지금 북한과도 통일을 못한 마당에 간도 내놔라 해봤자...짱깨새끼들의 북한 무력 분할점령 가능성이나 걱정해야 할때 아니냐?

통일하면 응 시발 간도 내놔~할 새끼들을 지들 분할될까봐 동북공정 벌이는 짱깨들이 잘도 방관해 주겠고,

남한주도의 평화적인 통일을 지지하는 국제사회가

고토수복을 주장하며 영토확장하려는 지극히 민족주의스러운 새끼들을 잘도 좋아라 해주겠다.


간도회복 주장은 걍 외교용이고 중국견제카드일뿐

민족주의적인 사관에 입각한 간도회복론을 진짜 믿고 주장하는 국뽕새끼들은?

진짜 꼬우면 지들이 전쟁터 나가서 점령하던가 그것밖에 가능성 없음.


현재 간도, 만주는 한국 땅이라고 하는 국뽕들의 논리는 90%이상이 일제로부터 가져온거다.

일제도 만주 먹을라고 어용사학자들 동원했었는데 이새끼들 논리를 국뽕들이 쓰고있거든. 내선일체 ㅍㅌㅊ?

일단 짱깨들이 개새끼인 걸 떠나서 이 쓰잘데기 없는 땅을 다시먹을 필요도 없는 데다 만에 하나 통일된 다음 여기 먹으면 한국의 짱깨 비율만 늘어날 뿐이다. 아니 비율이 늘어나는 정도가 아니라 한국인이 소수민족 되어버린다. 간도에 사는 중국인 수가 남북한 합친 인구보다 더 많은데 뭐ㅋㅋㅋ 걍 중공 해체된 다음 조약을 맺어서 무슨 역사연구니 뭐니만 하면 된다.

ㄴ 지랄마라 씨발 간도 영유권을 주장해야 따먹을 각을 0.000001%라도 볼 수 있지 그 짱깨몽 좆무위키조차 간도 우리 용유권 얘기기 무근거 개소리 취급하진 않는데, 국뽕 민좆주의 까면 다 좋은 줄 아는 쿨찐들 역겹노. 가령 중국이 양안전쟁을 벌인다거나 혹은 중소 국경분쟁 시즌 2 터져서 정신없을때 우리가 북한이랑 손잡고 간도회복전쟁 벌일 가능성을 조금이라도 남겨두는 편이 좋지 않겠냐?

각주

  1. 이 정신병자새끼는 지 나라도 좆망해가는 와중에 청 망해간다고 간도에 찝쩍대고 의화단진압에 숟가락 올리려고했다. 뭐 이딴 새끼가 다 있지?
  2. 간혹 가다 '조선의용대가 국공내전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기 때문에 중공으로부터 받아낸거다'라고 하는 국뽕들이 있다. 택동이가 또라이인건 사실이지만 그딴 이유로 자국 영토를 떼어주겠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