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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외로 김여물과는 2대에 걸쳐 친구지간이었는데 여기서는 신립이 주장, 김여물이 부장이었으나 능양반정때는 김류(김여물의 아들)가 주장, 신경진(신립의 아들)이 부장이었다. | 그외로 김여물과는 2대에 걸쳐 친구지간이었는데 여기서는 신립이 주장, 김여물이 부장이었으나 능양반정때는 김류(김여물의 아들)가 주장, 신경진(신립의 아들)이 부장이었다. | ||
== 탄금대 전투 관련 | == 탄금대 전투 관련 긍정론 == | ||
사실 탄금대 전투에 관련되어 신립에 부정적 의견이 대다수이다. | 사실 탄금대 전투에 관련되어 신립에 부정적 의견이 대다수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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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경세재와 유기적으로 연결된 주성이 함락되어 버려 애초의 작전 자체가 폐기되자, 신립의 선택지가 협소하게 한정되어버렸다는 것이다. | 문경세재와 유기적으로 연결된 주성이 함락되어 버려 애초의 작전 자체가 폐기되자, 신립의 선택지가 협소하게 한정되어버렸다는 것이다. | ||
허나 | 신립이 믿고 있는 기마부대라봤자 전체전력의 일부이고, 조선군은 대부분 농민강제 징집병에 불과한 상황에서, 그 전쟁의 달인들인 일본군을 상대로 승산이 있는 전술이라면 물량전 정도일 텐데, 전의가 바닥인 징집군에게 유일하게 전의를 갖추게 할 수 있는 길은 배수진 외에는 찾기 힘들다는 판단이 컸다는 것이다. | ||
전쟁은 신립군이 초승달 모양으로 일본군을 애워싸서 총공격을 가하는 형태로 이루어졌다. 초승달 양 끝을 신립의 기마병이 담당하여 일본군을 포위하면 가운데의 대규모의 징집군이 머릿수로 밀어서 깔아뭉갠다는 전략이었다. | |||
허나 고니시군은 이를 간파하고 초승달의 양끝날 부분에 조총부대를 배치하여 맹렬하게 공격하여 무너뜨렸고, 중앙에 몰려있는 오합지졸 조선군에 총돌격을 하자 징집병들은 겁에질려 후퇴하다 전부 강물에 빠져죽고 말았다. | |||
이처럼 결과는 참혹하게 끝나버렸고, 몇차례의 전투로 적의 진군속도를 늦출 수 있는 규모의 대군을, 단 한타 싸움으로 완전히 붕괴시켜 버린 책임이 있기에 신립 재평가는 앞으로도 어려울듯 하다. | |||
[[분류:임진왜란]] | [[분류:임진왜란]] | ||
2016년 3월 19일 (토) 22:22 판
일단 명장은 명장 맞다.
기병 하나만 다룰줄 알지 다른건 그냥 평타수준.
그러나 평화속에서 병신이 되어있던 당시의 헬조선에서
기병이나마 명장급으로 다뤄줬던 신립이 있었던 것은 틀림없는 큰 유산이었다.
니탕개의 난을 기병으로 진압했을 때는 선조가 직접 신립에게 곤룡포를 입혀줄 정도로 극진한 대우를 받기까지 했다.
자기 실력에 대한 자신감이 존나 강해서 류성룡이 대조총전술에 대한 연구를 하라고 신립에게 숙제를 내줬으나 신립은 류성룡을 비웃었다.
물론 어느정도 이해가 가기는 한다. 지금으로 치자면 책상공무원이 국방부장관한테 전술에 대해 논한 수준이니깐.
임진왜란이 터진뒤 이일이 도요토미 군에 의해 개털리자 그 후속타로 파병되었다.
이 때 신립의 절친인 선조가 자신의 명검인 상방검까지 쥐어주며 신립에게 잘 무찌르고 와달라고 당부했다.
하지만 신립은 충주에 도착하자 새재가 아닌 탄금대로 내려가서 싸웠다. 결국 모두가 사이좋게 벌집핏자가 되었다.
그 탓에 근현대 학자들 사이에서 개병신 쓰레기 공갈명장 취급 받았으나
하나하나 따져보면 어느정도 이해가 가기는 함.
일단 가장 잘 다루는 병과가 기병인데다가 기병이 주력인 북방에서 싸웠던지라 일본군에 대한 지식이 부족했다.
둘째로 새재에서 싸우려고 하면 왜군이 딴 지방으로 돌아가서 한양을 ㅁㅈㅎ 시키면 그만이었고.
셋째로 조총의 위력을 잘 이해하지 못한 상태였다.
그외로 김여물과는 2대에 걸쳐 친구지간이었는데 여기서는 신립이 주장, 김여물이 부장이었으나 능양반정때는 김류(김여물의 아들)가 주장, 신경진(신립의 아들)이 부장이었다.
탄금대 전투 관련 긍정론
사실 탄금대 전투에 관련되어 신립에 부정적 의견이 대다수이다.
물론 긍정론도 존재 한다.
애초에 신립이 문경세제와 유기적으로 연결된 성을 주성으로 삼아 방어전을 치루려는 계획을 했는데, 이미 신립이 당도하기 전에 고니시의 선발부대가 야밤을 틈타 해당 성을 점거해버렸기 때문이다.
문경세재와 유기적으로 연결된 주성이 함락되어 버려 애초의 작전 자체가 폐기되자, 신립의 선택지가 협소하게 한정되어버렸다는 것이다.
신립이 믿고 있는 기마부대라봤자 전체전력의 일부이고, 조선군은 대부분 농민강제 징집병에 불과한 상황에서, 그 전쟁의 달인들인 일본군을 상대로 승산이 있는 전술이라면 물량전 정도일 텐데, 전의가 바닥인 징집군에게 유일하게 전의를 갖추게 할 수 있는 길은 배수진 외에는 찾기 힘들다는 판단이 컸다는 것이다.
전쟁은 신립군이 초승달 모양으로 일본군을 애워싸서 총공격을 가하는 형태로 이루어졌다. 초승달 양 끝을 신립의 기마병이 담당하여 일본군을 포위하면 가운데의 대규모의 징집군이 머릿수로 밀어서 깔아뭉갠다는 전략이었다.
허나 고니시군은 이를 간파하고 초승달의 양끝날 부분에 조총부대를 배치하여 맹렬하게 공격하여 무너뜨렸고, 중앙에 몰려있는 오합지졸 조선군에 총돌격을 하자 징집병들은 겁에질려 후퇴하다 전부 강물에 빠져죽고 말았다.
이처럼 결과는 참혹하게 끝나버렸고, 몇차례의 전투로 적의 진군속도를 늦출 수 있는 규모의 대군을, 단 한타 싸움으로 완전히 붕괴시켜 버린 책임이 있기에 신립 재평가는 앞으로도 어려울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