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라: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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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에도 큰 비중을 가지고 있다. 이는 바로 위만조선을 멸망시킨 것이 전한이기 때문이다. 다만 위만조선은 이전의 남월에 비하면 한나라도 꽤나 고생을 해서 멸망시켰으니 위안을 삼아야 할까싶다. 그리고 정복한 한반도 북부에 한사군을 설치하였는데, 유민들의 저항과 고구려의 성장과 한사군 자체의 통제력 문제로 얼마 못가 통제력을 상실하고, 이때 부여와의 관계도 다소 서먹해졌다.  
한국의 역사에도 큰 비중을 가지고 있다. 이는 바로 위만조선을 멸망시킨 것이 전한이기 때문이다. 다만 위만조선은 이전의 남월에 비하면 한나라도 꽤나 고생을 해서 멸망시켰으니 위안을 삼아야 할까싶다. 그리고 정복한 한반도 북부에 한사군을 설치하였는데, 유민들의 저항과 고구려의 성장과 한사군 자체의 통제력 문제로 얼마 못가 통제력을 상실하고, 이때 부여와의 관계도 다소 서먹해졌다.  
다만 한사군 자체는 본국인 한나라가 멸망한 지 한참 뒤인 4세기 초반까지 존속했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전한의 위업이라는게 죄다 한무제 때 이루어졌는데. 이에 따른 엄청난 지출이 있었고, 그것은 고스란히 전한에게 막대한 피해로 되돌아왔다. 단 한무제 이후로 전한이 그 정도의 넘치는 포스를 보여주지는 못했지만, 성급하게 다 망해간다고 판단하는 것은 무리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전한의 위업이라는게 죄다 한무제 때 이루어졌는데 이에 따른 엄청난 지출이 있었고, 그것은 고스란히 전한에게 막대한 피해로 되돌아왔다. 단 한무제 이후로 전한이 그 정도의 넘치는 포스를 보여주지는 못했지만, 성급하게 다 망해간다고 판단하는 것은 무리다.  


선제라는 명군의 활약으로 어느정도 후유증을 회복했고, 망해간다는 나라의 인구가 6000만을 바라보고 있는데 한은 멸망할때까지 그 망해간다는 전한의 인구수에 도달하지 못하고(현 학계에선 늘거나 비슷한 수치였지만 그것을 집계할 능력의 부재로 인한 사태로 판단코있다.) 멸망했다. 삼국시대가 시작되면서 그 인구 숫자는 더 나락으로 떨어지고 몇백년이 넘도록 회복이 되지 못했는데, 중국 대륙이 다시듬 그 시기의 이상의 인구 숫자를 회복한 때는 무려 600년이 지난 수문제의 빛나는 개황의 치 시대였다. 하지만 수양제가 출동하면 어떨까?
선제라는 명군의 활약으로 어느정도 후유증을 회복했고, 망해간다는 나라의 인구가 6000만을 바라보고 있는데(기원후 2년 기준, 5767만 명) 후한은 멸망할때까지 그 망해간다는 전한의 인구수에 도달하지 못하고(현 학계에선 늘거나 비슷한 수치였지만 그것을 집계할 능력의 부재로 인한 사태로 판단하고 있다.) 멸망했다. 삼국시대가 시작되면서 그 인구 숫자는 더 나락으로 떨어지고 몇백년이 넘도록 회복이 되지 못했는데, 중국 대륙이 다시금 그 시기의 이상의 인구 숫자를 회복한 때는 무려 600년이 지난 수문제의 빛나는 개황의 치 시대였다. 하지만 수양제가 출동하면 어떨까?


전한이 멸망할때를 보면 중국사에서도 유례없이 조용하게, 별다른 일 없이 왕망에게 넘어간다. 왕망의 신급의 정보조작 능력이 큰 힘을 발휘했다. 왕망은 자신을 꾸미는데 엄청난 재주를 지녔는데, 후대에는 별 생각없이 시행되었던 선양도 왕망의 손에 의해서 만들어졌다 결국 후대의 황제들이 너무 나이가 어리거나 황제가 되기에는 부적절한 인물이 계속 나타나면서 왕망에게 빼앗겼지만, 그렇게 전한이 급속도로 내리막길을 걸었다면, 온갖 권력쟁탈의 대결이 벌어지며 대혼돈이 일어났어야 앞뒤가 맞지 않을까?
전한이 멸망할때를 보면 중국사에서도 유례없이 조용하게, 별다른 일 없이 [[왕망]]에게 넘어간다. 왕망의 신급의 정보조작 능력이 큰 힘을 발휘했다. 왕망은 자신을 꾸미는데 엄청난 재주를 지녔는데, 후대에는 별 생각없이 시행되었던 선양도 왕망의 손에 의해서 만들어졌다 결국 후대의 황제들이 너무 나이가 어리거나 황제가 되기에는 부적절한 인물이 계속 나타나면서 왕망에게 빼앗겼지만, 그렇게 전한이 급속도로 내리막길을 걸었다면, 온갖 권력쟁탈의 대결이 벌어지며 대혼돈이 일어났어야 앞뒤가 맞지 않을까?


역시나 대혼돈을 피해가지 못했다. 전한의 6천만에 가까웠다는 인구수가 조사된 시기가 AD 2년이었는데, 광무제가 죽은 AD 57년의 인구수는 2800만이었다. 무슨 짓을 한거냐 왕망 (다만 인구 통계의 경우 호적에 모든 인구가 잡히지 않았다는 사실을 고려해야 한다. 평시에도 유교적 정책에 의해 백성의 부담을 줄이고자 호구조사를 엄격히 하지 않는 경향이 있었고, 난세가 되면 유랑민이나 대호족의 예속민이 누락되기 일쑤였다. 그러므로 난세의 인구급감은 대규모의 아사나 학살의 문제도 있지만, 국가의 행정체계와 통제력의 붕괴로 인한 제대로된 호구 조사와 이에 따른 합당한 파악이 이루어 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역시나 대혼돈을 피해가지 못했다. 전한의 6천만에 가까웠다는 인구수가 조사된 시기가 AD 2년이었는데, 광무제가 죽은 AD 57년의 인구수는 2800만이었다. 무슨 짓을 한거냐 왕망 (다만 인구 통계의 경우 호적에 모든 인구가 잡히지 않았다는 사실을 고려해야 한다. 평시에도 유교적 정책에 의해 백성의 부담을 줄이고자 호구조사를 엄격히 하지 않는 경향이 있었고, 난세가 되면 유랑민이나 대호족의 예속민이 누락되기 일쑤였다. 그러므로 난세의 인구급감은 대규모의 아사나 학살의 문제도 있지만, 국가의 행정체계와 통제력의 붕괴로 인한 제대로된 호구 조사와 이에 따른 합당한 파악이 이루어 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