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주군: 두 판 사이의 차이
편집 요약 없음 |
|||
| 1번째 줄: | 1번째 줄: | ||
{{황해도행정구역}} | {{황해도행정구역}} | ||
황해도에서 | |||
== 개요 == | |||
[[황해도]]의 군중 하나. 황해도에서 ''''황''''자가 이 황주를 가리킨다. 조선시대 황해도가 설치될 때 주요도시가 되었지만 황해도 전체가 듣보잡화되면서 인지도가 바닥으로 떨어졌고 황주는 [[평양]]권에 속한 깡촌으로 전락했다. 되려 [[일제강점기]]시기 [[사리원시|사리원]]이 개발되고 황주 송림역에 겸이포 제철소가 개발되면서 황해도의 '황'자를 상징하는 대도시로 부활했다. 하지만 [[고난의 행군]]때문에 예전과 같은 듣보 시골로 전락. | |||
== 연혁 == | |||
=== 고려이전 === | |||
지금은 제철소와 공단으로 뒤덮인 겸이포읍에서 신석시유물이 발굴되었다. 이후 심촌리, 고연리에서 청동기시대 주거지 5곳이 발견되었고, 정방산에서 탁상식+기반식이 스까된 200기이상의 지석묘군에서 간석기, 세형동검, 오수전등 여러 종류의 청동기유물이 출토되었고 이때부터 주요 청동기문화 중심지가 되었고 [[고조선]]의 땅이 되었다. | |||
고조선멸망이후 [[한나라]]는 지금의 흑교면지역에 둔유현(屯有縣)이 설치되었다. 이때부터 황주군 남쪽에 있는 고개인 '''자비령(慈悲嶺)'''이 평양으로 가는 교통의 요지가 되서 그런가 [[공손강]]시기 대방군을 신설할 때, 이 현이남의 7개현지역 황무지를 대방군으로 분리했다. | |||
미천왕시기 [[고구려]]를 점령하면서 고구려땅이 되었다. 한동안 둔유현이라고 불렸겠지만 시간이 지난 뒤 우동어홀(于冬於忽), 동홀(冬忽)이라고도 불렀다. [[나당전쟁]]승리이후 [[대동강]]남쪽에 속하여 [[신라]]의 땅이 되었고 [[경덕왕]]시기 취성군(取城郡)으로 개명되었다. 하지만 실제로 군이 설치된 것은 아무리 잘쳐줘도 [[헌덕왕]]시기였다. | |||
[[후삼국시대]]가 한창인 905년, 황주(黃州)로 개편되었고 황보제공의 땅이 되었지만 패서호족들이 [[궁예]]와 함께 활동하면서 후고구려땅이 되었다가 궁예띨망이후 [[고려]]로 편입되었다. 이후에도 한동안 황보씨가 이지역의 머튽으로 군림했다. | |||
983년 [[최승로]]의 건의로 전국 12목이 파견될 때 본주에 황주목이 파견되었고 993년 절도사가 파견되면서 천덕군절도사(天德軍節度使)가 파견되었고, 관내도에 편입되었다. 1012년 절도사가 폐지되고 안무사가 파견되었다가 1018년 목이 파견되었다. 이후 5도 양계로 지방제도가 정비되면서 [[황해도|서해도]]에 속했고 황주자체는 [[봉산군|봉주]], [[신천군|신주]], [[중화군#現 북괴령 상원군 지역|토산현]]을 속현으로 거느렸다. | |||
1217년 [[거란]]군의 침입을 막지 못했다고 고령군(固寧郡)으로 강등되었다가 후에 황주목으로 복귀되었다. 이때 잠깐 [[평안도|서북면]]에 속했다 말았다. | |||
=== 조선이후 === | |||
[[조선시대]] 황주군 남쪽 봉산과의 경계에 극성진(棘城鎭)이 설치되었고 1449년 황해도병마도절제사영을 재설치하면서 이곳에 관찰사가 설치되었다. 이후 1593년 황해도병영이 재설치되면서 1601년부터 황주가 병영소재지로 정착되었다. [[정묘호란]]이후 정방산성을 개수, [[청나라]]의 침공에 대비했지만 [[병자호란]]시기 [[김자점]]씨발새끼때문에 제대로 써먹지도 못했다. | |||
청나라시기엔 짱깨사신들의 주요 방문지로 속했다. [[순조]]시기 황강현(黃岡縣)으로 강등먹었다가 황주목으로 회복되었다. 1895년 황주군으로 개편, 평양부에 속했다가 [[갑오개혁]]이후 황해도에 속하게 되었다. 송림면이 겸이포면으로 개명, 이후 분단이전 한국의 핵심 제철소였던 겸이포제철소가 건설되었다. | |||
[[8.15 광복]]이후 [[38선]]이북에 속했기 때문에 [[소련군정]], [[북괴]]에 속했다. 공산치하에서 겸이포읍이 송림면에 편입되고 1947년 송림시로 독립했다. [[6.25 전쟁]]중 [[1.4 후퇴]]후 [[국군]]이 수복하는데 실패하면서 그대로 [[북괴]]땅이 되었다. | |||
1952년 [[군면리 대폐합]]으로 인해 인교면, 도치면, 구락면이 [[서흥군]] 도면, 소사면, 세평면, [[수안군]] 율계면 6개리와 함께 연탄군으로 분리되었고 천주면 1개리가 상원군으로 넘어갔으며 나머지는 그래도 황주군에 남았다. | |||
== 행정구역 == | |||
=== 황주읍 === | |||
'''黃州邑''' | |||
면적 41.26㎢. 읍 소재지는 황강리. | |||
황강(黃崗), 덕월(德月), 적벽(赤壁), 성남(城南), 벽성(碧城), 제안(齊安), 예동(禮洞), 동천(東天), 신상(新上), 성북(城北), 운봉(雲峰)의 11개리를 관할했다. | |||
1914년 제안면(齊安面)이라 칭했다가 이후 황주면으로 개칭되었고 1937년 읍으로 승격되었다. | |||
동북쪽에 천주산이 솟아있고 그 여맥이 읍 서남으로 뻗어내려 200m 이하의 구릉이 기복되어 있고 나머지는 평지를 이룬다. 황주천(黃州川)이 면 남부를 북서류하다 여러 작은 개울이 합류해 [[대동강]]으로 들어간다. [[사과]]와 같은 과일재배가 활발히 이뤄졌다고 한다. | |||
황주읍성, 덕월산성, 월파루, 태허루 등이 있었는데.... [[6.25 전쟁|알지?]] [[도서정리사업|어쩔 수]] [[고난의 행군|없어]]. | |||
== 아웃풋 == | == 아웃풋 == | ||
* [[박은식|태백광노]] | * [[박은식|태백광노]] | ||
2019년 8월 21일 (수) 19:48 판
| 자치시 | 해주시 · 사리원시 · 송림시 | |
|---|---|---|
| 자치군 | 벽성군 · 연백군 · 금천군 · 평산군 · 신계군 · 장연군 · 송화군 · 은율군 · 안악군 · 신천군 재령군 · 황주군 · 봉산군 · 서흥군 · 수안군 · 곡산군 · 옹진군 | |
| 참고 | 참고: 한국의 행정구역·밑줄: 도청소재지 | |
개요
황해도의 군중 하나. 황해도에서 '황'자가 이 황주를 가리킨다. 조선시대 황해도가 설치될 때 주요도시가 되었지만 황해도 전체가 듣보잡화되면서 인지도가 바닥으로 떨어졌고 황주는 평양권에 속한 깡촌으로 전락했다. 되려 일제강점기시기 사리원이 개발되고 황주 송림역에 겸이포 제철소가 개발되면서 황해도의 '황'자를 상징하는 대도시로 부활했다. 하지만 고난의 행군때문에 예전과 같은 듣보 시골로 전락.
연혁
고려이전
지금은 제철소와 공단으로 뒤덮인 겸이포읍에서 신석시유물이 발굴되었다. 이후 심촌리, 고연리에서 청동기시대 주거지 5곳이 발견되었고, 정방산에서 탁상식+기반식이 스까된 200기이상의 지석묘군에서 간석기, 세형동검, 오수전등 여러 종류의 청동기유물이 출토되었고 이때부터 주요 청동기문화 중심지가 되었고 고조선의 땅이 되었다.
고조선멸망이후 한나라는 지금의 흑교면지역에 둔유현(屯有縣)이 설치되었다. 이때부터 황주군 남쪽에 있는 고개인 자비령(慈悲嶺)이 평양으로 가는 교통의 요지가 되서 그런가 공손강시기 대방군을 신설할 때, 이 현이남의 7개현지역 황무지를 대방군으로 분리했다.
미천왕시기 고구려를 점령하면서 고구려땅이 되었다. 한동안 둔유현이라고 불렸겠지만 시간이 지난 뒤 우동어홀(于冬於忽), 동홀(冬忽)이라고도 불렀다. 나당전쟁승리이후 대동강남쪽에 속하여 신라의 땅이 되었고 경덕왕시기 취성군(取城郡)으로 개명되었다. 하지만 실제로 군이 설치된 것은 아무리 잘쳐줘도 헌덕왕시기였다.
후삼국시대가 한창인 905년, 황주(黃州)로 개편되었고 황보제공의 땅이 되었지만 패서호족들이 궁예와 함께 활동하면서 후고구려땅이 되었다가 궁예띨망이후 고려로 편입되었다. 이후에도 한동안 황보씨가 이지역의 머튽으로 군림했다.
983년 최승로의 건의로 전국 12목이 파견될 때 본주에 황주목이 파견되었고 993년 절도사가 파견되면서 천덕군절도사(天德軍節度使)가 파견되었고, 관내도에 편입되었다. 1012년 절도사가 폐지되고 안무사가 파견되었다가 1018년 목이 파견되었다. 이후 5도 양계로 지방제도가 정비되면서 서해도에 속했고 황주자체는 봉주, 신주, 토산현을 속현으로 거느렸다.
1217년 거란군의 침입을 막지 못했다고 고령군(固寧郡)으로 강등되었다가 후에 황주목으로 복귀되었다. 이때 잠깐 서북면에 속했다 말았다.
조선이후
조선시대 황주군 남쪽 봉산과의 경계에 극성진(棘城鎭)이 설치되었고 1449년 황해도병마도절제사영을 재설치하면서 이곳에 관찰사가 설치되었다. 이후 1593년 황해도병영이 재설치되면서 1601년부터 황주가 병영소재지로 정착되었다. 정묘호란이후 정방산성을 개수, 청나라의 침공에 대비했지만 병자호란시기 김자점씨발새끼때문에 제대로 써먹지도 못했다.
청나라시기엔 짱깨사신들의 주요 방문지로 속했다. 순조시기 황강현(黃岡縣)으로 강등먹었다가 황주목으로 회복되었다. 1895년 황주군으로 개편, 평양부에 속했다가 갑오개혁이후 황해도에 속하게 되었다. 송림면이 겸이포면으로 개명, 이후 분단이전 한국의 핵심 제철소였던 겸이포제철소가 건설되었다.
8.15 광복이후 38선이북에 속했기 때문에 소련군정, 북괴에 속했다. 공산치하에서 겸이포읍이 송림면에 편입되고 1947년 송림시로 독립했다. 6.25 전쟁중 1.4 후퇴후 국군이 수복하는데 실패하면서 그대로 북괴땅이 되었다.
1952년 군면리 대폐합으로 인해 인교면, 도치면, 구락면이 서흥군 도면, 소사면, 세평면, 수안군 율계면 6개리와 함께 연탄군으로 분리되었고 천주면 1개리가 상원군으로 넘어갔으며 나머지는 그래도 황주군에 남았다.
행정구역
황주읍
黃州邑
면적 41.26㎢. 읍 소재지는 황강리.
황강(黃崗), 덕월(德月), 적벽(赤壁), 성남(城南), 벽성(碧城), 제안(齊安), 예동(禮洞), 동천(東天), 신상(新上), 성북(城北), 운봉(雲峰)의 11개리를 관할했다.
1914년 제안면(齊安面)이라 칭했다가 이후 황주면으로 개칭되었고 1937년 읍으로 승격되었다.
동북쪽에 천주산이 솟아있고 그 여맥이 읍 서남으로 뻗어내려 200m 이하의 구릉이 기복되어 있고 나머지는 평지를 이룬다. 황주천(黃州川)이 면 남부를 북서류하다 여러 작은 개울이 합류해 대동강으로 들어간다. 사과와 같은 과일재배가 활발히 이뤄졌다고 한다.
황주읍성, 덕월산성, 월파루, 태허루 등이 있었는데.... 알지? 어쩔 수 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