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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사단: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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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문서: 국군 전부대중 가장 최동북단에 위치한 사단. 8 군단 예하 보병 사단이다. 강원도 양양에서 1953년 4월 21일 초대대통령인 이승만대통령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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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연대 -> 이곳역시 지형이 씹헬이지만 섹터마다 차이가 조금씩 있다.. 뒤에서 언급하는 여러 사건들의 주요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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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연대 -> 필자가 군생활하면서 겪은곳중 가장 헬.. 지형이 씹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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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연대 -> 해안쪽을 경비하는걸로 알고있음 내가 듣기론 꿀이라는데 뭐 여긴 가본적이 없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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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병연대 -> 말그대로 포병
포병연대 -> 말그대로 포병
동해선경비대 -> 이씹새끼들은 죠또 하는것도 없으면서 가오는 죤나 잡음 꿀 OF 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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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IQ -> 북괴로 금강산 관광갈때 거치는곳.. 현재는 그냥 새벽에 기동나가러 나가보면 좀비가 나올꺼같은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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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외 직할대..
그외 직할대..
수색대대에서는 송중기가 복무를 했다.
수색대대에서는 송중기가 복무를 했다.



2015년 6월 10일 (수) 01:35 판

국군 전부대중 가장 최동북단에 위치한 사단.

8 군단 예하 보병 사단이다. 강원도 양양에서 1953년 4월 21일 초대대통령인 이승만대통령의 부대기 친수와 함께 육군 본부 직할대로 창설되어 한국전쟁 말기에 활약하고, 육군 감축계획에 의해 1958년 12월 24일 해체되었다. 1975년 사단의 전신인 88보병여단이 재창설, 동해안 방어 사령부가 1 해안 전투단으로 재편성되고 동해안경비사령부(현재 7 기동 군단) 예하 56 보병 연대와 통합, 1975년 8월 1일 새로 창설된 88 보병 여단과 또다시 통폐합 및 증편되면서 1982년 8월 16일, 강원도 고성군 토성면 학야리에 재창설되어 대한민국의 강원도 고성에서 남•북 동해선 교통행 및 교류를 군사적으로 보장하며 현재까지 있다.

는 백과사전에서 흔히 볼수있는 내용.

원래이름은 뇌종부대였으나 율곡부대로 바뀌었다..(22라서 율곡이라는데 피융신들..)

부대마크를 보면 알수있지만 생긴게 콘돔이다.. 그래서 콘돔부대라고 흔히 불린다..

12년도 당시 사단장의 지시로 부대마크 변경을 추진하였으나 뒤에나올 노크귀순 사건으로 인해 사단장이 해임됨으로 무산이 되었다.

스펙타클한 군생활을 하고 싶은 이들에게 추천하는 부대이다.

첫 문서 작성자는 22사단 xx연대의 수색중대에서 복무를 했음을 밝힌다.(소대장 잘만나서 GP에서 꿀좀빰ㅋㅋ)

헬조선의 헬육군 답게 높은 난이도를 자랑하는 사단중 하나이다.

예하부대

56연대 -> 이곳역시 지형이 씹헬이지만 섹터마다 차이가 조금씩 있다.. 뒤에서 언급하는 여러 사건들의 주요 배경

55연대 -> 필자가 군생활하면서 겪은곳중 가장 헬.. 지형이 씹OP

53연대 -> 해안쪽을 경비하는걸로 알고있음 내가 듣기론 꿀이라는데 뭐 여긴 가본적이 없으니

포병연대 -> 말그대로 포병

동해선경비대 -> 이씹새끼들은 죠또 하는것도 없으면서 가오는 죤나 잡음 꿀 OF 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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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외 직할대..

수색대대에서는 송중기가 복무를 했다.


사건/사고

(사실 사건사고가 내용이 제일 많다, 대부분 정리된 내용은 RigVeda Wiki에서 가져왔음을 밝힘.)

부대원 및 거동수상자가 철책선을 뚫고 월북하거나 북한군이 월남하는 사건이 다른 최전방 주둔부대에 비해 상당히 많다. 헌병대에서 내려오는 메일을 보면 22사단의 사건/사고 내용이 자주 들어가 있다. 한 마디로 22사단의 주요 임무인 동부전선의 경계에 문제가 있는 셈인데 동부전선에서도 최동쪽을 사수하는데다 해안경계까지 맡다 보니 아무래도 현실적인 어려움도 있을 듯 하지만 휴전선을 사수하는 단일부대에서 이런 사건들의 빈도가 최근에 들어서 유독 높아진다는 점에서 문제가 더욱 심각하고 부대 입장에서도 곤혹스러운 상황이다.괜히 22사단이 별들의 무덤이 아니다.

육군 법무실 자료에 따르면 2010년 이후의 경계소홀로 인한 징계 20건 중 16건이 22사단이라고 한다. 그 외에도 병사들의 탈영 및 자살 사건도 알게 모르게 많이 일어나는 사단이기도 하다.

1. 1984년 조준희 일병 총기난사 및 월북 사건

1984년 6월 26일 오전 10-11시경 강원도 동부전선 까치봉에 있는 22사단 56연대 4대대 TOC상황실에서 522GP로부터 아비규환의 전화보고 소리와 수류탄 폭음이 들리며 사건이 알려진다.초기접보시에는 북측의 강습으로 판단했으나, 해당 GP 소속 상황병인 조준희 일병이 내무반에 수류탄을 투척하고 M-16 총기를 난사한 뒤 휴전선을 넘어 월북한 것이었으며 사건 바로 다음 날 조 일병의 대남월북권유 방송을 통해 조 일병의 월북 사실이 공식 확인되었다.

이 사고로 내무반에서 잠자던 사병들이 수류탄 파편과 총탄에 맞아 그 자리에서 숨지거나 부상을 입었으며 특히 북으로 도주하던 조 일병을 뒤쫓던 13전초중대 수색대원들도 발목 지뢰를 밟거나 신병의 오발사고로 인해 현장에서 사망하는 안타까운 사고도 추가로 발생했다. 이 사고와 관련하여 모두 15명이 사망하고 11명이 부상을 입었다. 해당 GP 신임 소대장 소위는 몸을 숨기고 있다가 살아남았으며 이 사건으로 당시 사단장 장기하 소장, 연대장, 대대장 곽근용 중령 모두 보직해임/전역 조치되었다.

최전방 부대로 강제 배치된 조준희 일병의 범행 및 월북 동기는 여러가지로 조사되었지만 제5공화국 출범기였던 1984년 당시의 정치상황과 연계된 자생 공산주의자라는 설과 군대 내의 폭력 문화의 비극이란 설 두 가지로 압축되었다. 강제입대한 상황인데다 월북 직전에 휴가 때 여자친구와 이별하는 등의 행동을 볼 때 전자가 범행동기로 강력히 대두되었으나 조 일병의 대남 방송 내용에 따르면 군대 내 폭력이 원인인데 자신이 대학교를 다니다 입대한 것을 가지고서 선임병들이 데모하다 끌려왔냐는 식으로 비아냥대며 괴롭히고 폭력을 행사한 것이라고 한다. 제5공화국 당시에는 대학 교수의 울며 겨자먹기식 승인하에 운동권 대학생을 강제 입대시키는 지도휴학 제도가 있었다. 안기부가 학생운동을 와해시키기 위해서 주도한 일명 녹화사업(2번 항목)으로 이는 동명의 드라마 제5공화국에서도 묘사된다.

이유야 어찌됐든 이 자는 자신의 전우를 살해한 중범죄자이다. 당시 시대가 암울한 상황이라고 이자의 범죄를 물타기 하는 것은 그야말로 어불성설.

사건의 규모나 파급효과는 현재까지도 대한민국 국군 창설 이래 최악의 총기사고로 기록될 정도로 상당히 심각했다고 볼 수 있지만 5공 정권하에서 보도가 통제되는 바람에 사건이 외부에 알려지지 않았고 일반 군 사고로 처리되어 피해자들은 보상도 제대로 받지 못했다.

한편 동료를 사살하고 월북했던 조 일병은 월북 이후 매일 밤 대남방송을 통해 월북을 권유하는 방송을 했던 것으로 알려졌으며 22사단 부대원들은 매일 저녁 전방 경계근무를 설 때마다 조 일병의 대남방송을 들으며 치를 떨어야 했다고 한다. 이후에도 북한 방송에 종종 나온다고 한다.

2. 2009년 민간인 월북 사건

2009년 10월 민간인 강동림(30세)이 22사단 지역 철책을 자르고 월북한 사건. #

거동수상자가 몰래 철책을 자르고 월북한 일은 2005년 철원 이후로 2번째다. 황당한 일은 북한이 이 사실을 대대적으로 방송할 때까지 철책에 구멍이 난 줄도 몰랐다. 참고로 범인은 22사단에서 근무했었다. 폭행 전과로 수배중이었으며 검거를 피해 월북한 것으로 보인다. 교도소 가기 싫다고 지옥으로 제 발로 걸어들어가다니

당연히 사단이 무너지고 국방부가 뒤집히는 사태가 발생했다. 해당 초병들은 징계받았으며 해당 소초는 공중분해되고 FEBA에서 지원자를 받아 새 소초를 꾸렸다. 여담이지만 월북 흔적은 먼저 발견한 것이 아니라 북한에서 월북자가 왔다고 광고하는 것을 본 국방부에서 철책 정밀점검 지시를 내렸고 그 결과 절단 흔적이 발견되었다. 때문에 최초발견자는 발견 직후 포상휴가 갈 수 있겠다고 좋아했지만 현실은... 어쨌든 일주일 뒤에 잡혀있었던 연대RCT는 취소되고 그 위로 소초장, 중대장, 대대장, 연대장, 사단장까지 줄줄이 보직해임되었다. 이후로 사단이 전반적으로 빡세졌다. 워낙 빡신데 뭐가 더 빡세질 게 있지

후일담으로 대남방송 나오고 철책 정밀검사로 뚫린 곳이 발견되었을때 당시 8군단장님께서 헬기타고 급하게 오시더니 "아...뚫렸구나..."라고 희대의 명언을 남기셨다.

후일담으로 사건 당시 금강산연대(육군 제5295부대) FEBA대대였던 2대대 뿐 아니라 3대대, 동연대 병력 대부분이 훈련은 죄다 때려치고 전방 철책 보수, 시야확보를 위한 불모지 작업을 하러 11월~12월에 9XX고지 언 땅에 텐트를 치고 혹사당하며 굴려졌다. 심지어 전역이나 말출을 앞둔 말년 병장들도 내내 작업하다가 전날 FEBA로 내려온 뒤에 다음날 밖으로 나갈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금강산연대(육군 제5295부대) 08년 4월에서 09년 09 군번 출신자들의 전투복들과 활동복엔 흰 페인트가 여기저기 묻어있다는 전설이...

위 후일담을 보다 정확하게 보충해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해당 순찰섹터를 담당하고 있던 대대병력이 통째로 갈려나감에 따라 FEBA로 철수했던 대대의 일부 병력을 차출하여 10월 한 달간 순찰에 투입했는데, 같은 시기 이미 보수공사에 투입되어있던 병력[2]이 있었다. 문제는 이 보수공사라는 것이 순찰로를 완전히 갈아내고 새로 건설하는 수준이었는데, 이때가 공사 초기였으므로 계단이고 뭐고 다 부숴놓은 상태였다는 점. 따라서 순찰병력들은 원래 계단이 2백개쯤 있었던 경사를 계단도 없이 오르락내리락 해야했고, 해당 지역의 토질은 비만 오면 진창이 될 만큼 좋지 않았다. 즉 오르다 미끄러지고 내리다 구르기를 반복해야 했으며 이로 인해 장비 손실이나 부상을 경험한 장병이 많다. 거기에 순찰을 강화한다며 본래 주야 2회였던 경계근무를 주간순찰, 중간순찰, 야간순찰 3회로 늘리면서 병사들의 부담이 가중되었고, 하루가 멀다하고 현장에 찾아오는 장성들을 맞이하기 위해[3] 자는 병사들을 깨워서 작업시켰으므로 일부 병사들의 수면시간은 일 3시간까지 줄어들었다.

한 달을 조금 넘는 시간 동안 대체경계에 투입되었던 이 병력은 이후 치를 떨면서 FEBA로 철수했는데, 1주 후 이번에는 철책 및 순찰로 보수공사에 부대 전체가 투입되어 다시 올라가게 되었다.(...) 11월에서 1월 초까지이며, 해당섹터는 해발 500미터 안팎의 고도로서 이미 땅이 단단하게 얼어있었으므로 길을 만들 때는 먼저 언 땅을 곡괭이로 부숴야하는 악조건이었다. 당시 체감온도는 영하 40도 이하로 내려갈 때가 많았는데, 이 추위에 대한 현장의 대처란게 면장갑을 두 겹으로 끼는 것이었다. 시중에서 구할 수 있는 그 면장갑이 맞다. 여기에 보급로조차 포장이 되어있지 않았기 때문에 차량에 의한 추진은 한계가 있었고 따라서 중간부터는 벽돌이나 기타 자재를 병사들이 인력으로(!) 수송했다. 이 작업이 얼마나 고되었는지 무릎연골이 닳아 의병제대 판정을 받은 병사까지 있었다. 해당 병사가 체중이 많은 편이라 산악지대에서의 작업에 무리가 있었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인간적으로 지나치게 가혹한 작업량이었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설상가상으로 보수공사병력과 순찰병력이 동숙을 하면서 40명 정원의 막사[4]에 200명 이상이 들어가게 되었는데, 그 추운 계절에 난방도 되지 않는 바닥에서 칼잠을 자야했던 것은 둘째치고, 생활용수가 극도로 부족했다. GOP 근무 경험자들은 알겠지만 전방의 군사시설들은 상수도로 물을 공급받는 게 아니라 지하수와 저수조로 자체조달한다. 적정인원보다 엄청난 숫자가 투입되면서 위생용수는 커녕 식용수도 부족해진 것. 거기에 공사작업은 아침식사를 하기도 전, 새벽 5시부터 저녁식사 이후 추가작업을 통해 오후 9시까지 진행될 때도 있었다. 병사들은 그야말로 극한상황에서 굴려진 셈.

그러나 이것으로 병사들의 고난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공사 완료 후 일단 FEBA로 철수했으나 이번에는 제설작업이 기다리고 있었다. 군인이 눈 치우는게 뭐가 이상하냐는 생각이 들겠지만, 이 제설작업은 GOP 보급로와 순찰로를 포함하는 제설작업이었다. 당시 상부의 지시는 이랬다. "경계력을 강화하려면 경계병력은 경계만 해야한다. 그러니 FEBA 대대들이 GOP 대대가 해야 할 제설작업까지 소화할 것." 이것만 해도 악조건인데, 이 때의 FEBA 대대들은 병력도 부족했다. 일부 보병중대의 경우 110명 정원이나 이런저런 사정으로 가용인원이 50명 아래로 내려갈 때가 있었던것. 50% 이하의 가용자원으로 두 배 이상 불어난 작업을 수행해야했던 당시 FEBA 대대들의 고충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수준이었으며, 이는 경계력 강화를 위해 GOP 대대의 병력을 120%까지 충원한다는 결정을 내리면서 FEBA 대대에 신병을 주지 않았기 때문에 발생한 일이다. 한 중대는 중대 전체에 이등병이 없었고, 일부 소대는 꺾인 상병이 막내였을 정도. 더불어 이 해는 강원도에 기록적인 폭설이 내렸던 때다.(그만해...) 하루에 4~50센티미터는 기본, 1미터의 강설량을 기록한 날도 있다.[5] 이로 인해 야간 경계근무 외에 야간 제설근무(!)라는 것이 추가되어 하룻밤에 두 번의 근무를 서는 경우까지 발생했다. 한편 GOP 제설작전에 투입된 병사들은 현장에서 동숙을 하거나 텐트를 치고 자면서 며칠 단위로 교체되는 것이 보통이었다. 6개월에 걸쳐 그야말로 인간의 한계를 시험당한 셈이다.

자랑스럽게 떠벌린 경계력 강화작업의 실태란 결국 이런 식으로 병사들을 가혹하게 몰아붙인 결과물이었다. 단지 하나의 사례에 불과하지만, 이후로도 22사단에서 빈발하는 사건사고들을 보면 지휘부가 생각하는 현장과 병사들이 경험하는 현장에 심각한 차이가 있음은 분명하다.

3. 2010년 귀순자 완전작전

2010년 3월 북한군 1명이 군사분계선을 넘어 귀순의사를 밝히자 통문으로 인도해 신병을 확보하고 추격해온 북한군과 교전을 벌여 격퇴한 사건.

사실 그렇게 엄청난 사건은 아니지만 얼마 전에 벌어진 위 사건 때문에 떨어진 사단 사기를 올리기 위해 대대적으로 선전했다.[6] 사단장이 신병 교육대를 방문하여 이 사건을 가지고 훈시를 몇 번 하였다. 사실 귀순자 유도와 추격조를 격퇴한 일이 FM대로 돌아간 건 대단한 거긴 하다.

실제 작전 참여자의 증언에 따르면 모두 성공한 작전은 아니다. 만일 1년전 민간인 월북사건이 없었다면 유공보다 징계가 더 많았을 것이나 부대 이미지 개선이 필요했기 때문에 포상위주로 이루어졌다. 귀순자 유도는 초병들의 발견으로부터 해서 잘 이루어졌으나, 조명지원까지는 완벽했는데 추적조 소탕에는 실패하였다. 중대병력이 갈겼으나 한명도 사살하지 못했다고 한다. 추적조가 물러가고 사건은 마무리가 되었다. 후일담으로 기무사에서 조사과정중에 넘어온 북한병사에게 라면 4개를 끓여주었는데 앉은 자리에서 국물까지 싹싹비웠다고 한다.

4. 2012년 북한군 귀순 사건


바로 윗 항목을 무색하게 하는 사건. 노크 귀순 사건이라고도 한다.

10월 2일 북한군 중급병사(상병) 1명이 동부전선의 철책과 경계를 넘어 주둔지에 들어와 자고 있는 소초장을 깨웠다고 한다. 이는 6일 뒤인 10월 8일에야 비로소 기사화 되었다. 기사.

이 쯤 되면, 철책에 자동문이 설치됐나 의심해야 할 판. 귀순자였기에 망정이지 무장한 특수부대였으면? 흠좀무. 게다가 상부에는 허위보고가 들어갔다고. 기사. 게다가 밝혀지기로는 처음에는 동해선 경비대를 노크했으나 응답이 없어 근처의 내륙 소초로 갔다고 한다. # 이 쯤 되면 북한군이 그동안 이쪽으로 무력도발 안해준 게 다행일 정도다.

당연히 22사단은 또 다시 뒤집어졌다. 간다! 헌병대, 영창은 충분한가? 22사단 병사들은 망했어요. 09년에 사단이 싸악 뒤집어지면서 물갈이 되었을 간부들이 2년 정도의 임기를 거치고 싸악 물갈이 된 뒤 그 후임이 다시. 야 22사단 쪽이 좀 뚫기 편하다더라?

이 결과로 22사단에서는 사단장과 연대장, 대대장이 보직해임당했고 상급부대인 8군단, 1군사령부, 합참에서 작전 관련 장교들이 보직해임이나 징계, 수사의뢰 당했다. 장군 5명, 영관급 9명이 한 방에 훅 갔다. # 다만 병사들은 규정대로 근무한 것으로 밝혀져 처벌이 없다고 한다. 10월 14일 국방장관이 대국민 사과문을 발표하여 재발 방지를 약속하였고 이로인해 1군 사령관, 제8군단장이 국방장관 명의의 엄중경고와 문책을 받았고 국방장관도 이명박 대통령으로부터 이 문제로 인해 문책을 받기도 하였다. 그야말로 장성들의 무덤. 자업자득이지만...

이 사건 이후 전 22사단 GOP에 1일 1장성 방문 캠페인이 이어졌다. 다만 이 사건 전후로 훈련없이 비상대기태세가 유지되며 유격 등의 훈련이 아예 취소가 되어서 일부 예하 대대 장병들은 좋아했다 카더라. 위병소에서부터 장성들을 맞이해야 했던 초병들은 죽어나갔지만

여담으로 사건이 발생한 2012년 10월경 병사들은 추석을 맞이하고 진지공사를 준비하던 중 사단내 훈련으로 부대의 전화와 사지방을 통제했었다. 대부분 병사들은 휴가나갔다가 복귀하는 병사들을 통해 이소식을 들었고, 발생 후 한달뒤인 2012년 11월 22사단포함 전 gop사단의 FEBA부대는 철책을 보수하러 올라갔다. 언론을 통해 귀순병사가 넘어온 과정이 공개됐는데 대략 기둥을 잡고 철조망을 벌려서 틈으로 넘어온다는 방식이었다. 이에 대해 기둥을 잡지 못하게하고 철조망이 벌어지지 못하게하고 하는등 약 한달간의 경계력 보강공사를 하였다. 철조망을 옮기고 치다보니 전투복이 찢어지는 경우도 많았다.

노크귀순이 터지고 얼마뒤에 해당 연대의 수색중대에서 연대장이 방문해서 철책을 넘어보라고 했더니 한 병사가 몇초만에 넘어서 연대장 포상을 받은 경우도 있었다.


5. 간첩선 은폐사건

09년에 발생했다는 사건. 그동안 22사단 예비역들 사이에서 도시전설 비슷하게 흐르던 이야기로 어느 날 아침 철책선에 간첩선으로 의심되는 배가 뒤늦게 발견되자 대대장이 이로인해 징계받을까 부대원들을 사사로이 동원해 이를 부숴서(!) 파묻어 버린(?!) 사건이 있었다는 이야기.

노크 귀순 사건 이후로 JTBC 다큐로드-무너진 철책선이라는 프로그램에서 예비역들이 증언한 장소(군사분계선 안)에 수사의뢰를 하자 실제로 낡은 배의 파편이 나왔다고 한다. 이런 상황임에도 22사단은 아직도 정신 못 차리고 별 명확한 근거도 없이 일단 이건 간첩선이 아니라고 했다. 수상한 배가 아니라면 왜 묻었는데? 무엇보다 설령 이게 간첩선이 아니더라도 규정상 이걸 상부에 보고할 책임이 있던 대대장을 비롯한 이 일에 관련된 책임자들의 문책에 관해서는 한 마디 말도 없었다.

이 사건은 사실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이후에도 도시전설처럼 해안경계부대에 전해 지고 있다고 한다.

6. 제22보병사단 총기난사 사건

최근 발생한 사건중 가장 임펙트가 큰 '임병장 사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