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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문 과정 중 물고문 등으로 인해 박종철은 결국 87년 1월 14일 사망하였다. | | 심문 과정 중 물고문 등으로 인해 박종철은 결국 87년 1월 14일 사망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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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시 경찰은 이를 단순한 쇼크사로 은폐하려 하였으나 중앙일보 신성호 기자의 특종 보도 덕에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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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성호 기자는 검찰 간부의 한 마디("경찰들 큰일 났어")로 경찰에 좋지 않은 일이 생긴 것을 파악, 검찰과 경찰 청사를 오가던 중 우연히 대학생의 죽음을 알게 되어 탐사보도를 통해 사건의 진상을 파악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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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기사는 1월 15일 보도되었고 경찰 측에서는 재빨리 박종철의 사인이 쇼크사라는 발표를 내놓았으나, 그 다음 날 16일 이번엔 동아일보의 특종보도로 인해 고문 사실이 밝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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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아일보는 부검을 맡았던 오연상 씨를 인터뷰하여 사체의 흔적 등 자세한 고문 사실을 보도하였다 (사회면 2단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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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국 고문에 개입한 것으로 알려진 경관 2명이 구속되었고 사건은 이렇게 마무리되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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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그 후 사건을 은폐 조작하려는 시도가 있었던 것으로 파악되었고 "진범이 따로 있다"는 사실마저 수면 위로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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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시 정의구현사제단 김승훈 신부 측에서 수감되어 있었던 이부영의 증언(진범이 3명 더 있습니다.라는 교도관의 말)을 공식적으로 폭로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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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로 인해 전두환 정권은 도덕성에 큰 타격을 입었고 검찰의 재수사 결과가 밝혀진 이후 5월 26일 노신영 국무총리와 장세동 안기부장 등이 경질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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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러한 사실을 동아일보 등 (당시 동아일보에서 탐사보도 입장에서 가장 주요한 역할을 해낸 바 있다) 주요 일간지들이 보도하였고, 신문에서 이 사실들을 접한 국민들은 공분을 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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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야당과 재야 인사들은 국민운동본부 헌법쟁취위원회를 발족시켜 민중 투쟁에 앞장섰으며 당시 직선제 요구와 맞물리며 시위의 규모는 더욱 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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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중들은 이 시기 6.10일 - 즉 노태우가 민정당의 대통령 후보로 공천되던 날 - 대규모 시위를 예고하였고, 이는 6월 항쟁의 시작이라고 볼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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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국 노태우 정권은 6.29 선언으로 사실상 항복 선고를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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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6월 2일 (화) 05:38 판
대한민국의 민주운동가. 서울대학교 언어학과 입학 후 3학년이 되던 시기 학생회장을 맡아 청계천 피복노조 사건 등 민중투쟁에 앞장섰다.
당시 박종운 등 민주화추진협회(민추협) 간부와 가깝게 지냈는데, 이로 인해 경찰 측에서 수배중이던 박종운의 행방을 묻기 위해 박종철을 강제로 연행하고 감금하였다.
심문 과정 중 물고문 등으로 인해 박종철은 결국 87년 1월 14일 사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