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천군: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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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대령강 상류인 [[삭주군]], [[태천군]], [[창성군]]에서 벌채된 소나무가 비가 와 강이 부는 날에 박천까지 보내졌는데, 여기까지 보내진 소나무로 건축재나 갱목, 원목가구등을 만들었다고 한다. | 그리고 대령강 상류인 [[삭주군]], [[태천군]], [[창성군]]에서 벌채된 소나무가 비가 와 강이 부는 날에 박천까지 보내졌는데, 여기까지 보내진 소나무로 건축재나 갱목, 원목가구등을 만들었다고 한다. | ||
송덕동에 박천향교, 둘레가 2.2km였던 박릉토성, 원남동의 아어서원(亞於書院)이 있었고, 어의동의 심곡사(心谷祠), 봉하동의 지천사(遲川祠)와 봉명사(鳳鳴祠), 용흥동의 봉강사(鳳崗祠)등의 사우가 있었다고 한다. 또한 송덕동에는 박천성적비(博川聖蹟碑)라고 [[선좆]]이 도망중 이곳에 이르렀을 때 행적을 수록한 비석이 주필각(駐蹕閣)에 보관되어있었다. | 송덕동에 박천향교, 둘레가 2.2km였던 박릉토성, 원남동의 아어서원(亞於書院)이 있었고, 어의동의 심곡사(心谷祠), 봉하동의 지천사(遲川祠)와 봉명사(鳳鳴祠), 용흥동의 봉강사(鳳崗祠)등의 사우가 있었다고 한다. 또한 송덕동에는 박천성적비(博川聖蹟碑)라고 [[선좆]]이 도망중 이곳에 이르렀을 때 행적을 수록한 비석이 주필각(駐蹕閣)에 보관되어있었다. 근데 지금은... [[6.25 전쟁|알지?]] [[도서정리사업|어쩔 수]] [[고난의 행군|없어]]. | ||
광복직후 동남면의 석화동, 학등동을 흡수했고 [[북괴]]수립직후인 1949년 리제가 실시됨에 따라 모든 동이 리로 개편되었다. 그리고 등산리에서 덕중리(德中里), 병천리에서 석우리(石隅里), 학등리에서 장등리(長嶝里), 원남리에서 원진리(元鎭里), 석화리에서 정항리(井項里), 봉하리에서 묵방리(墨房里), 미력리에서 고성리(古城里), 남하리에서 중남리(中南里)가 신설되었고 송덕리가 송사리(松四里), 창덕리(昌德里)로 분리됨에 따라 | 광복직후 동남면의 석화동, 학등동을 흡수했고 [[북괴]]수립직후인 1949년 리제가 실시됨에 따라 모든 동이 리로 개편되었다. 그리고 등산리에서 덕중리(德中里), 병천리에서 석우리(石隅里), 학등리에서 장등리(長嶝里), 원남리에서 원진리(元鎭里), 석화리에서 정항리(井項里), 봉하리에서 묵방리(墨房里), 미력리에서 고성리(古城里), 남하리에서 중남리(中南里)가 신설되었고 송덕리가 송사리(松四里), 창덕리(昌德里)로 분리됨에 따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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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德安面''' | '''德安面''' | ||
면적 38.47㎢. 면 소재지는 동사동. | |||
동사(東四), 구룡(九龍), 하칠(下七), 이봉(二峰), 사륙(四六), 남오(南五), 동팔(東八), 망우(望隅), 북일(北一), 유초(柳草), 서공(西公), 가흥(加興)의 12개동을 관할했다. | |||
본래 덕받이 안쪽에 있다고 하여 덕안면이라 명명되었고 구룡, 하칠, 이봉, 사륙, 남오, 동팔, 동사, 북일, 망우의 9개동을 관할했다. 부군면 통폐합시기 각동의 일부가 인근 동으로 옮겨지는 개판에 가까운 행정개편을 겪었다. 이후 1939년 가남면의 유초동, 서공동, 가흥동이 본면으로 넘어왔다. | |||
묘향산 지맥이 끝나는 면 북동부에 약간의 구릉지대가 있을뿐 전지역이 평지가 되었다. 청천강과 대령강사이에 있는데, 서남단인 망우동일대에서 바다로 들어갔다. 그런데 [[황하]]발 황토가 서해에서 퇴적되었다보니 1940년 두 강의 합류지점에 있던 장상도(長上島)가 망우동과 연결되면서 17.8㎢를 갈대밭으로 만들었다. 이후 [[8.15 광복]]직전까지 8㎢의 농토가 개간되었다. | |||
또한 1910년대 해창산(海滄山)아래에서 가흥동에 이르는 -자형둑이 만들어지면서 서공, 유초, 구룡, 가흥의 4개동에 펼쳐졌던 2㎢의 황무지가 덕안북평야로 개간되기도 했다. | |||
이렇게 개간되면서 본 면은 서북지역의 주요 곡창지대로 떠오르게 되었지만 북괴치하에서 주체농법으로 좆망. | |||
북일동지역은 흙이 토기를 만드는데 좋아 도자기제조로 유명했고 개간되지 않고 남았던 갈대밭에서 난 갈대를 원료로 한 삿자리 제조가 활발히 이뤄지기도 했다. | |||
그런데 철도가 없다보니 철도를 쓰려면 구룡동 구룡나루에서 배를 타고 [[안주시#신안주면|신안주]]로 건너가거나 박천읍까지 가야했다는게 문제였다.. | |||
[[살수대첩]]직후 고구려가 지금의 사륙동, 하칠동 사이에 있는 대장산(大長山) 서남쪽 기슭에 고성진(古城鎭)을 세웠지만 지금은 있었다는 카더라만 남았다. | |||
북괴수립직후인 1949년 읍면리제를 실시하면서 북일리에서 북상리(北上里), 이봉리에서 동봉리(東峯里), 남오리에서 서오리(西五里)가 신설되었다. | |||
==== 동남면 ==== | ==== 동남면 ==== | ||
'''東南面''' | '''東南面''' | ||
면적 86.21㎢. 면 소재지는 맹중동. | |||
맹중(孟中), 동남(東南), 서송(西松), 동이(東二), 송봉(松峰), 상강(上講), 대양(大楊), 일원(一院), 당상(堂上), 도남(都南), 진석(眞石), 학등(鶴登), 석화(石花), 동하(東下), 남송(南松)의 15개동을 관할했다. | |||
1914년 박천군 동면과 남면을 합하여 만들어졌다. | |||
동북부는 낮은 구릉지대이고 북부에는 봉린산으로 인한 산악지대이다. 청천강이 동남부 경계를 따라 흐르고 대령강이 서북부 경계를 따라 흘러 두 강 유역에 평야가 발달하였다. 그래서 논농사가 활발했다고 한다. | |||
[[경의선]]이 면 서남부를, 박천선이 면 서부를 남북으로 지나고 경의북도와 맹북선 2등도로가 서부를 남북으로 관통하는 교통의 요지였던 덕분에 맹중동은 인근 평야에서 생산되었던 곡물의 집산지, 운산, 북진, 창성, 대유동일대 광산에서 채굴된 광물의 거점역할을 하기도 했다. | |||
고려 문종시기 봉린산에 심원사가 건립되었는데, 단오때는 박천읍민들이 3일간 씨름대회를 벌인 뒤 심원사를 찾아 불공을 올리고 하루를 즐기는 풍습이 있었다고 한다. 도남동의 설한산(雪寒山)에서 기우제가 치뤄지기도 했다. | |||
북괴 수립직후인 1949년에는 리제가 실시되면서 맹중리에서 맹상리(孟上里), 진석리에서 진암리(眞巖里)가 신설되었다. | |||
=== 舊 가산군 지역 === | === 舊 가산군 지역 === | ||
2019년 6월 30일 (일) 03:14 판
평안북도 |
자치시 | 신의주시 | |||||||||||||||||||||||||||||||||||||||||||||||||||||||||||||||||||||||||||||||||||||||||||||||||
| 자치군 | 의주군 · 용천군 · 철산군 · 선천군 · 정주군 · 박천군 · 태천군 · 영변군 · 운산군 · 구성군 창성군 · 벽동군 · 삭주군 · 초산군 · 위원군 · 희천군 · 강계군 · 자성군 · 후창군 | ||||||||||||||||||||||||||||||||||||||||||||||||||||||||||||||||||||||||||||||||||||||||||||||||||
평안남도 |
자치시 | 평양시 · 진남포시 | |||||||||||||||||||||||||||||||||||||||||||||||||||||||||||||||||||||||||||||||||||||||||||||||||
| 자치군 | 안주군 · 대동군 · 순천군 · 맹산군 · 양덕군 · 성천군 · 강동군 · 중화군 · 용강군 · 강서군 평원군 · 개천군 · 덕천군 · 영원군 | ||||||||||||||||||||||||||||||||||||||||||||||||||||||||||||||||||||||||||||||||||||||||||||||||||
| 참고 | 참고: 한국의 행정구역 ·밑줄: 도청소재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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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천강바로 북쪽에 있는 행정구역.
역사
짱깨들이 전국시대에 병림픽하고 있을때, 연나라 새끼들이 여기 까지 쳐들어왔다고 짱깨학자들이 주장하고 있다. 그리고 짱깨동전이 좆나 많이 발굴되서 짱깨들과 부역을 한것 같으나 정말 짱깨가 먹었는지는 불확실한 동네. 걍 미스터리 투성이임. 고려때 적극적으로 개발됬는데, 하도 개병신인 동네였는지, 조선시대에 잠깐 영변군에 먹혀버림.
북괴치하에선 영변 원자력 연구소에서 사용되었던 우라늄광산으로 이용되고있다.
읍면
舊 박천군 지역
박천읍
博川邑
면적 91.99㎢ 읍소재지는 미력동.
미력(未力), 남부(南部), 남하(南下), 남호(南湖), 동부(東部), 등산(燈山), 병천(丙川), 봉상(鳳上), 봉하(鳳下), 북부(北部), 사직(社稷), 삼안(三安), 서부(西部), 송덕(松德), 용흥(龍興), 원남(元南), 추호(楸湖)의 17개동을 관할했다.
본래 군내면(郡內面)이라 칭했는데 1914년 부군면 통폐합때 박천면으로 바뀌었다. 1935년, 북면에 속했던 남하동, 사직동, 원남동, 용흥동, 가동면에 속했던 추호동이 본면으로 넘어왔고 1942년 읍으로 승격되었다.
남쪽 봉린산, 동북쪽 두모산(頭帽山, 189m)을 중심으로 낮은 구릉이 있으나 읍 서북경계를 따라 대령강이 흐르고 그 지류가 읍 전체를 망상으로 흘러 평야지대를 만들었다. 때문에 쌀, 콩, 조, 옥수수와 같은 다양한 농산물이 재배되었다.
그리고 대령강 상류인 삭주군, 태천군, 창성군에서 벌채된 소나무가 비가 와 강이 부는 날에 박천까지 보내졌는데, 여기까지 보내진 소나무로 건축재나 갱목, 원목가구등을 만들었다고 한다.
송덕동에 박천향교, 둘레가 2.2km였던 박릉토성, 원남동의 아어서원(亞於書院)이 있었고, 어의동의 심곡사(心谷祠), 봉하동의 지천사(遲川祠)와 봉명사(鳳鳴祠), 용흥동의 봉강사(鳳崗祠)등의 사우가 있었다고 한다. 또한 송덕동에는 박천성적비(博川聖蹟碑)라고 선좆이 도망중 이곳에 이르렀을 때 행적을 수록한 비석이 주필각(駐蹕閣)에 보관되어있었다. 근데 지금은... 알지? 어쩔 수 없어.
광복직후 동남면의 석화동, 학등동을 흡수했고 북괴수립직후인 1949년 리제가 실시됨에 따라 모든 동이 리로 개편되었다. 그리고 등산리에서 덕중리(德中里), 병천리에서 석우리(石隅里), 학등리에서 장등리(長嶝里), 원남리에서 원진리(元鎭里), 석화리에서 정항리(井項里), 봉하리에서 묵방리(墨房里), 미력리에서 고성리(古城里), 남하리에서 중남리(中南里)가 신설되었고 송덕리가 송사리(松四里), 창덕리(昌德里)로 분리됨에 따라
미력, 고성, 남부, 남하, 중남, 남호, 동부, 등산, 덕중, 병천, 석우, 봉상, 봉하, 묵방, 북부, 사직, 삼안, 서부, 송사, 창덕, 용흥, 원남, 원진, 추호, 석화, 정항, 학등, 장등의 28개리를 관할하게 되었다.
덕안면
德安面
면적 38.47㎢. 면 소재지는 동사동.
동사(東四), 구룡(九龍), 하칠(下七), 이봉(二峰), 사륙(四六), 남오(南五), 동팔(東八), 망우(望隅), 북일(北一), 유초(柳草), 서공(西公), 가흥(加興)의 12개동을 관할했다.
본래 덕받이 안쪽에 있다고 하여 덕안면이라 명명되었고 구룡, 하칠, 이봉, 사륙, 남오, 동팔, 동사, 북일, 망우의 9개동을 관할했다. 부군면 통폐합시기 각동의 일부가 인근 동으로 옮겨지는 개판에 가까운 행정개편을 겪었다. 이후 1939년 가남면의 유초동, 서공동, 가흥동이 본면으로 넘어왔다.
묘향산 지맥이 끝나는 면 북동부에 약간의 구릉지대가 있을뿐 전지역이 평지가 되었다. 청천강과 대령강사이에 있는데, 서남단인 망우동일대에서 바다로 들어갔다. 그런데 황하발 황토가 서해에서 퇴적되었다보니 1940년 두 강의 합류지점에 있던 장상도(長上島)가 망우동과 연결되면서 17.8㎢를 갈대밭으로 만들었다. 이후 8.15 광복직전까지 8㎢의 농토가 개간되었다.
또한 1910년대 해창산(海滄山)아래에서 가흥동에 이르는 -자형둑이 만들어지면서 서공, 유초, 구룡, 가흥의 4개동에 펼쳐졌던 2㎢의 황무지가 덕안북평야로 개간되기도 했다.
이렇게 개간되면서 본 면은 서북지역의 주요 곡창지대로 떠오르게 되었지만 북괴치하에서 주체농법으로 좆망.
북일동지역은 흙이 토기를 만드는데 좋아 도자기제조로 유명했고 개간되지 않고 남았던 갈대밭에서 난 갈대를 원료로 한 삿자리 제조가 활발히 이뤄지기도 했다.
그런데 철도가 없다보니 철도를 쓰려면 구룡동 구룡나루에서 배를 타고 신안주로 건너가거나 박천읍까지 가야했다는게 문제였다..
살수대첩직후 고구려가 지금의 사륙동, 하칠동 사이에 있는 대장산(大長山) 서남쪽 기슭에 고성진(古城鎭)을 세웠지만 지금은 있었다는 카더라만 남았다.
북괴수립직후인 1949년 읍면리제를 실시하면서 북일리에서 북상리(北上里), 이봉리에서 동봉리(東峯里), 남오리에서 서오리(西五里)가 신설되었다.
동남면
東南面
면적 86.21㎢. 면 소재지는 맹중동.
맹중(孟中), 동남(東南), 서송(西松), 동이(東二), 송봉(松峰), 상강(上講), 대양(大楊), 일원(一院), 당상(堂上), 도남(都南), 진석(眞石), 학등(鶴登), 석화(石花), 동하(東下), 남송(南松)의 15개동을 관할했다.
1914년 박천군 동면과 남면을 합하여 만들어졌다.
동북부는 낮은 구릉지대이고 북부에는 봉린산으로 인한 산악지대이다. 청천강이 동남부 경계를 따라 흐르고 대령강이 서북부 경계를 따라 흘러 두 강 유역에 평야가 발달하였다. 그래서 논농사가 활발했다고 한다.
경의선이 면 서남부를, 박천선이 면 서부를 남북으로 지나고 경의북도와 맹북선 2등도로가 서부를 남북으로 관통하는 교통의 요지였던 덕분에 맹중동은 인근 평야에서 생산되었던 곡물의 집산지, 운산, 북진, 창성, 대유동일대 광산에서 채굴된 광물의 거점역할을 하기도 했다.
고려 문종시기 봉린산에 심원사가 건립되었는데, 단오때는 박천읍민들이 3일간 씨름대회를 벌인 뒤 심원사를 찾아 불공을 올리고 하루를 즐기는 풍습이 있었다고 한다. 도남동의 설한산(雪寒山)에서 기우제가 치뤄지기도 했다.
북괴 수립직후인 1949년에는 리제가 실시되면서 맹중리에서 맹상리(孟上里), 진석리에서 진암리(眞巖里)가 신설되었다.
舊 가산군 지역
가산면
嘉山面
면적 64.12㎢. 면 소재지는 동문동.
동문(東門), 남신(南新), 대성(大成), 봉서(鳳西), 봉소(鳳巢), 신사(新沙), 용탄(龍灘)의 7개동을 관할했다.
고려이전까지 신도군(信都郡)이라 불렸다.
적유산맥의 여파로 인해 산세가 험준하고 평야가 협소하며, 중앙의 봉두산을 필두로 하여 면 대부분이 200m언저리의 구릉지대로 구성되있었다. 서남쪽 경계에 장수탄강이 심한 곡류를 만들며 남류하고, 그 근처와 동북부에 있는 삼가저수지에 약간의 충적평야가 만들어졌다.
이런 환경때문에 쌀보다는 조, 수수, 옥수수, 감자, 콘, 목화가 주로 생각되었고 평북지역 산악지대답게 목재, 목탄, 장작, 그리고 삼베, 명주가 생산되었고 소, 닭, 돼지가 사육되었다고 한다. 또한 대성동과 신사동에는 소량의 흑연, 금이 채굴되었다고 한다.
동문동에는 봉두산성(鳳頭山城), 혹은 내성(內城)이라고 불렸던 고려시대의 습홀성(濕忽城)이 있는데 석축둘레가 약 299.3m이고, 성 안에 우물 99개와 못 2개가 있었다고 한다.
봉두산에는 고려 문종시기 건립된 천황사(天皇寺), 동문동에는 가산향교와 충렬사, 효성산에는 성좌(星座)에 제를 올렸다는 효성대(曉星臺)가 있었다.
북괴 수립직후인 1949년 모든 동이 리로 바뀌었고 남신리에서 지장리(紙場里), 대성리에서 내의리(來儀里), 봉서리에서 평지리(坪地里)가 신설되어 동문, 남신, 지장, 대성, 내의, 봉서, 평지, 봉소, 신사, 용탄의 10개리를 관할하게 되었다.
서면
西面
양가면
兩嘉面
용계면
龍溪面
청룡면
靑龍面
그외
이곳에서 전해내려오는 민담들이 졸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