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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유신: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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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6월 12일 (금) 23:30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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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성립하기까지 제3공화국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나? (배경)

(국외적 상황에 대해서도 읽어보고 싶다면 유신 헌법의 배경 부분을 읽어도 좋다.)

남조선로동당에서 활동한 경력이 있었던 박정희가 1963년 대통령 선거에서 5대 대통령에 당선되자 김일성은 기뻐했다. 소식을 듣고 박수를 쳤을 정도라고 한다. 남한에서 '사회주의자' 활동 경력이 있는 사람이 대통령이라는 최고 자리에 앉게 됐으니 이는 북한의 사회주의 체제가 남한에 정착하기 수월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래서 북한에서는 실제로 축하한다는 의미에서 특사를 보냈다. 그 특사는 박정희의 형인 박상희와 같이 경북 지역에서 활동하던 사회주의 독립운동가이자 박상희와 절친한 친구였다. 기왕 보내는 거 얼굴 익숙한 사람을 보내는 게 낫지 안 그러냐.

사람이 기존에 활동하던 단체에서 빠져나와서 정반대의 성향을 가진 단체로 옮기게 되면 제일 먼저 하게 되는 일은 적극적인 행동이다. 자기가 정말로 바뀌었다는 걸 조직원들에게 인정 받지 못한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 바른정당에 있었다가 자유한국당으로 돌아간 국회의원들을 생각해보자.

마찬가지로 박정희도 남로당에서 발을 빼고 본인이 반공주의자로 전향했다는 걸 어필하려고 정말 애썼다. 박정희는 그 특사를 총살했다. (박정희는 사형은 좀 심하다고 생각했는데 당시 중정부장이었던 김형욱과 차지철이 "미국과 야당에게 꼬투리 안 잡히려면 죽여야 합니다!"라고 설득해서 결국 총살이 집행되었다.) 이에 분개한 김일성이 배신감을 많이 느낀 탓인지는 몰라도 제3 공화국 때는 북괴의 도발이 빈번하기도 했다. 박정희의 반공 정책은 뭐... 말할 것도 없다. 어쨌든 박정희는 대선에서 당선되는 시점, 혹은 그 이전부터 북한과 관계가 이렇게 없지 않아 있었다.

그로부터 8년의 시간이 흘러서 1971년 대선에서는 김대중을 힘겹게 누르고 당선된 박정희는 곧 야당에게 정권을 내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위기감을 느꼈다. 그래서 이를 타파하고자 그동안의 반공 정책에 대해서 피로감을 느꼈을 국민들을 위해서 반공을 잠시 내버려두고 질싸 남북 공동 성명을 낸다. 이 성명이 나오기까지 국제적으로는 남베트남이 패망하고(베트남의 적화통일) 중화인민공화국은 UN에 가입, 중화민국은 UN 상임이사국에서 퇴출 당하는 등 공산주의 진영의 위세가 더욱 커졌는데 그 와중에는 데탕트 덕분에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진영이 공존해도 된다는 의식이 미국과 소련 사이에서 형성된 것도 있다. (베트남 전쟁에 미국이 끼어든 덕분에 미국의 위세가 떨어진 상태였다는 걸 상기하자.)

근데 관계가 없지 않아 있었다는 북한의 김일성과 만나서 도대체 뭔 얘기가 오갔던 건지, 남북한은 공동 성명을 낸 뒤 3개월 정도 지나고 정말 우연히, 거의 동시에 개헌을 선포한다. 유신 헌법이 남한에서 선포될 때 북한에서는 김일성의 독재 체제를 강화하는 사회주의 헌법이 선포되었다. 물론 관련된 정황이나 밝혀진 게 현재도 없으니 그냥 우연의 일치라고 봐야겠다.

제1조 2항: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국민은 그 대표자나 국민투표에 의하여 주권을 행사한다.

 
— 대한민국헌법(제8호, 일명 유신 헌법) 내용

제4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주권은 로동자, 농민, 군인, 근로인테리를 비롯한 근로인민에게 있다. 근로인민은 자기의 대표기관인 최고인민회의와 지방 각급 인민회의를 통하여 주권을 행사한다.

 
— 북한 사회주의 헌법 내용

둘 다 간선제를 채택하고 있으니 당연하겠지만 내용이 좀 비슷...


유신 헌법의 탄생

북한과 성명을 발표하고 나서 본격적으로 유신 헌법이 제정되기 시작했다. 당시 중앙정보부이후락의 지시로 이른바 풍년사업이라는 암호명을 짓고 추진하여 생긴 헌법이다. 헌법의 초안을 만든 사람들 중 한명이 김기춘이었고 헌법 내용이 작성된 곳은 궁정동 안가였다.

하지만 알다시피 법을 만든다고 바로 정착되는 게 아니다. 아무리 방 구석에서 "이게 내가 만든 법이오!"하고 확성기에 대고 소리쳐봤자 의미가 없다. 국회의 투표와 대법원의 심사 등을 거쳐야 비로소 법이 된다.

그래서 그 과정이 황당하기 그지없는데 우선 국회를 해산했다. 헌법에서는 대통령의 국회 해산 권한이 없어서 문제로 지적되었으나 반대하던 야당 의원들을 감금하고 고문했다. 국회는 결국 해산되었다.

그리고 1972년 10월 17일에는 대통령 박정희가 위헌적 계엄과 국회해산 및 헌법정지 등을 골자로 하는 대통령 특별 선언을 발표한다.

헌법이 공포되면 국민투표에 부쳐서 결정한다. 근데 90%를 웃도는 엄청난 투표율과 찬성률로 통과되었고 이후 유신 헌법은 성공적으로 정착되었다.

당시 섬에 살던 주민들은 파도가 심해서 배가 못 뜨니까 본토로 올라오지 못할 뻔했는데 헤엄쳐서라도 바다를 건너서 투표를 할 정도로 투표에 대한 열기가 대단했다는 일화가 있다.

그 결과 제4 공화국이 시작되었으며 동시에 암흑의 시대로 돌입했다.

하도 논란이 많아서 1975년에도 한 번 더 투표했다. 근데 이때 투표율은 약 80%, 찬성율은 73.1%로 유신 헌법이 유지되었다.

당시 주류 언론은 신문이었고 정보에 대한 검열도 그에 따라서 용이했다는 점과 북괴의 꾸준했던 도발이 아무래도 영향을 끼친 모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