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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에선 [[비잔티움 제국]]의 몰락이 두드러지고 [[이슬람]]세력이 승승장구하기 시작했다.
서양에선 [[비잔티움 제국]]의 몰락이 두드러지고 [[이슬람]]세력이 승승장구하기 시작했다.
== 한국사에서 ==
7세기는 [[돌궐]]-[[고구려]]-[[백제]]-[[일본]]의 남북측 동맹과 [[중국]]-[[신라]]의 동서축 연합이 서로 대립하고 있던 시기이다.
고구려 영양왕은 [[수]]나라가 고구려를 공격해오기 전에 요서 지방을 선제공격(A.D 598) 하는데 이에 수 문제가 30만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를 공격하지만 실패한다.
신라의 고구려 공격을 촉구하는 '걸사표'를 받은 수 양제는 우중문을 앞세워 100만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를 공격하는데, 을지문덕이 이끄는 고구려군이
[[살수대첩]](A.D 612)으로 수의 두 차례 침입을 모두 격퇴하고, 수는 국력이 약해져 멸망하게 된다.
이후 당나라를 견제할 목적으로 [[연개소문]]이 [[부여성]]에서 비사성에 이르는 [[천리장성]]을 축조(A.D 631 ~ A.D 647)하는데 이 과정에서
요동 지역의 군사력을 장악하게 되고 결국 고구려의 실권을 장악한다.
연개소문이 대당 강경책을 펼치자, [[당]] 태종이 고구려를 공격하지만, [[양만춘]]의 [[안시성 전투]](A.D 645)로 막아낸다.
당나라는 혼자서는 고구려를 정복할 수 없음을 알게 되고, 이는 나당연합(A.D 648)의 직접적인 계기가 된다.
=== 백제 멸망 & 고구려 멸망 ===
당시 백제의 왕은 [[의자왕]]인데, 의자왕은 초기에는 대야성(합천)을 함락할 정도로 영토확장에 관심을 보였으나, 이후 사치와 향락에 빠져 국력이 약화된다.
[[계백]]의 5천결사대와 김유신의 전투인 [[황산벌]] 전투 이후에 당의 소정방과 신라군이 연합하여 사비성을 함락시키고(A.D 660) 백제는 멸망한다.
이후 흑치상지, 복신, 도침, 부여풍이 임존성과 주류성에서 백제 부흥운동을 벌이고, 일본(군)의 지원으로 [[백강전투]](A.D 663)가 벌어지지만
실패로 돌아간다.
당군과 신라의 [[김인문]]의 활약으로 [[평양성]]이 함락되고(A.D 668) 고구려는 멸망한다.
고구려 역시 고연무와 검모잠이 오골성과 한성에서 고구려 부흥운동을 벌이고, 보장왕의 서자는 금마저에서 [[보덕국]]을 건국한다.
=== 나당전쟁 ===
당은 한반도 지배 야욕을 가지고 있었고, 신라는 삼국통일이 목적이였기에 [[나당전쟁]]은 불가피했다.
당이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평양에 안동 도호부를 설치(A.D 668)한 것을 기점으로 전쟁이 발발하는데
이때 신라가 안승의 고구려 부흥운동을 지원하고, 백제의 웅진 도독부를 축출하고 소부리주를 설치하는 등
고구려와 백제의 유민들을 지원해 줌으로서 민족 의식이 형성되었다.
나당전쟁은 [[임진강]] 유역에서 마전*적성 전투(A.D 675) 가 벌어지고
경기 [[연천]]의 매소성 전투(A.D 675) 당의 이근행의 20만 대군을 격파하고
기벌포에서 설인귀의 해군을 격파하여 당을 몰아내고 [[삼국통일]]을 달성한다.
=== 신라 연표 ===
*진평왕
고구려와의 전투에서 고구려의 [[온달]] 장군이 전사한다.(A.D 590)
[[원광]]이 '걸사표를 써 수나라로 하여금 고구려를 공격해달라는 요청을 하였으며
[[경주]] 남한산성을 축조하였는데, 이 내용은 남한산성비에 쓰여 있다.
*[[선덕여왕]]
자장의 건의로 [[황룡사 9층목팁]]을 건립하고, 분황사와 [[첨성대]]를 건립한다.
[[비담]]의 반란을 진압한다.
*진덕여왕
불교식 왕명에서 중국식 연호로 바꿔 사용하며 나당연합이 체결된 시기이다.
*무열왕([[김춘추]], A.D 654 ~ A.D 661)
최초의 진골 출신 왕이였는데, 이로서 원래 왕족이였던 성골이 폐지된다.
가야 출신 김유신의 누나를 왕비로 맞음으로서 왕비족이였던 박씨 시대를 종식시키고, [[갈문왕]] 제도를 폐지한다.
왕의 시중인 [[중시]]의 기능을 강화시키고, 귀족들의 수상인 상대등을 억압시켜 왕권강화에 힘썼으며 태종이라는 시호를 사용한다.
백제를 멸망시킨다.
*[[문무왕]](A.D 661 ~ A.D 681)
삼국 통일을 완성(A.D 676)하고 부서로, 형법/법률을 제정하는 우이방부와 선박을 관리하는 선부를 설치한다.
외사정을 파견하여 지방관을 감찰하는 역할을 맡게 한다.
*신문왕(A.D 681 ~ A.D 692)
해중릉인 대왕암(문무왕릉)과 감은사를 짓고 만파식적(피리)를 들고 다녔는데, 만파식적을 불면 대왕암에서 해룡이 나타나 감은사를 거쳐 경주로 들어와 왕을 수호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으며, 이는 왕권이 전제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김흠돌 모역사건이 일어나(A.D 681) 가담한 귀족세력을 숙청하는데, 신문왕은 이에 대한 원인을 관리에게 지급하던 토지인 녹읍에 있음을 알고
녹읍을 폐지하고 대신 관료전을 지급(A.D 687)한다. 녹읍을 받게 되면 마을에서 발생하는 곡식뿐만 아니라 특산물과 군역/부역에 대한 권리를 가질 수 있는데
관료전은 곡식만 받을 수 있게 되어 관료들이 사병을 소유하는 것을 제한한 것이다. 왕족이나 공신에게 주는 식읍도 제한한다.
왕의 호위무사인 시위부를 확대, 강화하고 군사조직인 9서당(중앙) 10정(지방)을 편성한다.
국학을 설치(A.D 682) 하고 왕실의 정통성을 강화하고자 5묘제를 확립한다.
달구벌(대구)로 천도를 시도한다.

2017년 5월 1일 (월) 13:29 판

틀:제1천년기 세기 구분

이때 인류는 대자연 어머님의 보살핌 아래에 문명을 가꾸던 시기였지만

많은 문명들이 대격변을 겪던 시기였다...

동양에선 후한과 수나라가 멸망해서 많은 난세 끝에 당나라 군대신라를 도와 고구려백제를 멸망시키고

신라는 당나라를 몰아 삼국을 통일했다.

서양에선 비잔티움 제국의 몰락이 두드러지고 이슬람세력이 승승장구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