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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백}} | | {{혐오|간도가 우리땅이라고 자꾸 징징대는 국뽕새끼}} |
| {{내용추가}} | | {{국뽕}} |
| {{진지}} | | {{사회주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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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간도'''(間島, {{zh-stp|s=间岛|p=Jiāndǎo|h=젠다오}})는 [[압록강]] 상류와 [[두만강]] 북쪽의 조선인 거주 지역을 일컫는 말로, 간도의 범위에 관하여는 여러 이견이 있다. 일반적으로 간도라 하면 현재의 [[연변 조선족 자치주]] 지역을 가리키며, [[두만강]] 북쪽인 [[연변]] 지역을 '북간도'(또는 '동간도'), 그 서쪽인 [[압록강]] 북쪽 지역을 '서간도'라 부르기도 한다.
| | 남만주 지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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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발해 멸망 후 한민족이 이주한 적은 있어도 실질적 지배를 한 적은 없으나, [[19세기]] 말, [[조선]]과 [[청나라]]가 [[백두산정계비]]에 쓰여진 "토문(土門)"을 서로 달리 해석하면서 이 지역(북간도)에 대한 귀속 문제가 불거졌다. 당시 [[조선]]은 [[정계비]]의 위치상 '토문은 [[두만강]]과 별개의 강이다'고 주장하였고, [[1903년]]에는 [[이범윤]]을 간도관리사로 파견하여 간도에 대한 실효적 지배를 시도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는 [[일본 제국]]으로 인해 흐지부지 되었고, 간도에 대한 영토 문제는 지금까지도 불거지고 있다.
| | 고구려때 우리나라가 한번 먹었고 발해때 한번 더 먹었지만 신라한테 통수 쳐맞고 거란한테 죽창 맞은 뒤로 중국으로 소유권이 넘어간곳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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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구 ==
| | 여기서 사는놈들이 만주족. |
| 1909년 간도지방 주민조사로 나타난 한국인은 약 8만 2900명이고, 청나라인은 약 2만 7300명이다. 청나라 사람과 한국인의 믹스로 인해서 [[조선족]]이 탄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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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간도 협약 == | | == 역사 == |
| [[을사늑약]]으로 대한 제국 외교권을 빼앗은 [[일본 제국]]이 만주 철도부설권을 먹는 대신에 [[간도]] 문제를 양보하겠다고 한 협약이다. 이거 무효니까 간도 우리 땅이라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게 무효화되도 그 이전 상태로 돌아갈 뿐이다.
| | ===일제 강점기 이전=== |
| ===자세한 내용=== | | 고구려와 발해때 우리땅이었다. 근데 두나라 다 망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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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일본국 정부(大日本國政府) 급(及) 대청국 정부(大淸國政府)는 선린(善隣)의 호의(好誼)에 비추어 토문강(圖們江)이 청(淸)·한(韓) 양국(兩國)의 국경(國境)임을 서로 확인(確認)함과 아울러 타협(妥協)의 정신(精神)으로써 일체(一切)의 변법(辨法)을 상정(商定)함으로써 청(淸)·한(韓) 양국(兩國)의 변민(邊民)으로 하여금 영원히 치안의 경복(慶福)을 향수(享受)하게 함을 욕망(慾望)하고 이에 좌(左)의 조관(條款)을 정립(訂立)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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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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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일 양국 정부는 토문강을 청·일 양국의 국경으로 하고 강원 지방에 있어서는 정계비(定界碑)를 기점(起點)으로 하여 석을수(石乙水)로써 양국의 경계로 할 것을 성명(聲明)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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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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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국 정부는 본협약 조인 후 가능한 한 속히 좌기(左記)의 각지(各地)를 외국인의 거주(居住) 급(及) 무역을 위하여 개방하도록 하고 일본 정부는 차등(此等)의 지(地)에 영사관 또는 영사관 분관(分官)을 배설(配設)할 것이다. 개방의 기일(期日)은 따로 이를 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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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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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국 정부는 종래와 같이 토문강 이후의 간지(墾地)에 있어서 한국민 주거를 승인한다. 그 지역의 경계는 별도로써 이를 표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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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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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토문강 이북 지방의 잡거지구역내(雜居地區域內) 간지(墾地) 거주의 한국민은 법권(法權)에 복종하며 청국 지방관의 관할재판에 귀부(歸附)한다. 청국 관할은 우(右) 한국민을 청국민과 동양(同樣)하게 대우하여야 하며 납세 기타 일체 행정상의 처분도 청국민과 동일하여야 한다. 우(右) 한국민에 관계되는 민사(民事) 형사(刑事) 일체의 소송(訴訟) 사건은 청국관할에서 청국의 법률을 안조(按照)하여 공평히 재판하여야 하며 일본국 영사관 또는 그의 위임을 받은 관리는 자유로히 법정에 입회할 수 있다. 단 인명에 관한 중안(重案)에 대하여서는 모름지기 먼저 일본국 영사관에 지조(知照)하여야 한다. 일본국 영사관에서 만약 법률을 고안(考案)하지 않고 판단한 조건(條件)이 있음을 인정하였을 때는 공정히 재판을 기하기 위하여 따로 관리를 파견하여 복심(覆審)할 것을 청국에 요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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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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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토문강 이북 잡거구역내(雜居地區域內)에 있어서의 한국민 소유의 상지(上地) 가옥은 청국 정부가 청국 인민의 재산과 같이 보호하여야 한다. 또 해강(該江)의 연안에는 장소를 선택하여 도선(渡船)을 설치하고 쌍방 인민의 왕래를 자유롭게 한다. 단 병기(兵器)를 휴대한 자는 문건 또는 호조(護照)없이 월경(越境)할 수 없다. 잡거구역내(雜居地區域內) 산출의 미곡(米穀)은 한국민의 판운(販運)을 허가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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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6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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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국 정부는 장래 길장철도(吉長鐵道)를 연길남경(延吉南境)에 연장하여 한국 회령(會寧)에서 한국 철도와 연결하도록 하며 그의 일체 변법(辨法)은 길장철도(吉長鐵道)와 일률로 하여야 한다. 개변(開辨)의 시기는 청국 정부에서 정형(情形)을 작량(酌量)하여 일본국 정부와 상의한 뒤에 이를 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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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7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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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조약은 조인 후 직시(直時) 효력을 발생하며 통감부파출소 및 문무(文武)의 각원(各員)은 가능한 한 속히 철퇴(撤退)를 개시하며 2개월 이내에 완료한다. 일본국 정부는 2개월 이내에 제2조 신약(新約)의 통상지(通商地)에 영사관을 개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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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증거(右證據)로써 하명(下命)은 각기(各其)의 본국 정부로부터 상당한 위임을 받고 일본문(日本文) 급(及) 한문(漢文)으로써 작성한 각 2통의 본협약에 기명조인(記名調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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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역사 ==
| | 이후 고려와 조선 시절 중국으로 넘어갔으나 크게 중요한 땅은 아니라서 한족은 거의 안가고 만주족만 남아서 먹고 살았다. |
| === 18세기까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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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간도'''(間島)는 [[고대]]에는 [[부여]]와 [[북옥저]], [[고구려]], [[발해]]의 영역이었다가 [[고려]]시대부터 [[조선]] 중기까지는 [[여진족]]이 흩어져 살았다. [[조선]]은 건국 초 [[세종대왕]] 집권기에 [[압록강]]과 [[두만강]] 남쪽의 여진족을 쫓아내거나 귀화시켜 [[4군]]과 [[6진]]을 설치했으나, 두 강의 북쪽으로 영토를 밀어올리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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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16년]]에 [[누르하치]]가 [[후금]]을 세운 후 [[1644년]]에 [[청나라]]가 [[명나라]]를 멸망시키면서, [[만주족]](여진족의 후신)의 상당수가 군사들을 따라 이 지역에서 중국 본토로 옮겨갔다. 이 과정에서 본래 만주족들이 살던 지역이 공동화(空洞化)되자, [[청나라|청]](淸)은 [[강희제]] 집권기인 [[1677년]]에 '[[흥경]] 이동, [[이통주]] 이남, [[백두산]]·[[압록강]]·[[두만강]] 이북 지역'을 [[청조]]의 발상지라 하여 '''봉금지'''(封禁地)로 정하고 [[만주족]]이 아닌 타민족의 거주와 개간, 삼림 벌채, 인삼 채취 등을 엄금하였다.<ref>[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544733&cid=1587&categoryId=1587 두만강(豆滿江)] 한국민족문화대백과(한국학중앙연구원)</ref> [[1636년]]에 [[병자호란]]을 겪으며 청의 위세를 실감한 [[조선]] 역시 [[압록강]]과 [[두만강]]의 북쪽 연안에 대한 도강을 엄금하고 '월강죄'로 다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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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간도는 두만강과 그 지류인 해란강(海蘭江), 가야하(嘎呀河, 알아하), 훈춘하(琿春河, 혼춘하) 등 여러 물길의 연안을 중심으로 한 분지와 구릉으로서 땅이 기름지고 산림이 무성한 땅이었으나, 만주족은 농경보다 유목·수렵에 종사하였기 때문에 이 지역은 오랫동안 개간되지 못했다. 게다가 청나라의 봉금정책으로 인해 150년 가까이 이 땅은 청조 통치자들을 위한 수렵지이자 삼(蔘) 등 약재의 채집지로 독점적으로 이용되는 상황이었다.
| | 그러던 중 조선에서 탐관오리한테 쳐맞던 흙수저들이 많이 넘어가면서 영토분쟁 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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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세기 이후 ===
| | 영토분쟁인데 처리를 대충하는 바람에 이후 수백년동안 국뽕들이 간도를 우리땅이라고 징징거리는 원인이 된다. |
| [[19세기]]에 들어서 서슬퍼런 봉금령도 부패와 혼란으로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1800년]] [[조선]]은 왕권 강화를 위한 개혁정책을 추진하던 [[정조]]가 사망하면서 [[세도정치]]의 전횡과 부패로 민생이 도탄에 빠지고, [[청나라]] 역시 [[건륭제]] 말년에 [[화신 (청나라)|화신]]의 전횡과 부패로 국정이 문란해지면서 [[백련교도의 난]]([[1796년]] - [[1804년]]) 등 거듭되는 반란이 일어나 국운이 기울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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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세기]] 초부터 [[세도정치]]의 학정(虐政)과 지방 수령의 수탈을 견디다 못한 조선의 농민들이 봉금령에도 불구하고 조선의 관권(官權)이 미치지 않는 [[두만강]] 이북으로 건너가 이주하기 시작했다. 게다가 [[청나라]]가 [[아편전쟁]]([[1839년]] - [[1842년]] / [[1856년]] - [[1860년]])과 [[태평천국의 난]]([[1851년]] - [[1864년]])으로 혼란에 빠져 월강에 대한 단속이 느슨해지고 [[조선]]의 [[함경도]] 지방에서 [[1869년]](기사대흉년), [[1870년]](경오대흉년) 대흉년이 들자 수많은 조선사람들이 [[압록강]] 상류와 [[두만강]]을 건너 단속 자체가 어려운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청나라|청]]의 봉금령은 계속되었기 때문에 그 단속을 피해 간도에서 [[연해주]]로 다시 이주하는 주민들도 있었지만 이주민은 줄어들기는커녕 갈수록 늘어났다.
| | 조선은 간도가 우리땅이 아니라는걸 인식했지만, 이후 군밤이 간도에 욕심이 생겨서 어거지로 깃발을 꼽자 2차적으로 영토분쟁 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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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81년]]에는 청나라가 '봉금령'을 폐지하였고, [[1883년]]에 조선이 '월강금지령'을 폐지한 데 이어 [[1885년]]에 청나라가 조선인에 대한 만주 이주 금지령을 철폐하면서 조선인의 간도 유입 현상은 더욱 증가하였다.
| | 조선이야 다 좆망해하는 쓰레기였으니까 조선만 주장한다면 그냥 밟아버렸으면 되지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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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세기]] 초에도 [[일본 제국]]의 침략과 수탈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또는 항일 운동을 위해서 많은 조선인들이 이 곳으로 계속 이주했다. [[1932년]]에 일본 제국은 만주에 괴뢰 국가인 [[만주국]]을 세우고 간도를 관할하는 [[젠다오 성]](間島省, 간도성)을 설치했다. 간도는 [[1949년]]에 [[중화인민공화국]]의 통치 하에 들어갔고, 현재는 [[연변 조선족 자치주]]와 [[장백 조선족 자치현]] 등이 중국 행정구역으로 편제되어 있다.
| | 조선 뒤에 일본이 있었기 때문에 쓸데없이 일 길어질걸 염려한 청나라가 안 생까고 일본이랑 간도협약 맺었다. |
| | ===일제 강점기=== |
| | 조선이 좆망하기 전부터 슬슬 조선인이 넘어가다가 조선이 아예 먹힌 뒤로 조선인들이 엄청 넘어가서 조선인들이 드글드글한 땅이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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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백두산 정계비 ==
| | 독립군이랑 일본이 술래잡기하면서 로맨스 찍던곳. |
| {{본문|백두산정계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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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12년]]([[조선 숙종|숙종]] 38년), [[백두산]] [[천지]](天池)의 남동쪽 4 km 지점에 [[조선]]과 [[청나라]]의 [[국경]]을 확인하는 [[백두산정계비]]가 세워졌다. [[정계비]]에는 [[조선|조]]·[[청나라|청]] 양국의 경계를 '서위압록 동위토문(西爲鴨綠 東爲土門)'이라 하고, 정계비는 그 분수령에 세워졌음을 명기하였다.<ref>숙종실록, 숙종 38년(1712 임진) 5월 23일 1번째기사 "토문강(土門江)의 근원은 백두산 동변(東邊)의 가장 낮은 곳에 한 갈래 물줄기가 동쪽으로 흘렀습니다. 총관 목극등이 이를 가리켜 두만강(豆滿江)의 근원이라 하고 말하기를, '이 물이 하나는 동쪽으로 하나는 서쪽으로 흘러서 나뉘어 두 강(江)이 되었으니 분수령(分水嶺)으로 일컫는 것이 좋겠다.'하고, 고개 위에 비(碑)를 세우고자 하였습니다."</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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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ef>정계(定界)에 참여했던 사람들의 기록 : 김지남(백두산 정계시 역관), 《북정록》. 박권(백두산정계시 조선측 대표, 접반사), 《북정일기》. [[홍세태]], 《백두산기》 김지남의 아들인 역관 김경문의 이야기를 듣고 글로 옮김.</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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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청(淸)의 목극등(穆克登)이 사계(査界)를 한 이후에 조선 측은 '정계비로부터 동쪽 수계(水界)까지' 설책(設柵)을 하는 과정에서 목극등이 정한 수계가 [[두만강]]이 아닌 [[송화강]]으로 흘러들어가는 문제를 발견하였다. 이에 조정에서 파견한 북평사는 설책 공사를 중지하라고 하였지만, 정계(定界)에 참여한 이들이 정계를 잘못한 책임을 지는 것이 두려워 목극등이 정한 수원(水源)에서 남쪽으로 20리 떨어진 곳에 새롭게 설책하였다.<ref>숙종실록, 숙종 38년(1712 임진) 12월 7일 3번째기사.</ref> [[조선]] 조정은 이후에 이 사실을 알게 되었지만, 이를 청나라가 알게 되면 목극등이 견책 받고 다른 청나라 사신이 와서 영토가 축소될 수도 있다는 우려 때문에 이런 상황을 그대로 두었다.<ref>[[이익 (학자)|이익]], 《[[성호사설]]》 제2권 천지문편 "토문은 두만강이고, 음이 비슷해 잘못되었다."</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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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ef>[[한치윤]], 《[[해동역사]]》 속집 제12권 조선편 "[[혼춘]](渾春)은 그 서쪽의 토문강까지가 20리이며, 조선과 경계이다."</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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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ef>[[정약용]], 《다산시문집》 15권 강계고 서편 "[[세종]] 때에는 두만강 남쪽을 모두 개척하여 육진을 설치하였으며, [[선조]] 때에는 다시 삼봉평(三蓬坪)에 무산부(茂山府)를 설치하여 두만강을 경계로 천참의 국경으로 삼았다. 두만강 북쪽은 곧 옛 [[숙신]](肅愼)의 땅으로서, 삼한(三韓, [[삼국시대]]) 뒤에는 우리의 소유가 아니었다. [[두만강]]과 [[압록강]]이 모두 [[장백산]](長白山)에서 발원(發源)하고, 장백산의 남맥(南脈)이 뻗쳐 우리나라가 되었는데, 봉우리가 연하고 산마루가 겹겹이 솟아 경계가 분명치 않으므로 [[강희 (연호)|강희]](康熙) 만년에 오라총관(烏喇總管) 목극등(穆克登)이 황명을 받들어 [[정계비]](定界碑)를 세우니, 드디어 양하(兩河)의 경계가 분명해졌다."</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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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ef>[[이긍익]], 《[[연려실기술]]》 별집 제16권 지리전고 "두만이 곧 토문이다."</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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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유권 분쟁 ==
| | 독립군 세력은 먼지만도 못했지만 생각의 차이가 뭐라고 먼지들이 서로 엄청 분열했다. |
| === 19세기 말의 상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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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00년대]] 초부터 [[조선]]의 [[함경도]] 사람들이 [[두만강]]을 건너 '''간도'''(間島)로 이주하기 시작하여 [[1881년]]에는 [[연변]] 지역의 조선인이 1만명에 이르렀다. [[1860년]] [[베이징 조약]]으로 러시아에 연해주를 빼앗긴 [[청나라]]는 만주 개발을 위해 [[1881년]] '봉금령'을 폐지하고 본토 주민들이 이 지역으로 이주하도록 하였다. 이 과정에서 간도에 있던 조선인과 청인 사이에 마찰이 생기면서 조선과 청나라 사이에 간도에 대한 영유권 문제가 본격적으로 대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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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에 조선은 [[1883년]]에 '월강금지령'을 폐지하고 [[어윤중]]·[[김우식]]에게 정계비와 그 주변 지형을 조사하게 하여 [[송화강]]의 한 지류로 토문강이 있음을 확인한 뒤, 간도가 조선의 영토임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청나라]]는 양국의 기본적인 [[국경선]]이 [[두만강]]이라는 전제하에 도문강([[두만강]])의 도문(圖們)과 토문(土門)은 모두 [[만주어]]에서 그 음이 비슷하기 때문에 취한 것(借字, 차자)이므로 '토문은 곧 두만강을 지칭한다'고 주장하였다.
| | 합치자 합치자 말했지만 결국 독립운동 하던놈들이 단일단체로 제대로 구성한적은 한번도 없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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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과 [[청나라]]는 을유년(1885년)과 정해년(1887년)에 [[백두산]]과 그 동쪽의 국경을 명확히 획정하기 위한 감계(勘界) 회담을 가졌으나, 서로의 주장이 엇갈려 모두 결렬되었다.<ref>이중하(을유·정해감계에 참여), 《백두산일기》.</ref>
| | 만주사변 터지고 간도를 일본이 먹자 독립운동 하던놈들은 대부분 쫓겨났고, 일본 피해서 간도로 도망쳤던 조선인들은 일본한테 존나 쳐맞으면서 착취당하게 된다. |
| | ===2차대전 종료 이후== |
| | 불곰이 일본을 쫓아내고 중국이 다시 먹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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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세기 이후 ===
| | 불곰은 중국 견제하려고 북한한테 간도를 넘겨주려고 했지만 일성이가 남한이랑 불장난 하는바람에 실패. |
| [[1903년]]([[광무 (연호)|광무]] 7년) [[대한제국]]은 간도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는 동시에 간도관리사 [[이범윤]]을 간도에 파견(1903년 10월 - 1905년 5월)하기도 했다. 당시 청나라는 [[의화단 사건]]의 여파로 만주 일대를 [[러시아 제국]]에 점령당하다시피 한 상태였다. 이러한 러시아 제국의 남진은 [[1904년]]에 발발한 [[러일 전쟁]]의 불씨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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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 제국은 [[1907년]] [[8월 23일]], 간도에 헌병과 경찰을 들여보내 [[용정]](龍井)에 [[통감부]] 간도파출소를 설치하였으나, [[1909년]] [[9월 4일]] 청나라와 [[간도 협약]]을 체결하여 이 지역에 대한 청나라의 법적 권한을 인정하고 파출소를 철수하였다.([[간도 협약]]이 체결된 당일, 청나라와 일본 제국은 [[만주 5안건 협약]]을 체결하였다.)
| | 이후 쭉 중국이 먹으면서 중국땅으로 자리잡았다. |
| | == 영토분쟁 == |
| | ===백두산정계비=== |
| | 조선인들이 자꾸 넘어오자 청과 조선 사이의 영토를 확실하게 설정하기 위해서 세웠던 비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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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2년]] [[10월 12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중화인민공화국]]은 [[조중 변계 조약]]을 체결하여 [[백두산]]과 [[두만강]] 상류의 국경선을 명확히 획정하고, [[두만강]] 이북 지역에 대한 영토권이 중화인민공화국에 있음을 확인하였다.
| | 하지만 일처리 대충해서 좆망함. 다만 청나라나 조선이 이후 별말 안했던걸 보면 귀찮아서 대충 넘어간듯. |
| | ===간도협약=== |
| | 군밤이 지 본진 털리는데 좆도 모르고 간도에 깃발을 꼽으면서 시작된 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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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0년대에는 [[한국]] 사회에서 [[간도 협약]]에 대한 이의를 제기할 수 있는 시한이 100년이기 때문에 2009년 9월에 그 시효가 완성된다는 일방적 주장이 신뢰할 만한 근거 제시 없이 사실인냥 유포되는 소동이 있기도 했다
| | 군밤이야 뭘하든 일본은 상관 없었지만, 간도가 조선의 영토로 편입될 경우 일본이 간도를 먹는거라서 일본이 은근히 밀어줬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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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본이 자꾸 지랄하면 귀찮아질걸 염려한 청나라가 철도부설권 넘겨주고 대신 간도 영토를 청나라 것으로 확정 받는걸로 상황 정리. |
| ==결론== | | ==결론== |
| {{진실}} | | {{진실}} |
| 단 한번도 니네 땅인적 없다. 황무지에 농사짓고 사람 살면 그게 너네땅이냐?ㅉㅉ 진짜 어떻게 간도가 한국령임 주장하는 내용들이 일본이 독도 자기꺼라 주장하는 내용이랑 레파토리가 똑같냐. 짱깨가 알아서 잘 관리하게 놔두자.
| | 중국땅 맞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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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윗놈은 역사를 그냥 글로만 읽는 병신이니까 무시하자. 간도에서 영토 분쟁이 생긴 가장 큰 이유는 백두산 정계비에 토문강 때문이다. 근데 이 토문강은 청나라에도 조선에도 기록되지 않은 강이다. 이게 무슨 뜻이냐면 사신들끼리 서로 짜고 토문강이라고 적어놓은 다음 청나라 사신은 두만강이라고 보고하고 조선 사신은 쑹화강이라고 보고한거다. 어떤 ㅂㅅ같은 나라가 땅을 공짜로 주겠냐? 그러니까 분쟁지역이 맞다. 근데 이런 영토 분쟁 판례중에 100년 이상 식민지 시절조약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으면 현행유지니까. 소송해도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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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간도는 만주지방이고 만주는 만주족이 살던곳인데 만주족이 청나라를 세우고 청나라가 중국이 되었으니 결국 간도는 중국땅 맞지 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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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토분쟁으로 사기쳐서 낼름 챙겨먹을 수는 있겠지만 딱히 우리땅이라 할만한 뭐가 없다. 여진족을 짱개들이 가져가지 않고 우리가 전부 받았다면 모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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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깥 고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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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00512 〈간도〉],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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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http://www.cybernk.net 국가지식포털 북한지역정보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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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910051742585&code=210000 경향신문 63 창간특집-못박힌 철조망 앞에서 간도·녹둔도를 기억하다 이이화 역사학자 2009-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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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http://www.nkland.org/ 조병현의 북한토지 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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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http://www.wallsan.co.kr/home/main.php?link=boardsdview&boid=30194018&vmod=GNR&pageno=1&list_no=6&vid=20060119164605&tg=&key=&opp=&csno= 백두산 지도 (분할 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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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문서는 사회주의에 대해 다루고 있습니다! 여러분. '님' 이 무엇입니까? 언제나 그리운 이름입니다! 우리들의 가슴, 우리가 사모하고 눈물을 흘리며 오랜 세월을 목말라해 온 이름입니다. '님' 은 바로, 사회주의 낙원을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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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만주 지역.
고구려때 우리나라가 한번 먹었고 발해때 한번 더 먹었지만 신라한테 통수 쳐맞고 거란한테 죽창 맞은 뒤로 중국으로 소유권이 넘어간곳이다.
여기서 사는놈들이 만주족.
역사
일제 강점기 이전
고구려와 발해때 우리땅이었다. 근데 두나라 다 망함.
이후 고려와 조선 시절 중국으로 넘어갔으나 크게 중요한 땅은 아니라서 한족은 거의 안가고 만주족만 남아서 먹고 살았다.
그러던 중 조선에서 탐관오리한테 쳐맞던 흙수저들이 많이 넘어가면서 영토분쟁 발생.
영토분쟁인데 처리를 대충하는 바람에 이후 수백년동안 국뽕들이 간도를 우리땅이라고 징징거리는 원인이 된다.
조선은 간도가 우리땅이 아니라는걸 인식했지만, 이후 군밤이 간도에 욕심이 생겨서 어거지로 깃발을 꼽자 2차적으로 영토분쟁 발생.
조선이야 다 좆망해하는 쓰레기였으니까 조선만 주장한다면 그냥 밟아버렸으면 되지만
조선 뒤에 일본이 있었기 때문에 쓸데없이 일 길어질걸 염려한 청나라가 안 생까고 일본이랑 간도협약 맺었다.
일제 강점기
조선이 좆망하기 전부터 슬슬 조선인이 넘어가다가 조선이 아예 먹힌 뒤로 조선인들이 엄청 넘어가서 조선인들이 드글드글한 땅이 되었다.
독립군이랑 일본이 술래잡기하면서 로맨스 찍던곳.
독립군 세력은 먼지만도 못했지만 생각의 차이가 뭐라고 먼지들이 서로 엄청 분열했다.
합치자 합치자 말했지만 결국 독립운동 하던놈들이 단일단체로 제대로 구성한적은 한번도 없음.
만주사변 터지고 간도를 일본이 먹자 독립운동 하던놈들은 대부분 쫓겨났고, 일본 피해서 간도로 도망쳤던 조선인들은 일본한테 존나 쳐맞으면서 착취당하게 된다.
=2차대전 종료 이후
불곰이 일본을 쫓아내고 중국이 다시 먹었다.
불곰은 중국 견제하려고 북한한테 간도를 넘겨주려고 했지만 일성이가 남한이랑 불장난 하는바람에 실패.
이후 쭉 중국이 먹으면서 중국땅으로 자리잡았다.
영토분쟁
백두산정계비
조선인들이 자꾸 넘어오자 청과 조선 사이의 영토를 확실하게 설정하기 위해서 세웠던 비석.
하지만 일처리 대충해서 좆망함. 다만 청나라나 조선이 이후 별말 안했던걸 보면 귀찮아서 대충 넘어간듯.
간도협약
군밤이 지 본진 털리는데 좆도 모르고 간도에 깃발을 꼽으면서 시작된 일.
군밤이야 뭘하든 일본은 상관 없었지만, 간도가 조선의 영토로 편입될 경우 일본이 간도를 먹는거라서 일본이 은근히 밀어줬다.
일본이 자꾸 지랄하면 귀찮아질걸 염려한 청나라가 철도부설권 넘겨주고 대신 간도 영토를 청나라 것으로 확정 받는걸로 상황 정리.
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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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문서는 확고히 검증된 진실입니다. 이 문서는 거짓이 전혀 없는 완벽한 진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 문서를 읽을 때는 안심하셔도 되니 편안한 자세로 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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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땅 맞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