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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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112.165.75.210 (토론)님의 2015년 11월 6일 (금) 19:18 판

1919년 3월 1일 발생한 독립 운동. 닛폰새끼들 한테 성질낸 날이라고 할 수 있다 3.1운동 전까지만 하더라도 일본은 민족억압정책을 내세웠지만 우리나라 인구 10분의 1이 이 운동에 참여하자 밟기만 하면 안된다 라는 생각으로 1920년 문화통치를 선포하여 조선총독에 무관이 아닌 문관이 임명될거라 말했지만, 1945년 일본 패망 때까지 실제 문관 총독이 부임한 적은 없다. 급식충들이 삼점일운동이라고 읽어서 혈압을 올려줄 때도 있다.

“3.1 운동은 어 그거는 태극기를 들고 일어난 하나의 그 폭동이야. 어 그러니까 일본군이기 때문에 일본군이 진압하지 않을 수 없잖아요.”

-조선 총독 하세가와 요시미치-

대한민국 제헌헌법 전문에는 3.1운동을 계기로 나라를 세웠다고 나온다.

배경

헌병통치체제의 부식

어제까지만 해도 11시 외국이었던 조선을 장악한 일본 제국이었지만 행정 전통과 문화 전통의 이질성이 통치의 장애물로 기능하고 있었고, 이러한 장애물에서 비롯되는 패널티를 보완하기 위해 헌병제도라는 무력통치적인 요소를 도입하였다. 이 요소를 조선에 도입하고 구축해놓은 자는 조선의 초대 총독인 데라우치 마사타케로, 그는 일본 육군원수 출신으로 쵸슈 번벌이었다. 조선 통치를 효과적으로 해낸 마사타케였지만, 1916년에 물러나면서 정치질을 하게 되면서 문제의 원인을 제공하게 된다.

당시 조선은 일본육군의 거의 유일한 전리품이나 다름없었는데 실제로 일본제국이 조선병합이라는 결정을 내린건 육군을 축으로 하는 쵸슈번벌들의 입김이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쵸슈 번벌의 육군출신인사가 아닌 다른 인물에게 육군의 전리품 조선을 넘겨주기 싫었고 그래서 퇴임당시 하세가와 요시미치를 제2대 조선총독으로 추천하게 된다. 하세가와 요시미치는 러일전쟁 당시 수려한 통솔력으로 조선반도를 제압한 전력이 있는 장군이었다. 당시 하세가와는 정치적인 측면에서는 평가가 그닥 좋은 인사가 아니었지만, 이러한 육군에서의 화려한 전적을 놓고볼때 평타 정도는 쳐줄거라고 데라우치가 기대한 듯 하다.

하지만 총독으로 앉혀놓고보니 왠걸? 좆병신이었다. 일단 하세가와라는 인물 자체가 육군 이외의 기관에서는 지지기반이 없는 정치인이었는데다가, 뇌물수수를 좋아했기 때문에 평판이 좋지 않았고, 따라서 조선총독부의 고위 공무원들이 새로운 총독을 잘 따르지 않게 되었다. 그러다보니 일본 제국의 조선 통치근간이라고 할수있는 경찰력이 약화되기 시작하였고 따라서 통제가 느슨해져 죽창맨들이 일어설 환경이 마련되었다.

쌀 폭동

유럽 대륙의 인민들이 제1차 세계대전으로 곶통받는 와중에 일본은 유럽의 전쟁특수경기로 인하여 경제가 날아오르게 된다. 이로 인해 일본에서 광범위한 산업화가 진척되면서 대규모의 이농현상이 일어나게 된다. 이로 인해 쌀 공급량이 감소되어 쌀값이 폭등해버린다. 이 쌀값 폭등에 확 돌아버린 일본의 흙수저와 똥수저가 죽창을 들고 1918년에 쌀 폭동을 일으키기도 하였는데, 이 폭동이 어마무시한 수준이라 당시 일본의 내각이 이 폭동의 책임을 지고 총사퇴할 정도였다.[1] 일본은 이를 메꾸기 위하여 대만과 조선에서 농산물을 퍼가기 시작했는데, 당시 소작, 토지관련 등 농업구조 자체에 내재된 문제는 여전하고, 오히려 일제가 8년간 시행한 토지조사사업으로 악화되어 있었기에 농민, 상인, 노동자등 시민층에 불만이 쑥쑥 커졌다.


죽창 준비

그러던 중...미국 대통령 윌슨이 파리 강화 회의에서 민족자결주의를 제창하게 되었는데(여기에 소비에트 CO-mi master 레닌도 동의했다. 1919년 당시에 공산주의가 조선에 갓 뿌리를 내리려고 하던 차라 독립을 주장하던 지식인들은 귀가 2배로 쫑긋해졌다. 사실 20년대초쯤 당시 전세계의 분위기가 민족주의를 긍정하는 여론이 불고있었던 게 맞다. 거기에 윌슨도 레닌도 힘을 실었던 것.) 해외의 독립운동가들이 고무되어서 움직이는 한편, 국내에서는


고종이 죽었다.


일본 입장에서는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민중은 좆나게 빨리 고무되어갔다. 이 과정에서 2.8 도쿄 ymca 독립선언, 만주 독립선언 등의 사건이 뒤따르게 되면서 사태는 이미 총독이 손쓰기에는 멀리멀리... 한 구석에서 먼저 움직이기 시작한 사람들은 종교계 인사들로, 기독교, 불교, 대종교, 천도교 등의 종교계 지도자 및 지식인들이 손을 잡고 만세운동을 결의하게 된다. 특-히 기독교, 천도교는 일제하면 이가 갈릴대로 갈리는 판이였고 대종교는 이미 대놓고 만주 및 한반도 북부 지역에서 일본에 반항하고 있었음. 거기에 불교와도 연결되면서(유교층은 한용운이 접촉을 했으나 몇몇 빼면 연대에 참여하지 않았다. 사스가 탈레반...)(사실 이후에 유림이 참여하긴 한다)민족대표 33인이 결성. 대종교는 당연한 소리지만 이미 한차례 한판한데다 접촉 자체가 힘들어 참여하지 않았다.

주요인사 천도교 손병희, 기독교 이승훈, 불교 한용운. 급식충들은 외워라

이 중에 운동 당시 모인 것은 29명, 고문으로 순국 1명, 대부분 석방 뒤 망명하고 일부는 독립운동을 계속했다. 이 중에 국회의원도 났다.(안 모인 4명 도망친 거 아니다...제발 풀발기해서 뭣도 모르고 욕하지 말자. 다른 지역에서 시위를 지도하고 있었을 뿐이다.) 세네명은 변절...최린 이 새끼는 교과서에도 나온다. 아이러니한 건 운동계획이 들킬 뻔한 위기를 넘긴 것이 최린이라고 카더라? 대한제국 대신니뮤들에게도 궐기를 주창해달라고 접촉해봤으나 당-연히 응답은 없었다

죽창 발사

민족대표 33인은 갑작스럽게 시위 장소를 바꿔서 태화관에서 낭독. 그러자 어랍쇼 씨발? 당황한 학생들이 찾아가서 따진뒤 독립선언문을 받아와서 탑골공원에서 읽었다. 이후 그 33인은 체포. 그게 바로 기미독립선언서. 씨발...오등은 자에 아 조선....참고로 이거 옛날에는 존나 외우라고 시켰다 이후 만세시위를 벌이자 민중이 가세하여 삽시간에 수십만이 참여했다. 동시에 평안도에서 시위가 일어났고 4월까지 전국적으로 시위가 산발하면서 순식간에 대규모 시위가 되었다 물론 과잉진압이나 고문, 보복이 뒤를 이었고(제암리 사건 등) 일본 육군까지 파견되면서 3월에서 4월까지는 그야말로 전국에서 총 국민의 1할이 참여, 경찰로는 모자라서 일본군 4천명까지 투입되는 장관을 연출한다.

참여자 200만여명에 4만여명이 체포당함. 사망은 7천여명. 이후로도 보복이 뒤를 이었고 외신들도 보도하면서 지구의 1910년대를 화려하게 마무리하는 큰 사건이 되었다

사실 비폭력시위랑은 거리가 멀댜...물론 그리 과격한 폭력시위도 아니였지만은, 진압에 열이 뻗쳐 경찰을 때리는 경우도 꽤 있었다.

여담

이 일로 일제는 아 씨발 아무리 조센징들이라지만 밟기만하면 좆되는구나라고 큰 깨달음을 한 뒤 무단통치에서 문화통치로 전환했댜. 그래놓고 산미증식ㅆㅂㅋㅋㅋㅋ


독립운동가들도 우와 역시 민중봉기가 존나 무섭구나라고 깨닫고 독립운동은 무력투쟁 및 민중계몽으로 초점을 바꾸어 간다. 아 그리고 임시정부도 만들었음.

여하튼에 뭐 헌법에도 나와있고, 공휴일이고! 시험에도 자주 나오고, 일제시대의 한 분기이기도 하니 3.1운동이 현대사에서 가진 가치는 존나게 크다고 할수있다.

어차피 이렇게 적어봤자 급식충들한테는 공휴일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겠지만...

팩트 역갤의 입장

역갤에선 3.1 운동을

5.18 광주 운동과 광우병 폭동을 합친 꼴로 보고있다

실제로 역갤에서 물어보면 그렇게 답할 가능성이 높다 . 팩트는 개한테 줘버린지 오래인듯

  1. 조선에서 산미증식계획이 입안된 것도 이 폭동의 영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