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피두스

옛@역사곤충 (토론)님의 2021년 6월 9일 (수) 13:38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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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악! 내 눈! 으아아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아아ㅏㅏ아ㅏ아햏햏햏 아햏햏

풀네임은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

카이사르의 후계자였던 옥타비아누스, 역시 카이사르와 인척관계이고 카이사르의 부장 출신인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와 함께 제2차 삼두정치를 한 것으로 유명하다.

생애

젊은 시절에 관한 기록은 적으나, 조폐 관련 업무를 했던 것으로 추정한다.

아버지도 이름이 똑같은데, 집정관이었으나 술라 시절에 반란을 일으킨 에트루리아 인들을 진압하라는 명령에 반기를 들고 오히려 반란군에 합세한다. 하지만 반란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고 폼페이우스에게 진압되어 사르디니아 섬으로 망명을 가 거기서 사망했다. 형 파울루스와 함께 가산을 그대로 보유하면서 원로원에 남을 수 있기는 했지만 원로원 주요 파벌인 옵티마테스에 반기를 든 집안이라는 낙인이 찍혀 출세길이 막히게 된다.

이에 레피두스는 다른 명문가들이라면 생각지도 못할 행동을 하게 되는데, 마침 한창 기세가 오르고 있던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지지하게 된다. 아예 지지하는 정도를 넘어 카이사르와 클리엔테-파트로누스 관계를 맺어, 형 파울루스는 카이사르의 지원을 받아 집정관 자리에 당선되었고, 레피두스 본인은 카이사르의 최측근 중 한 명이 되었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 가문은 내노라하는 명문가문들 중 하나였고 이러한 가문의 지지는 큰 힘이 되기에 카이사르도 이 두 사람을 중용했던 것이다. 하지만 형 파울루스는 정치적 능력이 부족하여 집정관 자리에 있는 동안 로마 내전을 막고 카이사르가 두번째 집정관에 당선될 수 있게 하는 중요한 임무를 성공시키지 못했다.

카이사르 암살 당시에는 부독재관 자리에 있었는데, 암살 소식을 듣자 바로 군대를 이끌고 로마로 진입해 암살자들을 죽이려 했으나 안토니우스가 제동을 걸어 무위로 돌아간다. 대신 카이사르의 후임으로 종신 대신관 직위에 오르고, 히스파니아로 가서 폼페이우스 아들내미인 섹스투스와 협상해 내전의 격화를 저지했다. 이 때 생긴 섹스투스와 친분 때문에 훗날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가 걸고 넘어지는 약점이 되기도 했다.

기원전 43년, 레피두스의 주선 아래 옥타비아누스, 안토니우스까지 모였고 이들은 보노니아 협정을 맺는다. 여기서 '국가 재건을 위한 3인 위원회'가 출범하고 2차 삼두정치가 시작된다. 일단 이들은 군자금 마련을 위해 살생부를 작성하는 한편(살생부 작성 목적이 군자금 조달이었기 때문에 암살에 가담한 핵심인물이 아니라면, 몸값을 내고 사면을 받을 수 있었기에 원로원 의원 130명과 기사계급 2천여명의 추방으로 끝났다), 이 동맹이 소중하다는 증표로서 제일 가까운 이 한 명을 희생제물로 내놓기로 한다. 안토니우스는 무티나 전투에서 패배했을 때 자신을 국가의 적으로 지목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루키우스 카이사르를 지목했고 레피두스는 자신들을 적대하고 키케로를 지지했던 형 파울루스를 내놓았다. 옥타비아누스는 한때 아버지라고 부르며 따랐던(하지만 정치 만렙의 고단수였던 옥타비아누스에겐 연극이나 다를 게 없었다. 애당초 키케로와 옥타비아누스는 정치적 입장이 달라 오래갈 수 없는 오월동주였다) 키케로를 희생제물로 내놓았다. 이 중 키케로의 신랄한 인신공격에 시달렸던 안토니우스는 크게 분노했던 상태였고 꼭 죽여야 한다는 의견을 내고 이에 레피두스는 동의, 옥타비아누스는 이틀간 반대하다가 3일째 되는 날에 양보하여 키케로만 유일하게 죽는다. 나머지 두 사람은 탄원과 사면에 힘입어 적당히 추방되는 선에서 마무리되었다.

삼두정치를 주선했다는 점에서 알 수 있듯이 의외로 초반의 레피두스는 세력이 가장 강했다. 자신의 임지였던 갈리아와 히스파니아에 있는 현역병/퇴역병 군단이 7개나 되었기 때문. 반면 옥타비아누스는 겨우 4개 군단(사재를 털어모은 퇴역병 2개 군단에 돈으로 낚은 안토니우스계 2개 군단)이 전부였고 안토니우스는 친위군단마저 뺏길 뻔 했다 겨우 지켜낸 수준이었다. 삼두정치 결성 직후의 영역 배분에서도 갈리아와 히스파니아를 차지하여 옥타비아누스를 크게 앞섰고 안토니우스에게도 뒤지지 않았다.

하지만 필리피 전투를 기점으로 레피두스의 세력은 옥타비아누스에게 야금야금 먹히기 시작한다. 정치만렙의 고단수였던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는 막대한 보상금과 카이사르의 복수(당시 로마군은 거진 다 카이사르파였다)를 미끼로 레피두스의 군단을 차지했고 필리피 전투 당시 로마에 남아 본국 수비를 하고 있던 레피두스는 거하게 뒤통수를 얻어맞은 격이 되었다. 끈 떨어진 신세로 있던 레피두스에게 옥타비아누스는 자신에게 항복해 온 안토니우스계 6개 군단을 보내 이 둘의 연대를 막는 한편으로, 충성심을 담보할 수 없는 군단의 관리를 레피두스에게 떠맡기고 나중에 섹스투스가 장악하고 있던 시칠리아 공략에 그대로 이용한다는 꼼수를 부린다.

기원전 40년 브룬디시움 협정이 이루어져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가 상호우호를 재다짐할 때 겨우 북아프리카를 넘겨받는데 그쳤고(당시 북아프리카 지역은 포에니 전쟁 이후 복구하지 않았다가 카이사르 시절에 들어서야 겨우 복구를 시작했다) 37년 타렌툼 협정으로 '국가 재건을 위한 3인 위원회'의 지위는 5년 연장되었으나 레피두스는 여기에 끼지도 못했다.

그 다음해인 기원전 36년, 옥타비아누스가 안토니우스의 충고에도 불구하고 시칠리아 전쟁을 일으키자 이를 세력을 회복할 마지막 기회라고 여긴 레피두스는 2만명의 병력을 이끌고 의욕적으로 참전해 옥타비아누스가 고전하는 사이 섹스투스 최후의 거점이었던 메사나를 함락시키고 8개 군단을 접수하는 공을 세웠다. 이에 레피두스는 자신이 처음에 요구했던 시칠리와와 아프리카의 지배권을 내놓으라고 옥타비아누스와 대립했으나, 제대로 된 싸움 하나 없이 군대가 통째로 옥타비아누스에게 넘아가는 사태가 터져(이는 앞서 언급했듯이, 당시 로마군은 카이사르파가 대다수였다. 아무리 레피두스가 카이사르의 열렬한 지지자이자 측근이었다고 해도, 직접적인 후계자인 옥타비아누스나 카이사르 부장 출신인 안토니우스와 달리 군대를 자신의 편으로 만들만한 기회가 없었고, 그 문제가 터진 것이다) 종신 대신관을 뺀 모든 관직을 빼앗기고 은퇴를 선택하여, 기원전 13년(혹은 12년) 사망하면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된다.

평가

흔히 제2차 삼두정치의 들러리로 알려져 있고, 그만큼 대중매체에서의 평가도 병풍이나 무능력의 화신 정도로 묘사되는데 이건 불공평한 평가다. 레피두스가 그렇게 능력이 없는 인물이었다면 애당초 삼두의 일원으로 끼지도 못했을 것이다. 다른 명문귀족가문들이 다 쓸려나가는 와중에 카이사르를 선택해서 2인자 위치에 올라온 안목은 보통 사람이라고는 하기 어려운 능력이었다. 크라수스와 달리, 시칠리아 전투에서의 모습을 보면 장군으로서의 능력이 떨어지는 것도 아니었다.

다만 명문 귀족가문 출신이고 유력한 정치인이라는 점이 군대 내 카이사르 파의 지지를 얻는 데 장애물이 되었을 것이고, 카이사르 밑에서 직접 종군한 적이 없다보니 군단병들을 자신의 편으로 만들 기회도 없었다. 그러니 레피두스가 수동적이고 끌려다니는 모습을 보였던 건 능력 부족이나, 그가 비겁했다가 보다는 명분과 세력에서 밀렸기 때문이었다. 거기다가 상대가 정치라면 만렙을 찍은 옥타비아누스였으니 어쩔 수 없었다. 오히려 천수를 누렸고 아우구스투스 시절에는 후손이 황가의 일원이 되기도 했으니 비참한 결말을 맞은 안토니우스나 키케로 같은 다른 거물들에 비하면 더 낫다고도 할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