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토르 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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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Outis (토론)님의 2019년 1월 7일 (월) 22:53 판 (인물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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Цой жив!!!

구소련의 음악가이자 록밴드 키노의 보컬 겸 리더였다.

인물 개요

1962년 06월 21일 레닌그라드에서 태어났다. 종종 오해하는 부분인데, 그의 고향은 카자흐스탄의 크즐오르다가 아니다. 그 곳은 빅토르의 아버지 출생지다. 제발.

고려인 아버지와 러시아인 어머니 밑에서 태어났다. 다만 이걸 가지고 한국인 어쩌고 운운하면 곤란한 게, 빅토르 본인은 한국보다는 동양 전체에 더 관심을 가졌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의 후기 노래는 상당히 은유적이고 해석의 여지가 다분하지만 민족주의적 가사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다.

처음에는 예술학교에 입학했으나 학교에서 "사회주의 정신과는 맞지 않는 반체제 음악을 연주한 죄"로 퇴학당했다가 이후 기술학교에서 공부하게 되었다(실제로 그는 손재주에 능했으며, 나무로 조각상을 종종 깎았다고 한다). 이 당시 '제6병동'이라는 밴드를 결성했다.

졸업 후에는 본인이 학교 다닐 때부터 좋아했던 록을 작곡하기 시작했다.

이전 서술에서는 '개슬람' 운운하며 서방 음악인 록음악을 탄압했다고 기술했지만, 그당시 소련은 락을 그닥 좋게 보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탄압까지 한 건 아니었다. 예를 들어 소련 정부에서는 공식으로 '록 파노라마'라는 대회까지 공식적으로 개최했고, 81년에는 레닌그라드(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루빈슈타인 거리에 '레닌그라드 락 클럽'을 세워주기도 했다.

여담이지만 이 '락 클럽'이라는 게, 마치 극장과 같은 구조로 점잔빼고 앉아 정자세로 경청해야 했으며, '락 공연'하면 생각나는 팬들의 플래카드 응원조차 금지된 - 하여간 흠좀무한 곳이었다. 키릴 세레브렌니코프 감독의 '레토(2018)'에 잘 드러난다.

제6병동의 해산 이후 빅토르는 알렉세이 리빈 등과 함께 '가린과 쌍곡선' 밴드를 결성했다가, 이후 리빈, 올렉 발린스키와 밴드 '키노'를 결성한다. 이 '키노'라는 이름의 유래에 대해서는 의견이 여럿인데, 빅토르가 영화(키노가 러시아어로 영화를 의미)를 좋아해서 지었다는 설도 있고, 리빈 혹은 기타 멤버가 내놓았다는 설도 있다.

1982년 그는 첫 앨범 '45'를 녹음하는데, 이때 드러머였던 발린스키가 아프가니스탄으로 끌려가는 바람에 드럼 머신으로 녹음을 해야 했으며, 이때 '아크바리움'의 리더 보리스 그레벤시코프(이 사람도 러시아 락 분야에서는 상당히 유명하며, 빅토르 사후 우울증에 시달렸을 정도로 그와 친했다)가 도움을 상당히 많이 주었다. 머신을 쓴 것 때문인지, '45' 앨범의 드럼 반주는 타 앨범과 비교하면 상당히 독특하게 들린다. 이후 1983년 빅토르는 당시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의 징집 영장을 피해 정신병원에 입원한다. 당시 동양인스러운 얼굴이면 아프간으로 끌려가기 쉽다는 진위 불명의 루머에 의한 것으로, 이 때문에 빅토르는 다니던 직장에서 해고당하고 청소부 등 여러 직업을 전진하다 보일러공으로 정착한다.

왜 잘나가는 락스타가 보일러공으로 일했냐고? 당시 소련은 저작권 따위 줘 버린 곳이었으며, 락스타라 해도 그게 돈을 벌어다 주는 건 아니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1982년 마리안나라는 여자와 동거하기 시작했으니 돈이 더 필요했을 것이다 (참고로 다른 여자와 사귀면서 마리안나와는 1987년 결별하지만, 둘 사이에는 알렉산드르(샤사) 초이라는 아들이 있다. 빅토르는 아들을 끔찍히 아꼈다고 한다)

비록 '45'의 경우 그닥 인기있는 앨범은 아니었지만, 이후 '캄차카(캄차트카)의 지배인'(1984), '이건 사랑이 아냐'(1985), '밤'(1986) 등의 앨범을 거치며 서서히 인기를 쌓아가기 시작한다.

'밤' 앨범의 경우 1986년 덜 완성된 상태로 비공식판이 필름에 찍혀 돌았는데, 1988년 당시 소련의 유일한 국영 음반사였던 멜로디야에서 저작권료 한 푼 안 주고 무단으로 찍어 20만장 넘게 파는 흠좀무한 사건이 터지기도 했다.

참고로 '필름에 찍혀'라는 말은, 당시 국가에서 공식적으로 발행하지 않은 LP판들을 말하는데 보통 이런 사제 LP들은 다 쓴 X-레이 필름에 찍어 만들었기 때문이다. 사미즈다트라고도 말하는데, 이는 원래 타자기로 일일이 쳐서 돌았던 '반체제적' 금서들을 말한다. 쉽게 말해 (지금은 많이 사라졌지만) 한때 일일이 수작업으로 타이핑해 암암리에 돌았던 라이트노벨 텍본을 연상하면 된다.

그 후에 고르바초프가 소련의 왕이 된 후 자유화를 시켜줘서 갓토르 최는 전국에서 활동할 수 있게 됐다.

갓토르 최는 당시 아프가니스탄 전쟁으로 소련의 사회가 무너지고 가정이 무너지는 일이 속출하자

아프간 전쟁을 풍자한 노래 혈액형을 발표하여 전국구 스타가 됐다.

이때 갓토르의 인기는 상상을 초월했는데 모스크바 올림픽 경기장에서 콘서트를 할 당시

10만 관중이 몰려와 이 노래를 듣고 반정부폭동을 일으켜 경찰이 시위를 막으려고 눈물의 똥꼬쇼를 벌였다.

그 후엔 태양이라는 이름의 별이라는 앨범을 발매하여 갓토르 최의 인기가 빤짝이 아니라는 걸 증명했다.

이 때에는 인기가 정말 많아서 영화에 주연으로 나와서 흥행에도 성공했다.

그러나 한창일 때 교통사고로 28살의 나이에 요절하여 진짜 전설이 됐다.

80년대 소련 음악계를 휩쓸었으며 지금도 많은 러시아 락덕들은 갓토르 최 후빨에 여념이 없다.

러시아 아재 중 갓토르를 모르는 사람은 없다고 보면 된다.

음모론

정부 까다가 칼빵...은 아니고 사고를 위장한 살인을 당했다는 썰이 있다.

어떻게 된 거냐면 빅토르 최가 앨범 녹음을 한 뒤 차타고 집으로 가던 중 트럭과 추돌사고가 나서 죽었다.

이때 소련 정부는 갓토르가 바쁜 스케쥴을 수행하다보니 피곤해서 졸음운전을 하다 사고를 냈다고 발표했다.

그런데 목격자가 갓토르는 정상운전을 하고 있었는데 느닷없이 트럭이 차를 쳤다고 증언하는 일이 벌어졌다.

그래서 당시에 "갓토르 최의 진실을 밝혀야합니다! 조속한 진상규명! 부검촉구!"라면서 사람들이 들고 일어났으나

소련 정부는 이례적으로 윾가족 동의 없이 시신을 화장해버렸다.

그리고 미래의 소련인 현재 러시아도 국민들의 의견을 듣지 않고 최초로 140%의 득표율을 기록하는 전설을 보인다.

대표곡

발매년도랑 수록앨범은 알아서 찾아라

혈액형 (Группа крови)

밤 (Ночь)

캄차트카 (Камчатка)

태양이라는 이름의 별 (Звезда по имени солнце)

별들은 이곳에 남으리 (Звёзды останутся здесь)

악몽

나는 나의 집을 선언한다 (비핵화지대로) (Я объявляю свой дом безъядерной зоной)

담배 한갑 (Пачка сигарет)

외곽전철 (Электричка)

밤을 보았네 (Видели ночь)

질문 (Вопрос)

너와 나 (Нам с тобой)

마지막 영웅 (Последний герой)

변화를 원한다 (Хочу перемен)

전쟁 (Война)

뻐꾸기 (Кукушка)

여름이 끝난다 (Кончится Лето)

단어없는 노래 (Песня Без Сло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