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익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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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Tlarn (토론)님의 2019년 5월 16일 (목) 23:30 판

문서에 내용이 아무것도 없길래 새로씀. 간략하게 쓰려고 했고, 정확하지 않은 내용이 있을수 있고 사견도 좀 들어갔다. 한번 읽어보고, 정확하고 객관적인 정보를 더 알고싶으면 제대로된 사전이나 역사책을 보길 바람.




조선말에 태어난 선비다. 독립운동가로 분류되며 상당히 파란만장한 생애를 살았다.

7세경에 성리학의 기초를 배우고 14세 쯤에 대학자였던 이항로에게 가서 사사했다. 이때 배우는 능력이 꽤 특출나서 상당히 기대를 받았던듯 하다.

22-23세 정도에 과거에 급제했다. 처음에 과거시험을 치기로 한 이유는 봉급으로 부모를 봉양하기 위해서였다.

세월이 지난 후 대원군이 집권할때 실정을 비판하는 상소를 올렸다. 이 상소는 고종이 직접 정치를 하도록 자극하는 요소가 되었다. 최익현은 상소중에 글귀 하나가 문제가 되어서 위리안치의 형을 받는데, 반대파들이 중벌을 먹이려던것을 고종이 방어해준 것이었다.

일본과 수호조약을 맺을때 도끼를 들고가서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


반대하는 이유는 요약해서 대충 다음과 같았다:

1. 우리가 강해서 상대가 부탁한게 아니라 약점을 보여서 맺게 된 조약이고, 우리가 방비없고 허약한것을 저들이 모두 알고있으므로 앞으로 어떤일이 벌어질지 알수 없다(이 조약이 조선이 일본에 먹히는 첫 발판이므로 꽤 정확하게 본 것이다)

2. 재물을 교역하게 되면, 상대의 물건은 사치품이고 생산되는데 한이 없고, 우리 물건은 필수품이고 한이 있는데 이것을 서로 바꾸면 백성들의 생활이 매우 힘들어질 것이다.

3. 일본인들은 서양인과 같으니 일단 조약을 맺으면 천주교의 책과 초상이 들어와 기독교인이 늘어나고 유교적 질서가 파괴된다.

4. 일본인들이 들어 와 살면 조약을 맺었으니 거절할 말이 없는데, 그들이 재물을 약탈하고 사람을 죽이면 백성들이 호소해도 윗사람들은 강화가 깨질까봐 일을 함부로 처리할수가 없을것이다.(조약내에 일본인의 치외법권을 인정하는 내용이 있었는데 그것과 관련된 말인듯 하다)

5. 일본인들은 조금만 마음에 들지않으면 사람을 죽이고, 재물과 여자밖에 모르므로 짐승이나 다름없는데, 짐승과 사람이 같이 있으면서 걱정거리가 없길 바라는것 자체가 이상하다. (당시 조선인들이 일본을 어떻게 봤는지 참고가 되는 대목이다)


이미 실권했던 대원군은 최익현에게 감정을 가지고 있다가 최익현이 올린 이 상소를 보고 마음이 풀렸다고 한다. 그런데 차라리 대원군이 집권중이었다면 이 조약은 성사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척화를 주장하고 무기를 연구하며 나름 대비를 하고, 이미 프랑스와 미국의 함포외교를 비록 사상자가 많이 나오긴 했지만 막아냈던 대원군이었기에, 조일수호조규같은 대놓고 상대방을 잡아먹겠다는 의사를 보이고 있는 조약을 받아들였을리가 없다.

하여튼 저 상소는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최익현은 또 유배를 간다. 최익현 말고도 반대하는 상소를 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최익현이 잡혀가는것을 보고 짐을싸서 돌아갔다고 한다.

이후 상당히 오랫동안 크게 정치에 관여하는일 없이 사는데 이때쯤이면 이미 최익현은 학자로 이름이 나고 동의하는 사람수가 상당한 거물이었던 것 같다. 1895년 김홍집 내각이 단발령을 내릴때 최익현을 잡아와서 상투를 자르려고 용을 썼는데, 최익현의 한 사람의 영향력이 상당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결국 최익현은 상투를 지켰는데 여기서 내 목은 잘라도 머리카락은 못 자른다는 말이 나왔다.

머리카락좀 자르는게 뭐 어렵냐고 호들갑이냐 할 수도 있지만 유학자들의 사고를 보면 이해가 좀 된다. 유학에서는 자기 한 몸을 바르게 처신한 다음 집안을 정돈하고 그 다음 나라를 다스리고 그 다음 천하를 다스리는 것을 순서로 하는데, 한 몸을 바르게 처신할때 기초가 되는것이 효도하는 것이고 효도에서 또 기초가 되는것은 부모에게 받은 몸과 털을 상하지 않게 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머리카락을 썩둑 짤라버리라는 소리는 유학자들 입장에서 좀 받아들이기 힘든 요구 수준이 아니었을 것이다.

위정척사파의 수장 격이었기에 여러번 일본군 사령부에 끌려간적이 있는데 그때마다 일본인들에게 고함을 치고 책상을 때려부쉈다. 기운이 셌던것 같다.

최익현은 성격이 굉장히 강직하고 곧기는 했지만 철저한 수구파였기 때문에 조정에 상주하던 박영효나 유길준같은 개화파들을 싫어했다. 이때 이런 내용으로 상소를 상당히 올린다. 그리고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를 칭할때 명나라가 오랑캐(청나라)에 망한지 오래돼서 황제 자리가 오래 비었으니 못할것도 없긴 하지만 명령이 금문을 나가지도 못하면서 명칭과 실제가 맞지 않는것 아니냐고 대놓고 말하기도 했다.

개화파들과 같이 명단에 끼는것이 정말 싫었던지 수차례 고종이 관직을 주고 불렀음에도 번번이 사퇴하였다.

몇년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나라가 망한것으로 받아들여 큰 충격을 받았다. 그때 상소를 올려서 애초에 일본에서 사람을 보낼때 의도를 몰랐을리가 없는데 대비를 하고 온 나라에 죽을 각오를 했다고 알리지 않은게 일단 문제고, 또 설령 총칼의 위협을 받았더라도 고종 본인이 위엄을 내면서 책상을 칼로 쪼개버리고 대신들은 조약서를 찢어발겨버렸으면 저놈들도 더 어떻게 하지 못했을 거라고 말한다. 그리고 소위 말하는 을사오적을 당장 죽이라고 하면서 그나마 괜찮은 사람이었던 한규설한테도 장관이라는 놈이 일의 시초도 생각못하고 부하도 관리하지 못했다고 욕을 한다.

그리고 아직 각국 공사들이 돌아가지 않았으니 모두 회합시켜 조약이 무효임을 통고하고 국제법대로 처리하라는 의견을 낸다.

이후 국민대궐기를 촉구한 포고팔도사민, 일본공사관에 일본이 한국의 신의를 배반한 조목을 하나하나 따져 보낸 기일본정부 등을 발표하고, 뜻을 함께하는 사람들과 의병을 일으키며 동참할것을 권한 창의토적소를 쓴다. 이때 최익현은 이미 현대의학을 구경도 안해본 채로 70살을 넘긴 초고령자였다.

이때 쓴 포고팔도사민에 이런 내용이 있는데

우리나라가 고려 이후로 명칭은 비록 중국의 번속이었지만, 토지와 인민과 정사는 모두 우리가 자립하고 자주하여 털끝만큼도 저들의 간섭을 받지 않았다. 그러므로 전성기에는 승병이 백여만이요, 재화가 창고에 가득하였으며, 백성은 부유하고, 호구는 번식하여 비록 수 양제와 당 태종의 위세로도 패하여 돌아감을 면치 못하였으며, 원 세조가 여덟 번이나 쳐들어온 다음에야 복속 시켰다. 우리 태조 때에 왜적이 여러번 침범하였지만 번번이 패하였고, 임진왜란에 비록 명 나라의 구원이 있었지만 회복하여 전승한 공은 모두 우리 군사가 왜선 70여 척을 노량에서 침몰시킨 데 있었으며...(중략)...우리나라가 비록 협소하지만 백성들의 성질이 강력함은 반드시 타국에 뒤지지 않는다.

이걸 보면 멸망한 명나라를 중화로 보고 조선을 소중화로 봤던 수구 유학자들도 민족의식이 상당했음을 알수 있다.

최익현의 의병은 몇 고을을 점령하거나 일본 관공서를 철거하고 가담자도 계속 늘어서 위세가 꽤 있었다. 그러나 고종이 해산하라는 명을 내려(정말 고종의 뜻에서 나온것인지는 불분명) 최익현의 마음이 심란하던 차에 이미 통감부의 수중하에 들어간 대한제국군 진위대가 총포를 쏴대었다. 최익현은 동족끼리 죽이는것을 용납할수 없었으므로 같이 일본에 대항하고 더러운 이름을 남기지 말라는 뜻을 전했으나 진위대는 무시하고 오히려 소극적인 상대의 자세를 이용해 맹공격하였다. 이렇게 의병이 흩어지고 정시해 라는 문인이 최익현 바로 앞에서 탄을 맞고 죽는다.

최익현은 시체를 안고 통곡하다가 자기도 죽기 위해서 탄이 비오듯 쏟아지는 가운데 자리를 잡고 앉았다. 진위대는 계속 공격하다가 저항이 없는것을 확인하고 주변을 지키고 있다가 좀 지나서 최익현과 최익현을 따라서 주저앉았던 사람들을 체포한다.

이후에 대마도 감옥으로 보내진다. 흔히들 단식하다 죽은걸로 알지만 사실이 아니다. 처음에 감옥에 왔을때 경비대장이 여러분이 일본음식을 먹으니 일본 풍습을 따르라 하고, 일본 군인 하나가 갓과 탕건을 잡아서 벗기려고 하자 최익현이 사자후를 지르고, 칼을 빼들자 가슴팍을 헤치면서 찌르라고 고함친 사건이 있었는데, 이날 제자 임병찬에게 음식을 먹고 명령을 거부하는것도 옳지 않으니 먹지 않겠다고 하고, 마지막 상소를 구술해 준것이 와전되어 퍼진것이다.

이후 장교가 와서 통역이 실수한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사과하고, 함께 온 제자들과 먼저 감옥에 와있던 홍주의병들이 계속 역사속 사례를 들고 울면서 권하였다. 그리고 다음날 대장이 다시와서 며칠전 말한것은 통역이 잘못말한것일 뿐이고 식비는 한국정부가 내고있다고 권하여서 비로소 식사를 한다.

대마도에 오고 몇달 후 병이 나는데 낫지 못하고 사망하고 만다. 이후 관이 바다를 건너오고 가는곳마다 상인, 농부, 과부, 기생 등이 와서 곡하고 스님들이 길가에서 치전하여 인파가 수만명이 몰렸다.

사후 몇년후에 제자들이 최익현이 썼던 글들을 모아서 문집(면암집)을 내는데 이때 헌병들이 습격하여 조사하고 일제를 규탄한 부분을 샅샅이 찾아서 목판까지 뜯어갔다. 그런데 다행히 숨겨둔 몇십질이 남아서 내려왔다. 그리고 수십년 후 일제가 문화통치를 표방할때 총독부의 허가하에 다시 인쇄한다.

일제가 망해서 돌아간 뒤 대한민국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된다

형이상학적으로는 독자적인 학설을 만들어내기보다는 스승인 이항로의 학설을 계승했다고 한다.

시도 많이 썼다.


대지와 산하에 추운 겨울이 왔는데 / 大地山河屬歲寒

그대가 어려운 길 떠난 것에 놀랐네 / 驚君不計路行難

마지막 길에 좋고 나쁨을 말할 필요있나 / 窮途利病何須問

필경엔 너그러운 우주에 살 것인데 / 到底容身宇宙寬


틀린점 수정환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