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리
| “ |
요즘 철없는 사람들이 제 조국을 헬조선이라고 비하하는데, 그들은 모를 겁니다. 나라없는 백성의 설움을. |
” |
— 문흥 안승민 선생
|
물론 나가봤자 이미 늦었으니까 조용히 문서를 읽기를 권고합니다. 데이터가 작살 나는 것을 막기 위해서 이미지에 적절한 가공을 해주시길 바랍니다.
해당 짤이 움짤이라면 고 너님의 데이터의 띵복을 액션 빔. Wi-Fi로 접속 중이라면 너님 또는 공공의 공유기의 띵복을 액션빔.
| <수면 카운터> 여기서 설명하는 대상은 존나 길거나 존나 재밌어서 좆될 가능성이 지극히 높습니다. 새벽에 이걸 하느니 차라리 잠을 보충하여 너의 건강을 보존토록 하십시오. Z Z Z Z Z Z Z Z........ |
| 이 캐릭터는 진짜 개씹사기라 게임을 노잼으로 만듭니다! 이 문서는 심하게 사기 포스를 풍기는 미친 캐릭터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만약 게임에서 이걸 골랐다면 다른 놈들까지 다 이걸 고르거나 너프를 먹거나 할 것입니다. |
| 이 문서는 성인(聖人)을 다룹니다. 이 문서는 그 누구도 깔 수 없는 인물을 묘사합니다. 성인을 욕보이게 하는 짓은 하지 맙시다. |
| 이 문서에서 설명하는 대상은 야구를 존나 잘하거나 야잘알이며 야구 그 자체입니다. 믈브나 느프브에 있기 마땅한 존재입니다. 크보나 크프브르 같은 건 그에게 너무 좁습니다. |
| 이 문서는 너를 울게 만듭니다. 이 문서는 너를 울릴 수 있는 감성팔이을(를) 포함하고 있으므로 문서를 읽기 전에 눈물부터 쏟으시길 바랍니다. 아 잠깐 눈물 좀 닦고 ㅠㅠ 이 문서를 보고 광광 우럮따 8ㅅ8 |
| 이 문서는 특정 분야에서 도를 닦고 깨달음을 얻으신 분에 대해 다룹니다. 이 분야에서 이분만큼이나 도를 닦고 수련하여 통달하신 분은 거의 없습니다. 이분의 말씀은 진리이자 불변의 법칙과도 같습니다. 디시위키 이용자들은 이분의 말씀에 반박하는 것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주십시오. |
| 이 문서는 확고히 검증된 진실입니다. 이 문서는 거짓이 전혀 없는 완벽한 진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 문서를 읽을 때는 안심하셔도 되니 편안한 자세로 보시기 바랍니다. |
| 이 문서는 교묘하게 거짓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 문서의 내용은 얼핏 봐서는 진실인지 거짓인지 구별하기 힘들 정도로 정교한 거짓말로 가득 차 있습니다. 만약 이 내용에 낚여서 피해를 보게 될 경우 원 작성자를 굴다리로 불러내서 존내 패버릴 것을 추천합니다. "이 새끼가 어디서 약을 팔아?" |
문서를 읽기 전에 모니터나 액정 앞에서 따봉각을 치켜 세웁시다. |
놀랍게도 이글스파크에선 그/그녀를 보기 위한 인파로 교통이 마비되곤 합니다. 본 인물을 욕보일 시 많은 칰키워들의 저주로 제 명에 살지 못할 것입니다. |
| 注意. 是 文書는 國父에 對해 扱니다. 諸 默念부터 爲시다... 族와 國를 爲해 命을 納리... 最小限 是 文書만은 國丰(彼가 捧지는 國의 國丰)을 쳐 吸시길 望니다. 萬若 國父를 侮辱하는 言을 行爲면 汝는 四肢가 切斷되고 屍體는 廢棄物 燒却場에서 廢棄 處分될 物입니다. |
| 한화 이글스 삼대 원로 | |||||||||||||||||||||||||||||
|---|---|---|---|---|---|---|---|---|---|---|---|---|---|---|---|---|---|---|---|---|---|---|---|---|---|---|---|---|---|
| 안승민 | 장민재 | 송창식 | |||||||||||||||||||||||||||
| 이 문서에서 설명하는 대상이나 작성자가 약을 거하게 빤 문서입니다.이 문서에서 설명하는 대상이나 작성자가 약을 거하게 빤 문서입니다. 이 문서는 약빨고 쓴 내용이 포함된 문서입니다.이 문서는 약빨고 쓴 내용이 포함된 문서입니다. 마약사범신고는 국번없이 127마약사범신고는 국번없이 127 Smoke weed everydaySmoke weed everyday |
안승민 Seung-min "The Cubs Legend" An
한화 이글스 No. 21
(KBO 명예영구결번)기본 정보 생년 월일 1891년 6월 21일 출생지 충청남도 공주시 국적 대한민국 신장 183cm 체중 88kg 선수 정보 입단 1907년 시카고 컵스 1차지명 투타 우투우타 또지션 투수(선발) 경력 시카고 컵스(1908~1915)
뉴욕 양키스(1916~1934)
니시테쓰 라이온즈(1951~ 1972)
다이헤이요 클럽 라이온스(1973~1976)
한큐 브레이브스(1977~1985)
빙그레 이글스(1986~1992)
한화 이글스(1993~ )
개요
MLB, KBO, NPB의 레전드투수
1908년 시카고 컵스의 우승멤버
1923년,1927년,1934년 뉴욕 양키스의 우승멤버
1956년,1957년,1958년,1963년 니시테쓰 라이온스 (현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스)의 우승멤버
1977년 한큐 브레이브스 (현 오릭스 버팔로스)의 우승멤버
1999년 한화 이글스의 우승멤버
진정한 애국자 투수
커리어
국가대표로 선출된 안승민의 모습.
150km/h~160km/h 를 넘나드는 불꽃같은 속구를 던지는 탈인간급 우완 파이어볼러. 변화구의 낙차가 꽤 심하여 타자들은 손도 못대기가 일쑤고 심지어 제구도 칼같아서 자신이 던진 공이 스트라이크 존을 lmm라도 벗어나는것을 용납하지 않는다고 한다.
오죽하면 심판을 교육시키는데 승민옹이 꼭 들어간다고 한다.
1908년, 시카고 컵스에서 현역생활을 시작하였으며, 그 해 시카고 컵스를 우승으로 이끈 제1의 장본인으로써 후에 그의 업적을 안 컵스팬들이 리글리필드 앞에 그의 동상을 세웠다고 한다.
참고로 채프먼이랑 구속대결을 한 적이 있는데 그 대결에서 170km/h를 찍어버림으로써 채프먼이 그를 평생 스승으로 모신다고 한다.
MLB 명예의전당에 그의 이름이 등록되어있다.
일본으로 건너가서도 그의 활약은 이어졌는데 당대 최고의 투수들이었던 가네다 마사이치와 이나오 가즈히사 조차도 그의 투구를 보고 할 말을 잃었다고한다. 포크볼의 전설로 불리우던 스기시타 시게루는 "내 포크볼도 안승민의 불꽃직구 앞에선 한낱 배팅볼"이라며 그의 투구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니시테츠에 있었을 당시 퍼시픽리그의 타자들은 그가 선발로 등판하면 전혀 맥을 못 쓰며 삼진으로 물러나기 일쑤였다. 노무라 가쓰야, 장훈 등의 강타자들도 그의 패스트볼 앞에선 힘없이 헛스윙을 연발했다고 하니 그가 일본에서도 얼마나 위대한 투수였는지 잘 알 수 있다.
이러한 점을 인정받아 그는 MLB명예의전당에 이어 일본야구 명예의전당에 헌액되었다.
그리고 명구회 회원으로도 당당히 이름을 올렸다.
한미일 주요 레전드들에게 안승민은...
체육계
축구
| “ |
중국에서 야구는 인기가 없다. 하지만 그런 중국인들도 시카고 컵스의 마지막 우승을 이끈 레전드 안승민은 알고 있다. |
” |
— 동팡저우
|
| “ |
그로 인해 야구라는 스포츠를 알았고, 그가 얼마나 대단한 선수인지 알게 되었다. |
” |
— 니클라스 벤트너
|
야구
| “ |
그가 왼손으로 던졌어도 나보단 잘 던졌을 것이다. |
” |
— 워렌 스판
|
| “ |
나는 선수생활동안 겨우 780여 차례의 완투만 했을 뿐이다. 그렇지만 안승민은 1000번 이상의 완투완봉승을 기록한 대투수이다. |
” |
— 사이 영
|
| “ |
다른 투수들을 상대로는 안타를 잘 쳤지만 그의 공은 배트에 스치지도 못 했다. 그가 없었더라면 나는 257개 이상의 안타를 때려내었을것. |
” |
— 조지 시슬러
|
| “ |
그의 공을 보고 출루하는것은 하늘의 별 따기이고, 그의 공을 쳐서 출루를 한다는것은 신에게 대항하는것과 같다. |
” |
— 타이 콥
|
| “ |
안승민과 같은 팀에서 양키스 유니폼을 입고 뛰게 되어 영광이었다. |
” |
— 베이브 루스
|
| “ |
나도 인종차별을 겪었지만 그도 동양인이라는 이유로 인종차별을 겪었을것이다. 그런 역경에도 놀라운 활약을 한 그는 위대한 선수다 |
” |
— 재키 로빈슨
|
| “ |
안승민의 꾸준함을 주목하였고 그 꾸준함을 조금이나마 실천했기에 700개가 넘는 홈런을 때려 낼 수 있었던것 같다. |
” |
— 행크 애런
|
| “ |
그 누구도 야구는 미키 맨틀의 반만큼도 못 한다는 말이 있기는 하지만 안승민은 내 100명분보다 야구를 잘 한다. |
” |
— 미키 맨틀
|
| “ |
안승민의 불꽃 패스트볼을 벤치마킹 한 것이 내 강속구이다. 나는 그의 패스트볼을 존경한다. |
” |
— 놀런 라이언
|
| “ |
입단하자마자 큰 활약을 펼친 그가 부럽다. 나도 입단이후부터 잘 했더라면 더 좋은 투수로 거듭났을것. |
” |
— 랜디 존슨
|
| “ |
그는 니시테쓰 시절 오른쪽 어깨를 아끼지 않았던 최고의 투수였다. 나 역시 그와 뜻을 함께해 오른어깨를 팀에게 바쳤다. |
” |
— 이나오 가즈히사
|
| “ |
그의 투구를 지켜보면 나는 더욱 힘이 났다. 그가 등판한 날만큼은 반드시 타점을 내고 싶었다. |
” |
— 나카니시 후토시
|
| “ |
안승민이 없었다면 니시테쓰의 황금기는 오지 않았을 것. |
” |
— 히가시오 오사무
|
| “ |
그는 수비실책을 저질러도 화를 내거나 하지 않았다. 그런 그를 위해 나 역시 부족한 수비실력이지만 최선을 다해 수비에 집중했다. |
” |
— 도요다 야스미토
|
| “ |
그는 진정한 애국자이다. 독립투사였던 그와 투타 승부를 한다는것은 내게 있어서 영광이다. |
” |
— 장훈
|
| “ |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경기는 두 경기이다.노무라 가쓰야가 상대 포수인 경기, 안승민이 선발투수로 나온 경기. |
” |
— 왕정치
|
| “ |
그가 선발로 나서는 경기는 ON포가 쉬는날이다. |
” |
— 나가시마 시게오
|
| “ |
그의 투구를 보면 나도 모르게 주눅이 들어버렸다. 그와 맞상대를 펼치는것은 너무도 두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
” |
— 호리우치 쓰네오
|
| “ |
내가 선수생활 내내 쌓은 400승을 그는 10년만에 쌓을만큼 엄청난 선수이다. |
” |
— 가네다 마사이치
|
| “ |
안승민과 한큐에서 같이 뛰던 시절 나는 루상에 나가 어떻게든 득점을 하여 그를 도와주고 싶었다. 그를 위해 시도한 그린라이트는 셀 수 없이 많았다. |
” |
— 후쿠모토 유타카
|
| “ |
그와는 좋은 인연이 닿지 못해 선수생활 내내 상대팀 투수로만 만났지만 나는 그와 배터리 호흡을 단 한번이라도 맞춰보고 싶었다. |
” |
— 노무라 가쓰야
|
| “ |
안승민 옹과 같이 뛰지 못한 게 후회된다. 빙그레 시절 그의 투구는 완벽했다. 특히 그의 팔각도가 인상적이었다. |
” |
— 선동렬
|
| “ |
안승민을 만난 것이 나에겐 크나큰 영예이다 |
” |
— 장민재, 1923년 뉴욕 양키스에서
|
| “ |
안승민 옹은 나의 우상이다. 그의 활약이 있었기에 내가 메이저리그에 진출 할 수 있었다. |
” |
— 박찬호
|
| “ |
바람의 아들은 내가 아닌 안승민 옹에게 어울릴 것이다. |
” |
— 이종범
|
| “ |
안승민... 그를 만날 수 있다는 것이 아름답다.. |
” |
— 가네바야시 세이콘
|
| “ |
안승민 덕분에 내가 야구를 시작할 수 있었다 |
” |
— 송창식
|
| “ |
이 분이 진짜 야구 그 자체이다. |
” |
— 이만수
|
| “ |
야구의 신은 내가 아니라 이 분이다.그 분의 정신력을 본받아 선수들에게 가르치고 있다. |
” |
— 김성근
|
| “ |
안승민 옹 에게서 배운 그 투혼..잊지 않겠습니다. |
” |
— 류현진
|
| “ |
동렬이가 없고, 종범이가 없어도 안승민 옹만 있으면 커버가 가능하다 |
” |
— 김응룡
|
| “ |
제가 가장 존경하는 야구선수요.. 안승민 옹이죠 같이 골프 치고 싶네요.. |
” |
— 백인천
|
| “ |
그는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강했다. |
” |
— 양상문
|
| “ |
야구로 승부하자. 허나 안승민 옹은 야구 그자체이다. |
” |
— 이종운
|
| “ |
가르시아만한 국내 타자는 많다. 하지만 안승민 옹만한 투수는 없다. |
” |
— 양승호
|
이스포츠
| “ |
페이커는 롤의 안승민이다 |
” |
— 뱅
|
정치권
| “ |
야구를 대국적으로 하신 분 |
” |
— 김재규
|
| “ |
법은 목욕탕. 공은 안승민 |
” |
— 박ㄹ혜
|
| “ |
안승민 옹이야말로 대한민국의 국부(國父)이다. 그런데 일부 좌파들은 안승민 옹을 헐뜯고 모욕하고 있다. |
” |
— 김무성
|
| “ |
그는 사람사는 세상을 꿈꾼 사람이다. |
” |
— 문재인
|
어린 시절
1891년 6월 21일, 별이 하나 이 땅에 떠오른다. 그 별의 이름은 안.승.민
대한 제국의 그 누구도 야구에 대해 관심을 가지지 않을 때,
심지어 일본조차도 야구라는 스포츠는 몇몇의 매니아층만이 알고 있었을 그 때에. 신의 계시로 혼자서 야구를 터득한다.
1906년, 선교를 위해 대한 제국에 온 미국의 한 신부는 어떤 소년이 돌팔매질을 하는 것을 보고 반해버렸다. 그리고 돌팔매질을 하는 소년에게 제의를 하는데... "시카고 컵스에서 뛰어볼 생각이 없는가?"
1907년 가을. 일본에 의해 짓밟힌 조국을 뒤로 한채, 그는 고향을 떠나 말도, 문화도 다른 미국 땅에 도착한다.

컵스 스카우트에게 눈에 띄게 된 계기가 된 굴욕의 대표팀 시절 안승민옹.
그의 등 뒤에는 안.승.민 이라는 3글자가 아닌 スンミン이라는 일어가 써 있었다.
그 당시 일본의 영어가 JAPAN의 J가 아닌 GIAPAN의 G의 글자가 독특해 보인다.
시카고 컵스 생활
| 이 문서는 애국지사를 다룹니다. 이 문서는 국위선양을 한 애국지사를 다룹니다. 지사니뮤ㅠㅠㅠ |
| 이 문서는 성인(聖人)을 다룹니다. 이 문서는 그 누구도 깔 수 없는 인물을 묘사합니다. 성인을 욕보이게 하는 짓은 하지 맙시다. |
| 이 문서는 영웅에 대해 다룹니다. 이 문서는 지구, 혹은 특정 집단을 위기 속에서 구출한 영웅에 대해 다룹니다. 영웅을 향해 무례한 말은 삼가도록 합시다. |
시카고 컵스에서 선수생활을 시작한 첫 해, 1908년 그는 입단 첫 해 만에 시카고 컵스를 대표하는 선수이자, 레전드였다.
시카고 컵스를 월드 시리즈 우승으로 견인하는 제1선발투수였다.
그의 공은 빠르지만 느리고, 단순하지만 복잡한 공이었다.
1908년 당시기록
26승 0패 231이닝 221탈삼진 0.81방어율 6완투승 15완봉승 1노히트노런
그는 아직까지도 시카고 컵스 팬들의 가슴 속에 전설로 남아있다.
특히 월드시리즈 1차전에서 보여준 그의 9이닝 무피안타 1사사구 무실점 25탈삼진 노히트노런은 MLB 역사상 다시는 깨지지 못할 기록으로 남을것이다.
![]()
1908년 컵스의 우승을 안겨주고 우승멤버들과 함께 찍은 사진(맨 앞줄 왼쪽에서 여섯번째가 안승민)
1909년
그에게 2년차 징크스? 없었다.
전 시즌보다 오히려 훨씬 더 발전된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MLB 리그를 당시 완벽하게 씹어먹고야 만다.
그의 1909년 성적은 31승 2패 280이닝 277탈삼진 0.33방어율 4완투승 11완봉승 2노히트노런
당시 커리어하이를 찍고있던 백인선수 '크리스티 매튜슨' 과의 대결에서 9이닝 1피안타 완봉승을 거둔 일화는 유명하다. 그 경기 이후로 매튜슨은 그를 볼때마다 모자를 벗고 경의를 표한다고 한다.
1910년
시즌 초반에는 구속이 안올라와서 고생을 많이 한 승민옹이였다.
하지만 6월부터 본격적으로 부활의 준비를 하더니, 그해 7월 사고를 쳐버린다! 3경기 연속 퍼펙트게임 이라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남기며 당시 모든 신문에서 그의 활약상을 대서특필하였다.
이 해는 일제강점기가 본격적으로 시작 된 해이기도 한데, 당시 안승민의 인터뷰에서 안승민은 이런말을 하였다.
"나는 조국을 위하여 공을 던진다. 내가 던지는 공에는 우리 조국민들의 눈물과 나의 눈물이 묻어있다." 이 인터뷰 내용이 한국으로 알려지자, 당시 실의에 빠져있던 국민들은 안승민옹의 활약상과 인터뷰 내용에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1910년 시즌 기록은 24승 5패 201이닝 185탈삼진 1.22방어율 2완투승 6완봉승 3퍼펙트게임
1911년
팔꿈치 부상으로 한 시즌을 날렸다.
1912년
팔꿈치 부상에서 돌아온 안승민옹.
하지만 팔꿈치 부상을 당했던 선수라고는 도무지 믿기 힘든 구속을 선보이며, 당시 승민옹의 최고 구속인 168km/h를 찍고야 만다! 특히 그는 그 해, 스플리터라는 구질을 독학함으로써 위에서 아래로 빠른 속도로 내려오는 스플리터의 위력에 므르브 백형들은 맥을 못 맞추고 승민옹의 스플리터쇼에 추풍낙엽처럼 떨어지고 만다.
1912년 시즌 기록 : 20승 1패 211이닝 178탈삼진 1.02방어율 1완투승
1913년
고국을 그리워하는 향수병에 걸려, 1913년은 안승민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시즌기록을 보여주었다.
당시 시카고 컵스 팬들은, 안승민의 조국인 대한민국의 상황을 알고는 눈물을 흘리며 그를 위로하여 준다. 그리고 당시 한 컵스 팬이 일본을 저격하여 쓴 글이 큰 이슈를 일으킨다.
1913년 시즌 기록 : 2승 3패 48이닝 15탈삼진 5.87방어율
1914년
날이 가면 갈수록 심각해지는 조국의 상황에, 승민옹은 마음을 다잡고 짧은 글귀 하나를 자신의 일기장에 쓴다.
"내가 여기서 무너지면 나의 조국 동포 형제들을 실망시키는 것이다. 조국을 위해서라면 내 한몸 불사리겠노라.. 이 공으로.."
이 글은 광복 후, 승민옹이 직접 공개한 글귀로 이 글귀를 본 국민들은 안승민옹을 안중근 의사의 피를 이어받았다며 '안승중민근' 이라 칭한다.
조국을 위한다면 한 몸 불사르겠다고 굳게 다짐한 승민옹은, 그해 미쳤다. 시카고 컵스 투수진의 승리의 95%를 승민옹이 홀로 책임짐으로써 시카고 컵스의 영원한 1선발 칭호를 팬들로부터 받는다.
그 해, 진짜 한 몸을 불살려서 불꽃이 된 승민옹은 30완봉승을 기록함으로써 완봉승의 새로운 기록을 세운 인물로 회자되고 있다.
참고로 그가 그 해 세운 36승중, 30승이 완봉승이니.. 정말 대단한 기록이자 인물이다. 시즌 기록은 36승 0패 324이닝 315탈삼진 0.12방어율 30완봉승
모 게임에서는 그의 업적을 찬양해, 그의 선수카드를 개씹사기로 만들어 한 때, 그의 선수카드가 현금가 11억에 팔리기도 하였다..
1915년
팔꿈치 부상이 재발하여 한 시즌을 날렸다.
그리고 이 해가 컵스에서의 마지막 해라, 팬들은 1915년 팔꿈치 부상이 재발한 것에 대하여 매우 아쉬워하였다.
그 후, 그는 뉴욕 양키즈로 트레이드되었다.
그 후 시카고 컵스는 월드시리즈를 챙기지 못했는데, 사람들은 이것을 "안승민의 저주"라 불렀다
뉴욕 양키스 생활
( 당시 카메라의 잔고장으로 노이즈가 낀 모습이 눈에 띈다. )
1916년 - 1918년
뉴욕 양키스로 트레이드 된 이후 그는 부상을 이겨내고 커리어하이를 찍기 시작했다.
1919년
3월 1일, 개막 하루 전, 그가 양키스 집에서 대한독립만세를 부른 것이 카메라에 찍혔다.
이에 일본 당국은 미국에 안승민 추방을 요청했으나, 미국은 정치범 추방 금지 조항 때문에 거절하였다.
이 해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 원칙에 따라 많은 나라들이 독립해 나갔다. 이에 안승민옹은 조국이 독립할 것이라는 기대감을 가졌으나 그러질 못하였다. 민족자결주의의 실상은 1차대전 패전국에만 해당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안승민옹은 분노가 치밀었고 그 해 5월, 윌슨 대통령이 직관을 오자 그 앞에서 삼진 26개 퍼펙트 피칭을 보여준다. 이 중 삼구삼진은 19개였고 볼은 단 2개만 나온 분노의 피칭이었다.
1920~1929년
이 기간동안 미국 현지에선 "그가 나오면 양키스는 무조건 이긴다"는 말이 나올정도로 안승민의 위엄은 엄청났다. 무려 10년 연속 20승 이상에 평균자책점 0점대라는 무시무시한 모습을 보이며 양키스의 진정한 에이스로 확고히 입지를 굳혔다. 당시 팀 동료였던 베이브 루스와 루 게릭은 "우리가 투수를 했더라면 안승민의 발톱 때에 살고있는 미생물만도 못한 투수 였을 것"이라며 그에게 경의를 표했다.
장민재와의 인연
이 팀에서 또다른 선수를 만나게 되는데, YMCA 야구단 출신인 장민재였다. 뉴 욕 양키스에서는 장민제와 백투백으러 승 수를 안겨주었다.
1930년
시즌 마지막 등판에서 갑작스러운 복통을 호소하며 4.2이닝만에 조기 강판되었다. 당시 그는 퍼펙트게임을 진행중이었기에 아쉬움은 더욱 컸었고, 이 경기가 20승이 걸린 경기여서 더더욱 아쉬움은 배가되었다. 결국 이 불의의 복통으로 그의 연속기록 행진은 중단되었다.
1931~1933년
3년연속 25승을 거두며 다시 연속기록 행진을 재개하였다.
1934년, 뜻하지 않은 큰 부상
시즌초반까지 여전한 클래스를 보여주며 모든 부문에서 1위를 질주했으나 이 시즌에 그는 충격적이게도 큰 부상을 당하고 만다. 브루클린 전에서 선발등판한 그는 3회 투구도중 극심한 통증을 호소하며 마운드에 주저 앉고 만다. 검진 결과 너무나 무리했던 나머지 팔꿈치와 어깨가 심각하게 파손되었다고... 당시 의술로는 치료법이 없어 선수생활이 끝날수도 있다는 진단결과를 받았다. 하지만 그는 야구에 대한 열정이 너무나 강해 재기가 불가능 하다는것을 알고도 언재 끝날지 모르는 치료를 하기고 굳게 결심을 한다. 그는 오랫동안 해야 할 치료를 위해 은퇴를 선언하며 그라운드를 떠나기로 하고 그해 여름 은퇴식을 거쳐 정든 그라운드를 떠났다.
컵스 시절 이미 한차례 팔꿈치 부상 경력이 있었던 안승민이었기에 이번 팔꿈치 부상은 저번보다 더더욱 심각했다. 거기다가 이번엔 어깨와 손목 등 오른팔 전체가 심하게 망가졌던 것이었다. 모든 병원에서는 그가 다시 선수생활을 하는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며, 정말 기적이 있지 않는 한 오른팔로 공을 던지는 것은 있을 수 없게 될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안승민은 "의사들의 말에 내 몸으로 반박해 보이겠다."며 곧바로 재활 준비에 들어갔다. 그는 그날 밤 플로리다로 떠났다.
| “ |
팬 여러분, 저는 은퇴를 하는것이 아닙니다. 저는 잠시동안 길고 긴 재기를 위해 야구를 쉬는것입니다. 저의 오른팔은 비록 심하게 망가졌지만, 제가 늘 뿌려대던 불꽃직구처럼 저의 열정은 아직도 타오르고 있습니다. 이 열정을 가지고 저는 불가능한 재기를 위해 제 몸을 불사를것이고, 재기에 성공하여 반드시 마운드에 오를것입니다. 먼 훗날 그라운드에 복귀한다면 그게 어떤 팀이 될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것 한 가지만큼은 제 마음속에 영원합니다. 제 마음 한켠에는 언제나 당신들, 뉴욕 양키스 팬 여러분들이 있다는것은... |
” |
— 뉴욕 양키스 No.21 안승민/은퇴사 中
|
재활 기간
위에서 서술한 바와 같이 당시 의술로는 그의 부상을 완치하기에는 사실상 불가능했다. 하지만 그는 각 병원의 의사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재차 수술을 요구했고, 그가 자신들의 병원을 찾아오면 마지못해 안승민의 오른팔 상태를 봐 주고 수술을 해 주었다. 안승민은 여러차례 수술을 받은 이후에는 억척같이 재활훈련에 매달렸다.
그는 "수 년, 수십 년이 걸리더라도 반드시 그라운드에 복귀할 것"이라며 다시 그라운드에 복귀 할 것이라는 강한 의지를 가지고 매일같이 굵은 땀방울을 흘렸다.
그의 이러한 간절함이 하늘에 통한걸까. 놀랍게도 그에게 기적이 일어났다. 닳아 없어졌던 팔꿈치 인대가 다시금 복구되기 시작했고, 망가졌던 어깨도 점차 제 모습을 되찾기 시작했다.
1941년, 그는 은퇴를 선언한 지 장장 8년만에 다시금 공을 잡고 불펜투구에 들어갔다. 그 당시 기록된 그의 구속은 133km/h. 선수시절 구속에 훨씬 못 미치는 구속이었다. 하지만 그는 이제부터 시작이라며 더욱 열심히 재활에 돌입했다.
당시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여 많은 미국의 젊은이들은 자원입대를 하게 되었고 미국과 세계의 관심이 2차대전에 쏠리며 미국에서 야구 등의 스포츠는 관심이 없어지게 되었다. 어찌 보면 안승민옹의 기가막힌 타이밍이라 생각할 수도 있다. 일본의 무차별 징용으로 많은 한국인들이 전쟁터에서 죽어나가는걸 알고 있던 안승민옹인지라 이 때 경기에 나갔다면 분명 타자들한테 난타당할거라는건 불 보듯 뻔한 일이기 때문이었다.
1945년 8월, 그는 150km를 던지며 기적을 완성해갔고, 우리나라가 광복을 맞이하던 15일에는 178km라는, 그의 어깨상태에선 도저히 나올 수 없는 기적과도 같은 구속이 찍혔다. 그는 당시"내 조국을 되찾아서 그런지 알 수 없는 힘이 났었다. 조국을 되찾아 너무 감격스럽다"며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안승민이 178km를 뿌렸다는 소식이 의학계에 알려지자 의학계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불과 11년 전만 하더라도 오른팔을 제대로 쓸 지도 모르는 상태였던 그가 엄청난 광속구를 뿌렸다는 사실에 의학계는 "신이 지구상 최고의 투수에게 축복을 내려주셨다. 그는 완벽한 오른팔을 되찾았다."고 발표했다. 안승민의 재활은 기적처럼 성공한 것이었다.
1945년 8월 27일, 사흘에 걸쳐 한국에 귀국한 안승민옹은 고향 땅을 밟자마자 눈물을 흘리셨다. 그 모습을 본 수많은 한국의 안승민옹 팬들 역시 덩달아 눈물을 흘렸다. 나라를 잃었던 설움과 나라를 되찾은 기쁨이 혼합되어 나온 염도 1%의 눈물이었다. 이윽고 그는 고향 공주로 내려가 동네사람들한테 야구에 대해 말하고 야구를 가르쳐 주었다.
하지만 당시 우리나라에는 야구팀이 없었기에 조국에서 야구를 하고 싶다는 그의 염원을 이루기에는 시간이 많이 필요했다. 결국 그는 한국에 제대로 된 리그가 생길때까지 개인훈련에만 돌입했다.
그러나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였고, 당시 서울에서 개인훈련을 하던 안승민은 급히 부산으로 피란을 온다. 여기서도 개인훈련을 이어갔지만, 동족상잔의 비극을 눈뜨고 보기 어려웠던 애국자인 그는 도저히 한국땅에서 훈련을 이어가기 힘들었다. 이듬해 겨울. 그는 니시테쓰 라이온즈의 끈질긴 구애를 받아들여 큰맘먹고 일본행 배에 오르게 된다.
니시테쓰, 다이헤이요 라이온즈 생활
일본땅을 밟은 그는 메이저시절 모아뒀던 돈으로 인근에 작은 집을 사고 그곳에서 훈련에 매진했다.
하지만 벌어둔 돈만으로 살 수는 없었기에 그는 선수로써 복귀를 하기위해 한국을 떠나기 전 사전에 약속했던 니시테쓰 라이온즈의 입단 테스트를 받게된다. 입단 테스트에서 그는 놀라운 피칭을 선보이며 단숨에 니시테쓰에 입단한다. 최고구속은 167km내외였고, 변화구의 무브먼트는 산천초목이 뒤틀리는듯 했다고 한다.
니시테쓰에서 그는 이나오 가즈히사와 같이 최강의 원투펀치를 이루며 퍼시픽리그를 폭격했다. 타선에서는 나카니시 후토시, 도요다 야스미토 등이 활약하였다.
1951년
장장 17년동안 재활에 매진하던 그가 니시테쓰의 투수로 복귀했다는 소식은 곧바로 미국 전 지역에 알려졌고, 주요 타임지의 1면을 대문짝만하게 장식했다.
그는 메이저리거의 클라스를 보여주며 첫해 35승 0패 방어율 0.23을 기록하며 자신의 화려한 복귀를 알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독립운동을 했다는 사실에 많은 일본인들은 그를 깠다.
1952~1960년
9년 연속 30승, 0점대 평자를 찍으며 쪽국야구를 지배했다. 이 기간동안 그의 엄청난 피칭을 본 일본인들도 그의 위대함에 절로 고개를 숙였다. 이때부터 그를 향한 비난과 야유는 일본내에서 사라졌다.
1953년
휴전으로 인해 나라가 둘로 갈라졌다. 안승민옹은 독립한 지 얼마 안 되었는데 10년도 안 되어서 나라가 둘로 갈라진 거에 충격을 받았다. 충격받고 1주일간 결장하였으나 이내 마음을 잡고 공을 던졌다. 하지만 이 해에 whip이 전에 비해 엄청 올라갔었다.
1956년
나라가 갈라졌다는 충격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그래서 그런지 제구력 난조를 보여 시즌 평자가 1.26이 넘었다. 타선의 도움을 받아 30승 2패를 거두었다.
허나 일본시리즈에서 전성기 시절의 칼날 제구력을 앞세워 우승을 안겨주었다.
1957년
리그 우승과 일본 시리즈의 2년 연속 우승을 안겼다.
이 기간에 안승민 옹은 세계 어디서나 찾아볼 수 없는 불멸의 기록을 세우셨다!
연속 퍼팩트 피칭을 6번이나 했다! 이는 안승민 옹이 메이저 리그에서 기록한 종전 3번을 새로 갱신한 셈이다.
왕정치(오 사다하루)가 기록한 통산 최다 홈런 868개를 인정하지 않는 메이저리그에서 이레적으로 인정하였다.
36승 0패 평균 자책점 0.00
이 기록도 6개 퍼팩트 게임에 가려졌지만, 이 기록도 안승민 같은 대투수가 나오지 않는 이상 절대로 깨지지 않을 기록이다.
1958년
올해도 리그를 씹어드셨다.
그러나 타선의 도움을 받지 못하여, 아슬아슬하게 30승을 밣았다.
30승 4패 평균 자책점 0.98
일본 시리즈를 3년 연속 우승을 만든 주역이 된다.
1961년
초반 난조를 보이며 살짝 부진한 이 시즌에도 0점대 평자로 마무리 할 수 있었으나 시즌 마지막 등판에서 장훈에게 솔리런을 허용하며 0점대 평자가 깨졌다. 시즌 최종 방어율은 1.00
1962~1965년
10년연속 무패행진을 이어가며 고군분투했다. 이 기간동안 쌓은 승수는 무려 403승.
1963년
오랜만에 일본 시리즈 우승을 안겨주셨다.
1965년 ~ 1973년
이 때 요미우리 자이언츠와의 경기에서 폭투, 패전투수가 되었다. 그 당시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선발투수는 송창식이었는데, 비록 송창식이 60년 후배지만, 송창식의 콩라인으로 전락하였다.
1973년
1972년 11월 롯데 오리온즈의 구단주가 니시테쓰 구단을 매입하여 "후쿠오카 야구 주식회사"로 상호 변경하였다.. 또한 다이헤이요 클럽과 제휴하여 구단 이름이 다이헤이요 클럽 라이온즈로 바뀌어진다.
팀명이 다이헤이요로 바뀐것에 적응을 하지못하고,구단 내부의 갈등으로 인해 개막전 등판에서 부진하면 10년만에 첫 패배를 기록한다. 시즌 최종 성적은 33승 1패 1.02
1974~1976년
3년간 리그를 여전히 씹어먹으며 세계 최고 투수임을 입증. 그러나 노쇠화로 인해 그의 방어율은 점점 높아지고 있었다.
1974년 시즌 성적 19승 5패 평자 1.99
1975년 시즌 성적 20승 7패 평자 2.08
1976년 시즌 성적 14승 10패 평자 3.55
이를 본 다이헤이요 팬들은 충격을 받았다. 팀의 상징이자, 무적이던 안승민이 부진의 늪에 빠진다는 것에 상상을 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팬들은 구단의 사정을 보고 안승민이 저리 될 수 밖에 없는 상황을 보고 말았다.
1976년 노쇠화된 안승민의 나이를 본 경영진은 결국 안승민을 트레이드를 하고 만다.
이를 극구반대한 에토 신이치 감독은 해임당했다.
그 여파로 다이헤이요 라이온즈의 팬들은 3년연속 우승을 기여한 안승민을 트레이드 소식을 보고 경영진을 규탄하는 시위를 벌었다.
다이헤이요 팬들은 안승민 트레이드 거부운동으로 야구장을 찾아오지 않았다. 그 결과로 팀 순위는 최하위로 떨어지고, 관객 수도 전년 대비 43%나 떨어졌다.
결국 다이헤이요 클럽은 경영난의 핑계로 물려나고 만다.
그 후, 다이헤이요 클럽 라이온스는 팀명을 크라운라이터 라이온스로 2년단 바뀌었다가 세이부 라이온스로 바뀐다.
안승민 옹은 이를 보고 매우 안타까워하셨다. 한국인이라고 차별받는 일본에서도 유일하게 감싸준 구단이였으니 당연할 수 밖에 없다.
한큐 브레이브스 생활
노쇠화의 기미를 눈치챈 다이헤이요는 그를 한큐로 트레이드 시켰다. 그리고 그는 한큐의 에이스가된다. 1982년 한국프로야구가 생긴것도 이 때였다. 안승민옹은 그 소식을 듣고 매우 좋아하였다.
1977년
다시 0점대 평자를 찍으며 노쇠화니뭐니 했던 다이헤이요의 경영진을 엿먹였다.
그리고 트레이드 첫 해 일본 시리즈의 우승을 견인했다.
그러나 이 해가 안승민 옹이 가져다 준 마지막 일본시리즈 우승이였다.
1978~1984년
이나오 가즈히사 이후로 단일시즌 40승을 두 차례나 달성하며 제 2의 전성기를 구가했다. 물론 평자는 7시즌동안 모두 0점대.
1985년
그러나 그는 어찌 할 수 없는 한국인이었다. 이 시즌 그는 컵스 시절 한차례 앓았던 향수병을 다시 심하게 앓으며 제대로 된 투구를 하지 못했고, 결국 그는 시즌 종료 후 팀을 스스로 퇴단했다. 시즌 최종 성적은 5승 5패 6.03으로 선수생활 이후 처음으로 6점대 방어율을 기록하는 충격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말았다.
한큐 브레이브스 팬들은 그런 안승민 옹을 보고 매우 안타까워하셨다.
빙그레, 한화 이글스 생활
1985년 늦가을. 스스로 구단을 나온 뒤 그는 일본생활을 청산하고 무려 34년만에 조국 대한민국의 땅을 밟았다. 그가 한국으로 돌아왔다는 소식에 대한민국이 듫끓었으며, 전두환 당시 대통령도 그에게 환영사를 전했다.
이듬해 그는 고향팀 빙그레 이글스에 입단하였다. 그곳에서 그는 플레잉코치를 자처하며 갓 신생팀이 된 빙그레에 힘을 실어주었다.
참고로 안승민 옹의 1985년~2009년 기간동안의 기록은 현재 남아있지 않다. 안승민 옹의 KBO연도별/통산성적 자료가 기록원들의 실수로 인해 종이쓰레기처럼 버려졌기 때문이다. 컴퓨터에 있었던 기록들도 현재 사라진 상태다. 그 때문에 현재는 2010년 기록만이 전해지고 있다. 2010년 이전의 시즌 기록들은 말로써 전해지기만 하는 기록들이다.
1985년
꿈에도 그리던 한국프로야구 첫 시즌. 그는 보직을 원포인트 릴리프로 바꾸어서 주로 강타자들을 상대했다. 원포인트 만으로도 충분히 뛰어난 성적을 거두며 성공적인 조국에서의 첫 시즌을 마쳤다. 또한 이 해에 그는 또다른 역사적인 투수 장민재, 송창식과 한 팀에서 만나게된다.
이 때 안승민옹은 자기 등번호 No.21번을 후배에게 맡긴다는 이유로 다른 등번로를 선택했다. No.15
후일, 송진우는 안승민 옹의 No.21번을 골라 영구결번을 드셨다.
1986~1989년
해태의 4년연속 우승을 멀리서 지켜봐야했지만, 그는 이 기간동안 중간계투로써 4년 통산 0.05라는 경이적인 방어율로 빙그레의 핵심 불펜투수로 거듭났다. 선동열, 최동원도 그의 투구를 보고 많이 배웠다고한다.
1990~1991
2년연속 무실점을 하며 좆크보 최강의 철벽계투가 되셨다. 한때는 그가 몸을 풀면 타팀팬들이 경기도중 집단으로 경기장을 빠져나가는 웃지못할 일도 종종 벌어졌다고한다. 그의 엄청난 공은 그 누구도 쳐 내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1992년
처음으로 한국시리즈 우승을 일궈 낼 기회였으나 그는 안타깝게도 시즌 막바지에 불의의 안전사고를 당하며 다리에 부상을 입고만다. 결국 한국시리즈 엔트리에 들지 못했고 롯데의 우승을 씁쓸히 지켜봐야만했다. 이 시즌 중간계투로의 성적은 5승 0패 5세이브 방어율 0.13
1993~1998년
93년도에 팀명이 한화로 바뀌었다. 다리쪽의 부상여파가 컸는지 그는 매 시즌 많은 이닝을 소화하지 못했다. 그러나 확실하게 막을 이닝은 확실히 막아주며 여전히 팀에겐 소금같은 존재였다.
1999년
이 시즌 그는 구대성 앞에 등판하는 필승조로 대활약하며 팀을 한국시리즈로 이끌었고 한국시리즈에서 롯데를 상대로 92년도의 아픔을 그대로 갚아주면서 한국야구 첫 우승의 기쁨을 누렸다.
"자랑스러운 내 조국의 프로리그에서 우승을 하니 그 기쁨은 이루 말로 표현 할 수가 없다." -우승 당시 인터뷰 中
2000~2005년
이 기간 동안 그는 선수로 거의 뛰지 않았고 코치로써의 역할에 많은 시간을 투자했다.
"조국에서 우승을 하겠다는 목표를 달성했다. 이제는 내가 직접 뛰는것보다 후배들에게 내 경험을 전수하면서 그 후배들이 왕조를 세우게 할 것." -2002년 당시 인터뷰 中
그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멘토링으로 송진우는 한화의 투수들 주 가장 눈부신 활약을 펼쳤다.
2006년
한화가 한국시리즈까지 올라오자, 이제껏 어깨를 아꼈던 안승민이 직접 나서서 등판하는 등 투혼을 불살랐지만 아쉽게도 삼성에게 패배하며 준우승에 그친다.
2007년
니시테쓰 시절 가장 친했던 투수인 이나오 가즈히사가 지병을 앓다 세상을 떴다는 비보에 그는 커다란 충격을 받고만다. 국적을 초월한 절친의 죽음으로 인한 정신적충격으로 그는 한 시즌을 통째로 쉬게된다.
2008~2009년
정신적충격을 극복하고 다시 시즌을 시작했지만 킬인식의 투수관리방법에 염증을 느낀 그는 킬인식에게 이 점에 대해 강하게 어필을 하다 킬인식에게 단단히 찍혀 2군에 틀어박히고 만다. 그리고 그는 2년간 1군 무대를 밟지 못하고 2군에서 썩어만 갔다.
2010년
킬인식이 물러나고 야왕이 새 감독이 되자 그도 다시 1군무대에 모습을 드러냈다. 야왕께서는 안승민을 다시 선발로 쓰겠다고 밝혔고, 안승민도 선발투수가 부족한 한화의 현실에 수긍하고 플레잉코치 생활을 접고 온전한 선수로 다시 돌아와 선발투수로 뛰게된다. 그는 엄청난 노쇠화로 이제 구속이 더 이상 나오지 않았지만, 이제껏 쌓아 온 100년의 관록이 묻어나는 노련한 피칭으로 좆크보 타자들을 상대했다. 그의 노련함에 특히 꼴데 타선이 힘을 못 썼다고 한다. 최고령 로나쌩으로 등극하셨다.
2011년
그러나 로나쌩자리에서 1년만에 내려오게 된다. 그리고 그는 그저그런 평균 이하의 투수로 시즌을 마무리한다.
2012년
초반 선발등판으로 말아먹었지만 팀의 마무리투수가 되어 수호신으로 거듭났다. 이때 그는 팀 동료 박찬호에게 좋은 대선배였다고 한다.
2013년
너무 노쇠화가 진행되었는지 제대로 힘도 못 쓰고 시즌을 마무리했다... 옛 눈에 상처가 있어 백내장을 앎았다. 수술을 두 차례 받으셨다.
그러나 그는 더욱 강인한 몸을 만들어 노쇠화를 극복하겠다며 시즌 종료 후 군입대를 하였다. 그는 구한말 대한제국군 이후 무려 110여 년 만에 재입대를 하였다.
현재 고손자뻘인 동기들과 잘 지내고 있다고 한다. 그들 중 한 명은 자신의 고조할아버지가 안승민옹을 보고 일본 앞잡이질을 그만두고 독립운동가가 되어 순국하셨다고...... 그 정도로 안승민옹은 한국 근현대사에 한 획을 그은 위인임이 분명하다.
어록
| “ |
나는 대한제국의 신민으로서 우리 제국을 세상에 알리려 왔다. |
” |
— 시카고 컵스 입단 인터뷰 때
|
| “ |
오늘이 세상에서 두 번째로 좋은 날입니다.[2] |
” |
— 1908년 우승 때
|
| “ |
당장 간도로 건너가 내 불꽃패스트볼로 왜놈들의 머리통을 박살 내고 올 것이다.[3] |
” |
— 간도 참변 소식을 듣고 원통해하며
|
| “ |
나 혼자서 잘 벌고 잘 사는것은 너무나 부끄러운 일이다. 우리 조국을 위해서라면 나는 아낌없이 임시정부를 지원 할 것이다. |
” |
— 자신의 연봉 중 절반을 임시정부에 지원할 때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