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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외않되?

개요

대한민국 헌법 전문에 나올 정도로 의미가 있는 정의구현 혁명이다.

1960년 4월 이승만의 독재에 분노하던 시민들이 3.15 부정선거에 야마돌아서 죽창들고 일어나 이승만에게 민주주의의 참교육을 시전한 사건. 이승만은 여기에 놀라서 하와이로 도망갔다 객사했다. 사스가 런승만...

쉽게 말해서 탈조선스러운 사건이였다. (유럽은 졷같으면 맨날들고일어난다. 대신에 유럽 경찰의 공권력은... 말 안해도 알지? 그나라 경찰들은 말타고 곤봉으로 진압한다. 우리나라였으면 폭력경찰이라고 난리가 날꺼다)

배경

씨앗은 1950년대 초 이승만 정권의 농지개혁법때 뿌려졌다. 1946년 북한에서 무상몰수 무상분배 형식의 농지개혁이 이루어지자 남한 쪽 농민들의 불만이 터져 나왔고 미군정은 이 틈을 좌익 세력이 파고들 것을 우려해 소작료를 낮추는 등 갈등의 불씨를 잠재우고자 노력한다.

그리고 1948년 제헌의회 수립 후 이승만 정권은 대지주들이 주 지지세력이었던 한국민주당(한민당)을 약화시킬 필요를 느꼈다.

여기다 미군정은 소수 대지주들의 이득보다는 소농들을 지원해 정국을 안정시킬 필요가 있었으므로 농지 개혁에 긍정적인 의견을 피력한다.

이런 이해관게가 맞아떨어지면서 이승만은 강력한 농지개혁 추진자였던 죽산 조봉암을 농림부 장관에 앉히고 강력한 정책 드라이브를 건다.

유상몰수 유상분배 형식으로 1950년 4월부터 농지개혁이 시작되었고, 1농가당 3000평 이상의 땅은 소유할 수 없으며 나머지는 국가가 유상으로 매입해 소농들에게 지급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는데 지주들에게는 지가 증권을 대신 지급했다.

그런데 1967년까지 액면가대로 돈이 지급되긴 했는데 그만 1950년 6월에 전쟁이 터진 것

인플레이션이 일어나고 전쟁통에 증권을 멸실하는 등 증권의 가치가 폭락하면서 전통적인 지주 계층이 폭망했다. 봉건적 계급제가 무너진 것이다.

간단하게 말해서 당장 전쟁이 나서 필요한건 지 생명 보호할 먹고 살 식량과 옷가지인데 증권 종이가 중요한게 아니게 되었다.

이러한 배경 아래에서 '소 팔고 논 팔아' 자식 공부시키고 도시로 떠나는 농민들이 늘어나기 시작했고

이러한 환경의 혜택을 본 집안의 장남들이 고등학교 대학에 진학하여 4.19 혁명의 주역이 된다.

http://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1942075 4.19 혁명유공자중 하나인 안동일 변호사는 김재규의 변호를 맡기도 했다. 4.19 참여자들이 박정희에 동조했다는 건 한면일 뿐이고, 다른 면은 박정희 반대에 동조하거나 찬성하기도 했고 안동일 변호사가 그 예다.

참고로 정작 북한은 몰수 해놓고 분배하나도 안 했다. 사스가 북조선;;;


몇몇 급식충들과 역알못 새끼들이 착각하는게 3.15 부정선거는 대통령 부정선거가 아니라 부통령 부정선거였다.

당시 이승만은 조병옥이 위 수술받고서 뒤지는 바람에 단독출마로 이미 당선됐고 자유당에서 이기붕을 부통령으로 앉히기 위해 각종 수법을 동원해 부정선거를 치뤘다.

이승만이 부정선거가 일어난걸 몰랐다는 이야기도 있고 알고 있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아무튼 3.15 부정선거를 계획한 건 자유당이 맞다.

물론 이에 반대하는 각종 시위는 있어왔지만 헬조선 답게 그런일 없다 하고 두들겨 패잡는것으로 마무리 지어왔다. 고 김주열 열사의 시신이 마산 앞바다에 떠오르기 전까지는.

밑밥을 설명하자면 이렇다. 우선 2.28 운동이 있다. 이건 대구에서 고딩들이 정치에 관심 못 가지게 일요일에도 등교를 시키자 빡쳐서 들고 일어난 사건이다. 근데 그게 전국적으로 유행이 되어서 몇 천명이나 시위로 몰려오게 되었다. 참고로 빨갱이의 선동이라고 잡혔지만 대부분 풀려난다.

그리고 3.15 부정선거에서 1차 마산 의거가 일어나게 된다. 상황이 심각하게 격렬했는지라 몽둥이로 패고 물대포 던지고 최루탄 던지고 심지어 총까지 쐈다(시위대에게 총 쏜거 이거 최초다). 그 결과 8명 죽고 80명이 다치는데 이 중에 김주열이 있었다.

4월 11일. 김주열의 시신이 떠오른다. 시신은 왼쪽 눈에 최루탄이 정통으로 박힌 상태였고[1] 이 때문에 모친이 시신 인수를 거부할 정도로 충격을 먹었다. 이를 보러 온 사람도 수천명이었고 다들 빡쳐서 죽은 자식 살려내라고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이게 2차 마산 의거다.

4월 18일. 그동안 마산 의거가 만천하에 알려지게 되자 고려대에서 신입생 환영회를 가장한 집단 시위를 하게 되었다. 여기서 자유당이 경찰 뿐만 아니라 임화수 등 정치깡패들을 대동해서 진압하려고 하자 시민들까지 시위까지 가세하고 말았다. 경찰에 발포명령에 죽은 대학생도 있었다. 고대생은 아니지만.

이윽고 4월 19일. 서울대를 시작으로 전국으로 들고 일어나 혁명이 시작되었다. 이 날만 찝어서 피의 화요일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서울에서 100여명이 죽었고, 부산에서 13명, 광주에서 6명이 죽었다.

그리고 광주에 높은 분 새끼들은 4.19만큼은 마산보다 3시간 먼저 일어났다며 지들이 원조라고 지자체 차원에서 우겨대는대 위에 설명대로라면 원조는 경상도고 4.19의 시작은 서울대고 참여는 전국이니까 닥치고 있어라 홍어새끼들아.


하와이언 리에 대해 화가 난게 아닌 부통령 이기봉의 부정선거에 대한 시위라는 말도 있다. 근거는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하고 자택으로 갈때 시민들이 이승만 대통령을 연호하며 만수무강을 기원했다는 점이다. 그런데 이승만 동상 끌고다니는 시위대도 있었는데? http://archives.kdemo.or.kr/isad/view/00700224

시위대가 전체주의 집단도 아니고 어디서나 사상이 다른 건데 그런 게 일반화 근거가 될 리가 있나?

결과

이승만이 스스로 대통령직을 사임하고 하와이로 망명했다.

그대로 하와이에 있다가 1965년 7월 19일 하와이 호놀롤루에서 사망했다 이때 나이 90세 엄청나게 오래살았다.

4.19 혁명이 일어나고 4개월 후인 1960년 8월 12일 제2공화국이 성립됐고 민주당이 집권하여 대통령엔 윤보선, 국무총리엔 장면이 임명됐다.

정치는 대통령 중심제에서 영국, 일본처럼 내각 책임제로 바뀌었다. 실질적으로 윤보선은 허수아비인 셈

근데 4.19로 시민들이 자신감이 생겨서인지 데모에 재미가 들린건지 전국에선 4.19 정신을 부르짖으며 끊임없이 데모가 일어났다. 심지어 데모하지 말자고 데모를 할 정도. 이는 반인반신이 쿠데타를 일으키는 좋은 핑곗거리가 된다.

그리고 이승만의 반공 정책이 무산되자 시민들 사이에서 자체적으로 통일 운동이 일어났다. 민족통일전국학생연맹이 그 운동을 주도한 대표적 단체이다. 그들은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를 외치며 남북학생회담을 준비하는 등 급진 민족주의의 시초가 된다. 이들은 급진 민족주의(NL)의 조상이 되어 나중에 통합진보당이라는 거대똥의 조상님이 된다. 나중에 이 꼬라지를 보고 빡돈 박정희가 군사정변을 일으켜 이들을 전부 체포하지만 완전히 소탕하지는 못한다.

관련 문학

  1. 사태의 심각성을 말하자면 원래 최루탄은 걍 공중에 뿌려 광역 스턴을 먹이자고 있는 거지 직접 타격해서 죽이는 거 아니다. 근데 이걸로 저격으로 헤드샷해 죽인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