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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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Qwer123456 (토론)님의 2016년 3월 20일 (일) 19:11 판 (문비겸비는 아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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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의 직계후손이다.

조조빠들이 공융이 조조한테 개겼다고 완전 인간쓰레기로 만들고 청담 사상에 젖어 있어서 자기 혼자만의 세계에 빠져 사는 정신에 문제가 많은 위인이라고 헛소리를 지껄이는데 청담사상에 빠진건 조조의 양자 하안이고 조조 역시 도교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라고 기록되었다. 오히려 공융은 당시의 효가 형식에 치우쳐 제대로 된 효가 아니라고 비판한 사람이다.

뭣도 모르고 공융까는 정알못 새끼들에게 공융의 일화를 소개한다.

장검과 공융의 형 공포(孔褒)는 친구였다. 장검은 공포를 찾아왔다. 공포가 외출을 하고 없어서 장검은 공융이 16세의 어린아이에 불과하다고 생각하여 장검은 그 사실을 공융에게 알리지 않았다. 공융은 장검이 곤경에 처했다는 것을 알고 이렇게 말했다.

“형님이 지금 집에 계시지 않으니, 제가 혼자서 군을 위해 주인 노릇을 하며 대접을 하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그는 장검을 자신의 집에 숨겨주었다. 나중에 그 사실이 드러나자 국상(國相)은 몰래 명을 내려 잡아들이라고 했다. 장검이 도주하자 공융과 공포가 대신 감옥에 갇혔다. 공융은 말했다.

“집안으로 받아들여 숨겨 준 것은 저이니 제가 벌을 받겠습니다.”


“나에게 도움을 바라고 왔으니 죄는 나에게 있지 아우의 잘못은 아니다. 당연히 내가 벌을 받아야지.”


형제가 서로 죽으려고 다투자, 군현에서는 어떻게 처리를 할지 몰라서 상부로 보고했다. 상부에서는 공포에게 죄를 물으라는 조서가 내려왔다. 이 일로 멀리까지 공융의 명성이 자자했다.

평원(平原) 출신인 도구홍(陶丘洪), 진류(陳留) 출신인 변양(邊讓)은 공융과 더불어 인재로 이름을 날렸으며, 나중에 함께 관직으로 진출했다. 공융은 논리를 전개하거나 이치를 따지는 측면에서는 변양 등에 비해 부족했지만, 창의성과 박학에서는 그들보다 뛰어났다. 사도대장군(司徒大將軍)이 그의 재능을 보고 불렀고, 북군중후(北軍中候)가 되었으며, 호분중랑장(虎賁中郎將), 북해상(北海相)이 되었는데 이때가 28살이었다.


황건의 잔당이 모두 격파되고 성읍이 수복되자 학교와 상서(庠序)를 세우고 현명한 인재를 천거하여 유학자들이 세상에 진출하도록 했다.


팽구(彭璆)를 방정(方正)으로, 병원(邴原)을 유도(有道)로, 왕수(王修)를 효렴(孝廉)으로 추천했다. 고밀현(高密縣)에 고하여 특별히 정현(鄭玄)을 위한 마을을 하나 세워서 정공향(鄭公鄕)이라 부르기로 했다.


또 후손을 남기지 못한 사람들이나, 사방을 떠돌다가 죽은 사족들을 모두 나무로 만든 관에 넣어서 장례를 올려 주었다. 군민들 가운데 효행으로 이름이 알려졌다가 일찍 죽은 사람이 있으면 공융은 자신이 그를 돌보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며 곧 현에서 사당을 지어주도록 했다. 현자에 대한 그의 예는 이와 같았다

모두가 다 안량, 문추가 좆병신 잡장이라고 평가하는 와중에 혼자만 안량, 문추가 천하용장이라고 했는데 결국 연의에선 순욱의 의견을 받아들여서 애네를 좆병신으로 만들었다.

그러다 나중에 자기 군주인 조조한테 버림받다가 지좆대로 조조를 까댔는데 그게 조조의 분노를 사서 조조에게 죽었다. 삼국지연의에서는 공융이 조조한테 뒤지자 공자 후손의 대가 완전히 끊겨졌다고 조조 씨발새끼라고 했지만, 실제로 공융이 죽었다고 해서 절대로 공자의 대가 끊긴 건 아니다. 지금까지 공자의 후손들이 전세계 방방곡곡에 살아남아 잘 살고 있다.

공자의 77대손 공덕성이 대만에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