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가치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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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디시위키의힘 (토론)님의 2018년 12월 23일 (일) 15:36 판

상품의 가치는 노동에 의해 발생한다는 이론이다.

아이디어 자체는 중세시대부터 있었지만, 애덤 스미스에 의해 최초로 이론적 체계를 갖추게 된다.

이 후, 카를 마르크스의 저서 자본론에서 핵심 개념으로 쓰인다.


"노동이 가치를 창출한다면, 많은 노동이 투입되었는데도 결과물이 형편없는 경우는 어떻게 설명하죠?"라는 질문을 하는 경우가 있다.

노동가치설에서는 결과물의 가치가 낮을 경우, 그것에 투입된 노동의 가치도 낮은 것이라고 설명한다.

허공에 삽질을 한다고 해서 가치가 발생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예를들어, 똑같은 물건 C를 만들기위해 숙련된 노동자 a는 손쉽게 C를 만들었지만, 비숙련 노동자 b는 힘들게 C를 만들었다고 치자.

비숙련 노동자 b가 힘들게 C를 만들었으므로, b가 만든 C는 a가 만든 C보다 더 비쌀까? 그렇지 않다.

숙련된 노동의 가치가 비숙련 노동의 가치보다 높기 때문이다.

생존에 반드시 필요한 물은 값이 싸지만, 없어도 그만인 보석은 왜 값이 비싼걸까?

물을 얻는데는 많은 노동이 필요하지 않지만, 보석을 얻는데에는 많은 노동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물을 얻기 어려운 지역에서는 물의 값이 엄청나게 높아질 것이다. 물을 구하기 위해 많은 노동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손쉽게 탄소를 보석으로 합성할 수 있는 기술을 발명한다면 보석의 가격은 벽돌의 가격만큼이나 낮아질 것이다. 보석을 구하기 위해 많은 노동을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


비판

위에 설명을 보면, "상품의 가치는 노동에 의해 발생한다는 이론이다." 라고 정의해놓고서는

"노동가치설에서는 결과물의 가치가 낮을 경우, 그것에 투입된 노동의 가치도 낮은 것이라고 설명한다." 라는 말도 안되는 순환논증을 하고 있는 셈이다.

왜냐하면, 상품의 가격은 결국 한계효용에 따라 결정되는데 그럼 애초에 노동가치설을 주장할 근거가 없다는 소리이다.

상품의 가치를 노동투입량에 대한 함수로 표현해야 하는데, 이미 시장에서 결정된 가격을 가지고

"결과물의 가치가 낮으니까, 투입된 노동의 가치도 낮다." 라는 이상한 순환논증을 주장하고 있다.


y = 5x 라는 함수에서 y = 결과물, x= 노동투입량이라면, x에 따라서 y의 값을 정해야지, y=10 이니까, x= 2라는 어처구니 없는 순환논증이 되어버린다.

결과물의 가치를 논할거면, 애초에 노동가치설을 주장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노동가치설을 주장하지 않아도, 한계효용에 따라서 가격이 결정되는데 왜 굳이 노동가치설이 주장되는가?


저 설명대로 [가치] 가 실존한다는 것을 주장하게 되면 이상한 논리에 빠진다.

아프리카 TV에 어떤 유명한 BJ는 군대가기전에 쇼하면서 1시간에 2000만원씩, 5시간에 총 1억원을 땡겼다.

반면, 소방관은 사람을 구하고, 생명을 구하고, 사회에 좋은 일을 하는데 연봉 5000만원(?)이다. 실제 소방관이 수정바람.

그럼 "결과물의 가치가 낮으니까, 투입된 노동의 가치도 낮다." 라는 논리에 따르면 소방관의 노동이 인터넷에서 발가벗고 쇼하는 것보다 가치가 낮다는 말인가?

건물주가 한달에 1억을 버는 것은 반도체 생산직의 월급 300만보다 더 높은 가치의 노동을 하기 때문인가?


이러한 이상한 모순에 빠지기 때문에 현대 경제학에서는 애초에 [가치]라는 애매모호한 추상적인 당위성, 추상적인 개념을 폐기시켰다.

현대 경제학에 따르면 [상품의 가격] 이란 [각자 다른 상대방에게 주는 효용] 에 따라 가격이 정해지기 때문에

어떤 사람들에게는 소방관의 필요성보다는 인터넷에서 욕하고 발가벗고 쇼하는 BJ에게 가격을 더 높은 지불할 용의가 있다.

그래서 BJ가 군대가기전에 5시간만에 총 1억원을 벌게 된 것이다.


게다가 아프리카 TV에서 별풍선을 쏘는 놈이 있고, 안 쏘고 그냥 공짜로 보는 놈이 있다.

이 말은 누구에겐 그 방송이 공짜밖에 안되고, 누구에겐 그 방송이 1000원짜리 방송이고, 누구에겐 그 방송이 100만원 짜리 방송이다.

개개인이 느끼는 효용이 다르기에 이러한 현상이 발생한다.

[가치]라는 것은 실존하지 않는다. 오로지 현실에서 발생되는 [가격]이라는 현상만이 존재할 뿐이다.


비트코인이 6300달러라는 것은 비트코인에 투입된 노동의 가치가 6300달러라는 의미가 아니라, 그냥 매수자와 매도자의 균형일 뿐이다.

비트코인이 6300달러의 가치가 있느냐? 없느냐? 의 논쟁은 무의미하다. 실제로 거래되는 [가격] 그 자체만이 존재할 뿐이다.


같은 크기와 품질의 다이아몬드가 두 개 있다고 하자.

하나는 광산 입구에서 바로 발견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지하로 100미터를 파들어가 캐낸 것이다.

전자는 발견하는 데 노력도 위험도 없어서 비용이 들지 않았고, 후자는 채굴하는 데 많은 노동력과 위험이 수반돼 큰 비용이 들었다.

이제 이 두 다이아몬드가 똑같이 경매에 나왔다고 하자.

노동이 많이 들어간 후자의 가격이 전자보다 더 비싸야 하지만 실제로는 크기와 품질이 같기 때문에 두 다이아몬드는 같은 가격에 팔린다.


마르크스가 노동가치설을 주장하는 이유는 결국 "노동가치설"를 통해서 잉여가치설이 주장되기 때문이다.

잉여가치설은 궁극적으로 이윤은 자본가가 노동자를 착취한다는 이론으로 발전한다.

애초에 노동가치설 자체가 결국 "이윤은 자본가의 착취" 를 주장하기 위해 나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