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평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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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그대로 성 간의 평등을 뜻한다. 과거에는 남녀평등이나 양성평등 등의 용어들도 쓰였지만 성소수자 배제적이라는 비판 때문에 지양하는 추세다.

성평등은 대개 온건한 입장과 급진적 입장으로 나뉘는데, 온건한 입장은 보완주의로 불리며 남성과 여성은 서로 동등하지만 각자의 성역할에 충실해야한다는 것이고, 급진적 입장은 성역할 자체가 차별적이라며 거부한다.

페미니즘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당연히 래디컬 페미니즘 따위와는 문제가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성평등의 역사에서 페미니즘을 완전히 분리할 순 없다.

전체적 경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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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적으로 성평등 운동은 프랑스 혁명이 큰 계기가 됐다. 사실 프랑스 혁명 시기에 진정으로 성평등이 실현되진 않았지만 그럼에도 간접적으로는 가부장적 질서를 해체할 수 있다는 발상을 줬다. 19세기에 주로 사회주의가 성평등 운동을 주도했고, 평등한 참정권이 주된 문제가 됐다. 서구에서 제1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참정권에서의 성차별이 해체됐고, 러시아 제국에서는 러시아 혁명을 통해서 성차별이 해체됐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1948년 세계 인권 선언에서 성차별을 금지했다. 그러나 21세기에 들어서는 전세계적인 우경화 흐름과 더불어 쇠퇴하는 모양새다.

고전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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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그리스에서는 스파르타가 특이하게도 시민 간의 성차별이 부재한 편이었다. 아테네의 경우 플라톤이 『국가』에서 능력제를 우선시하면서 성차별에 부정적인 주장을 했었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가 노골적으로 남성우월주의를 주장하면서 이를 뒤집었지만, 다른 한편으로 아리스토텔레스 측과는 대립하던 견유학파, 에피쿠로스학파가 성평등한 면모를 보였다.

서유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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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몽주의 시대에는 성평등을 긍정하던 계몽사상가도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계몽사상가도 있었다. 프랑스 혁명 초기에 여성들이 혁명에서 상당한 역할을 맡았지만 정작 시민으로 법적으로 인정된 것은 남성 뿐이었다. 이에 1791년 구즈가 『여성 권리 선언』을 발표하면서 항의했지만 구즈는 1793년 처형당했고 여성은 정치참여가 금지당했다.

그럼에도 성평등 운동은 계속됐는데 초기에는 공리주의 및 사회주의 사상가들이 주도했다. 20세기 초에 여성 참정권 운동이 정점에 달했고 제1차 세계대전 후 실현됐다. 특히 바이마르 헌법에서는 헌법 차원에서 성평등을 명시했다. 이후 잠시 파시즘과 반동주의가 득세하긴 했지만 얼마 안 돼 몰락했고 관련 지역에서 성평등이 복원됐다.

동유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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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제국에서 체르니솁스키가 성평등을 주장한 것을 계기로 인민주의자들 사이에서 성평등 담론이 급속도로 확산됐다. 이후에는 마르크스주의자들도 가세했다. 3월 혁명 이후 집권한 임시정부에서 성평등을 법제화했는데, 이는 서구보다도 앞선 결정이었다. 이후 11월 혁명으로 집권한 볼셰비키는 이런 경향을 더욱 과격화했다.

스탈린 시기에는 자본주의가 철폐됐으니 성차별도 더는 없다면서 여성위원회를 폐지하는 등 성평등주의가 퇴조했지만, 명목상으로는 계속됐다. 제2차 세계대전 후에 동유럽의 대부분을 공산주의자들이 장악했는데, 이들 역시 명목상으로나마 성평등을 주장했다. 그러나 탈공산화 이후 러시아, 폴란드 등에서는 성평등주의가 더욱 쇠퇴하는 편이다.

아메리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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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즈텍 제국에서 성차별 없이 군사교육을 진행했었다. 이후 유럽인들이 침략한 뒤에는 당연히 수백년간 가부장적 질서가 계속됐었다. 그러다가 미국 혁명을 계기로 점차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했는데, 토머스 제퍼슨이 성평등한 교육을 지원했다. 제1차 세계대전 후에는 미국에서 백인 여성에 대한 참정권이 부여됐지만, 유색인종 여성까지 참정권을 온전히 부여받는 것은 1960년대가 계기였다. 다른 한편으로 1946년부터 1955년까지 아르헨티나에서 집권한 후안 페론 정부가 여성 참정권을 부여했다.

오스만 제국의 경우 청년 튀르크당 집권 시기부터 이미 성평등 정책을 시행하기 시작했다. 튀르키예 공화국이 설립된 이후에는 더욱 급진적인 성평등 정책을 실현해서 현재까지 계속되고 있다.

팔레스타인에서는 제1차 세계대전 직후인 1919년부터 이미 유대인 공동체 내부에서 여성 참정권 논의가 본격화됐다. 하레디는 반대했지만 결국에는 여성 참정권이 인정받는 것으로 결론났고, 이스라엘 건국 선언에서부터 성평등을 선언했다.

1960년대에 시리아, 이라크에서 집권한 바트당 역시 성평등 의제를 추진했다. 그러나 이런 국가들 모두에서 시간이 갈수록 성평등주의가 퇴조하는 모양새를 보이다가 결국 전쟁으로 정권이 멸망했다.

아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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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까지 여성의 정치참여를 계속해서 금지하다가, 전쟁에서 패배한 이후인 1945년 12월에 마침내 여성 참정권을 인정했다.

태평천국 운동이 만민평등의 일부로 성평등을 주장했다. 태평천국 운동은 망했지만 이후에 캉유웨이같은 계몽사상가들이 성평등주의를 계승했다. 이후 쑨원같은 혁명가들이 역시 성평등을 주요 의제로 삼았다. 공산화 이후에는 마오쩌둥이 여성이 하늘의 절반을 든다면서 이런 경향을 더욱 강조했지만, 여타 공산권에서처럼 결국 여성동원을 위한 성격이 컸다. 문화대혁명 종식 후에는 국가 차원에서의 성평등주의가 갈수록 퇴조하는 모양새다.

한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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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이 개항하기 전인 1860년에 창시된 동학에서 이미 성평등을 주장했다. 동학은 천도교가 계승하는 한편 동학에 영향받은 원불교 역시 성평등을 내세워서 인기를 끌었다. 또한 대한민국임시헌장에서 이미 성평등을 법제화했다. 분단 이후에는 남북한 모두 각자대로 성평등을 주장했고 한국전쟁 시기에는 남한군과 북한군 모두 여군이 동참해서 교전했다.

이후 남한의 경우 2000년대에 호주제가 폐지됐다. 기존의 남성 어른 호주를 기반으로 한 호적제를 2007년까지만 유지하고 2008년부터 오늘날 우리가 아는 남녀 누구든 기준이 될 수 있는 가족관계증명서를 발급받을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출생아 인명 통계 같은 걸 보면 2008년생부터만 나오고 호적제 기반이었던 2007년생까지는 반영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