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산드르 솔제니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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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 성립에서부터 해체까지 전기간을 살았던 러시아의 작가.
원래는 무신론자에 공산주의자였다. 1930년대의 각종 사태들을 보면서 스탈린 정권에 회의적이게 되긴 했지만, 여전히 스스로를 레닌주의자로 여겼다. 대학교에서 이과 전공이었고 나중에 문학을 따로 전공하려 했으나 독소전쟁이 발발하자 즉시 자원했다. 이 때 나이가 23세에 불과했다. 이후 4년 가량 최전선에서 뛰는 와중에 주변 군인들이 계속해서 체포당하는 사태를 보면서 회의감이 더욱 커졌고, 자기 친구에게 보낸 서신에서 스탈린을 '수염남'같은 별명으로 부르며 까다가 발각돼서 곧바로 숙청당하고 굴라그에 8년형을 선고당했다.
굴라그에서 솔제니친은 온갖 인간군상을 만난다. 그 중에 열성적인 공산주의자들도 있었는데 이들은 자신들의 피숙청을 단순 실수 정도로 취급하면서 체제를 자발적으로 변호했다. 이런 행태에 솔제니친은 오히려 공산주의 자체를 의문시하게 된다. 여타 숙청당한 인물들에게서는 레닌의 만행들, 내부당원들의 사치와 위선 등에 대해 듣게 됐다. 그리고 크리스천들을 만났는데 그들이야말로 오히려 무신론자들에 비해 더 고결하게 살고 있다고 간주했다. 또 자기 인생을 반성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부도덕한 행적을 깨닫고 선악은 인위적 구분이 아니라 개인적 양심에 따르는 것이라고 여겼다. 굴라그 생활 후기에는 암 투병을 했는데 그 와중에 신앙에 더 의존하게 됐고 결국 기독교로 개종했다. 그러나 수용소 생활 중에는 반체제 성향을 되도록 숨겼다. 형기가 끝난 1953년에는 우연히도 스탈린이 사망했고, 급속히 자유화가 진행됐다.
1956년 흐루쇼프의 당대회 연설과 함께 본격적인 스탈린 격하가 진행됐다. 그 일환으로 흐루쇼프는 솔제니친이 자기 목적에 유익한 인물이라고 여겨서 직접 만나기도 했고,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를 공식 허가하기까지 했다. 이 때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가 출간되자마자 솔제니친에게 수많은 반체제 인사들의 서신이 전해졌고, 솔제니친으로 하여금 소련 체제의 취약성을 믿게 했다. 하지만 흐루쇼프 정권에서 기독교 탄압이 계속되는 것을 보면서 솔제니친은 여전히 정권에 부정적인 태도를 견지했다. 특히 수용소에서의 수감 기록들이 전부 불태워져버리자 솔제니친은 이를 증거 인멸로 간주하고 비밀리에 『수용소 군도』를 집필하기 시작했다.
1964년 흐루쇼프가 실각하고 브레즈네프가 집권하면서 상황이 급속히 악화됐다. 브레즈네프가 솔제니친을 탄압하면 솔제니친은 굴하지 않고 더욱 과격화되는 악순환이 벌어지는 것이다. 더욱이 이 시기부터 소련 당국이 솔제니친이 기독교로 개종한 탓에 회유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른 한편으로 이 시기 솔제니친은 전처와는 최종적으로 결별하고 대신 21살이나 연하인 나탈리아와 재혼했다. 이후 아들을 셋이나 가졌는데 이 때 그의 나이는 무려 50대였다. 이 사실을 주시하던 소련 당국은 전처로 하여금 솔제니친의 인격과 저작을 폄하하게 만드는 공작을 폈다.
1969년에는 소련작가연맹에게서 제명당했는데, 이에 대해 버트런드 러셀이 항의했었다. 1970년에는 노벨문학상을 수상했지만 소련 측이 수상을 막으려고 했다. 1971년에는 KGB 수장이었던 유리 안드로포프 측은 솔제니친 암살을 시도하기도 했지만, 끝내 실패했다. 추방당하기 직전에는 아예 소련 지도자들에게 공개서한을 보내서, 핵심적으로는 더는 소련의 그 누구도 진정으로 공산주의를 믿지 않으니 기득권은 유지하되 공산주의는 갖다 버리고, 그렇게 중국과의 대립을 피하라고 주장했다. 당연히 소련 당국은 이를 아주 조금도 받아들이지 않았고, 1974년에 솔제니친은 시민권이 박탈당하고는 서독으로 강제추방당했다. 이 역시 안드로포프 측이 주도했다.
초기에는 서독과 스위스 등지에서 생활했는데 이미 서구 언론의 저속함에 환멸을 느꼈다. 결국에는 미국 버몬트로 이주했다. 그러나 살아생전에 소련 멸망을 볼 수 있으며 그 이후에 귀환할 것이라고 정확히 예측하고 있었기에 시민권 취득을 하려고 하진 않았다. 1978년 하버드 대학교에서 연설을 했는데, 이 때 관중들은 솔제니친이 서구 자본주의와 민주주의 등을 옹호할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솔제니친은 정반대로 그런 가치들을 강력히 비판했다. 이로 인해서 서구에서의 그의 인기는 영구적 손상을 입었지만 그럼에도 그는 자기 입장을 평생토록 고수했다.
이 시기에는 러시아 현대사를 전면적으로 재구성하는 작업을 벌였고, 서독의 문서를 통해 레닌이 독일의 금전적 지원을 받은 사실 등을 확인했다. 또 백계 러시아인들의 후손과도 적극 교류했다. 1985년에는 소련에서 솔제니친에 대해 긍정적 견해를 가진 고르바초프가 집권했고, 솔제니친의 저작들이 다시 허가받기 시작했다. 1990년에는 소련 시민권까지 복권됐지만 솔제니친은 여러 이유로 즉각 복귀하지는 않았다. 소련이 해체되고 있을 때에는 나머지 공화국들은 스스로 탈퇴하게 두되 동슬라브에 속하는 러시아, 우크라이나, 벨라루스는 서로 함께하자는 식의 주장을 펼쳤다. 소련이 해체된 지 3년째였던 1994년에 마침내 귀환했다.
귀환 후에는 혼란과 파탄에 빠진 러시아의 실태를 목격하면서 깊은 환멸을 느꼈다. 이 탓에 말년에는 블라디미르 푸틴을 지지했고 푸틴 역시 솔제니친을 애국자라고 부르며 찬양했다. 2008년에 89세로 사망했다.
솔제니친은 20세기의 참상의 가장 중대한 원인이 바로 다름아닌 세속적 인본주의 때문이라고 간주했다. 세속적 인본주의 기성 종교를 거부하고 나면 세속적인 가치관이 필요하게 되는데, 이런 가치관은 인간의 자체적 한계로 인해 폭력에 대한 욕망을 결국 용인하게 되고, 또한 스스로를 영구화하기 위해서는 결국 폭력에 의존하게 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폭력은 초기에는 효과적일지라도 급속히 스스로의 정당성을 잃게 되고, 이를 만회하기 위해서는 거짓이 필요한데, 이런 거짓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결국 더 큰 폭력이 요구되는 악순환이 벌어진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런 악순환이 심화될수록 요구되는 것이 무한히 불어나기 때문에 오히려 겉보기에 사소한 불신과 거부야말로 치명적인 위협이 되며 따라서 정직한 삶만으로도 전체주의 체제를 무너트릴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공산주의와 같은 '절대악'에 대해서는 폭력적 저항이 필요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물론 소련 시민들에게는 가급적이면 비폭력적으로 저항할 것을 요구하긴 했지만, 망명 생활 중에는 데탕트 정책과 반전운동 등을 비판하기도 했다. 그리고 소련의 만행에 책임있는 자들 상대로 또 다른 뉘른베르크 재판을 열어야한다는 식의 주장을 펼치기도 했고, 사형제 역시 옹호했다.
마르크스주의에 대해서는 그 진정한 동기는 착취와 억압의 철폐 따위가 아니라 신에 대한 증오, 인간중심주의이며 그런 사상의 가장 일관된 최종단계라는 식으로 주장했다. 그리고 마르크스, 엥겔스, 레닌, 스탈린으로 이어지는 계보는 우연이나 탈선이 아니라 지극히 논리적인 귀결이라고 주장하면서, 레닌을 스탈린으로부터, 혹은 마르크스를 레닌으로부터 단절시키려는 식의 주장들 일체를 부정했다. 또한 공산주의는 '반(反)인간'이기 때문에 인간으로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이미 공산주의에 반대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반공주의라는 명칭은 불필요한 것이라고 거부하기까지 했다.
다른 한편으로 파시즘도 인간중심주의의 산물로 취급했고, 서구 자본주의 및 자유주의도 전혀 좋게 생각하지 않았다. 또한 대혁명은 반드시 사회를 훨씬 더 악화시키기만 한다고 주장했다. 다만 민주제를 완전히 부정한 것은 아니고, 탈중앙화된 자치제도를 지지했다. 사유재산 역시 인간의 본성이라고 주장하며 지지했다.
그러나 소련의 교조주의에 대항하는 과정에서 솔제니친 자신도 상당히 교조주의적이게 됐다. 그래서 소련의 업적들에 대해 전부 조작됐거나 무의미하다는 식으로 부정했고, 레닌 등을 긍정적으로 평한 인물들의 증언도 전부 기만당했거나 기만하는 것이라는 식으로 취급했다. 그리고 1950년대쯤에 정립한 핵심적인 주장들을 평생토록 고집했다.
민족 구분을 일시적인 것으로 여긴 기존 마르크스주의자들과는 반대로 솔제니친은 기본적으로 민족은 실재하는 집단이라고 주장했다. 이와 함께 솔제니친은 러시아인들은 공산주의의 가해자가 아니라 오히려 공산주의의 '최악'의 피해자라고 주장했다. 이를 기반으로 해서 홀로도모르의 특수성을 부정하기도 했다. 또한 볼셰비키가 국경선을 자의적으로 그어놨다면서 크림 반도, 돈바스와 같은 러시아인 다수 지역을 우크라이나령으로 한 것을 거부했고, 북카자흐스탄에 대해서도 같은 입장이었다.
유대인들에 대해서는 더욱 논란이 된 주장들을 펼쳤다. 그는 러시아 제국에서 유대인들이 얼마나 고통받았을지언정 러시아인들보다 더 큰 고통을 당한 것은 아니라고 주장했다. 또 유대인들과 러시아인들은 공산주의에 대해 '동등한' 책임이 있으며, 소련 치하에서 유대인들에 대한 탄압을 주도한 것은 다름아닌 유대인 공산당원들이라는 식으로 주장했다.
솔제니친은 기본적으로 러시아사에 거의 모든 관심을 기울였기 때문에 역사적 주장들도 대부분이 러시아 관련이다.
17~18세기에 걸친 러시아의 서구화 정책들이 이후로도 러시아 사회를 서서히 세속화시켰으며 그 결과 공산주의의 원흉이 됐다고 주장했다. 또한 1861년의 러시아 농노해방령은 문제투성이였으며 공산혁명의 구실이 되고 말았다고 평했다.
니콜라이 2세는 무능했을지언정 폭군은 아니었으며 백성들을 사랑했다고 주장했다. 스톨리핀 총리의 정책들을 고평가하면서 성공했다면 국가를 더욱 발전시키고 공산혁명을 피할 수 있었지만, 기득권과 급진파 모두에게 외면받아 실패했다고 주장했다. 러시아의 제1차 세계대전 참전은 망국의 원인이 됐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는 식으로 두둔했다.
러시아 임시정부는 급진적이었지만 동시에 무능했으며 역시 공산주의를 제대로 저지하지 못했다고 여겼다. 코르닐로프에 대해서는 애국자였지만 정치감각이 부족했다고 평했다. 11월 혁명의 초기 정책들에 대해서는 전쟁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철회된 것이 아니라 애초부터 기만책이었다는 식으로 주장했다. 러시아 백군도 무능했기 때문에 결국 볼셰비키가 승리한 것이며, 따라서 공산혁명의 승리는 필연적인 것이 아니라 악재가 끊임없이 덮치면서 벌어진 것이라고 주장했다.
1920년대 소련의 주요 반대파 집단들에 대해서는 모두 결국에는 레닌주의 성향이었기 때문에 스탈린주의에 대한 진정한 대안이 되지 못했다고 부정했다. 또한 1928~1932년의 제1차 5개년계획으로 인해서 온갖 참상들이 벌어지자 시민들이 급속도로 공산주의에 대한 환멸을 느끼게 됐다고 주장했다.
1941년 독소전쟁이 발발했을 때 소련 당국이 공산주의 이념으로 시민들을 결속시키는데 실패하자, 보다 애국주의적이고 민족주의적인 수사들을 쓰기 시작하면서 그 자신도 서서히 공산주의에 대한 진정한 헌신을 버렸다고 평했다. 추축국에 가담한 과거 소련군들에 대해서는 소련이 전쟁 이전에는 물론이고 이후에도 군인들에 대한 부조리한 탄압과 숙청들을 계속해서 벌였기 때문에 가담한 것이지 정말로 파시즘 등에 동조해서 그런 것은 아니라고 주장했다. 이를 두고 소련 당국은 솔제니친은 반역자, 파시스트라는 식으로 선동했지만 솔제니친은 그런 주장에 반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