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정군사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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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scal-Military State

유럽의 근세에 있었던, 체계적인 관료제와 비전시에도 군인들을 두는 상비군 체제를 둔 국가들을 말하는 표현이다.

흔히 절대왕정이란 표현으로 알고 있는 그 나라들이다.

하지만 절대왕정이라는 개념이 날이 갈수록 유럽의 근세사(특히 영국이나 네덜란드)를 설명하는 데에 한계를 보이게 되어 재정군사국가라는 표현으로 대체되었다. 절대왕정이라는 단어는 (중세 시대 군주들의 약했던 왕권에 비교되는) 군주의 강력한 왕권에만 집중하기 때문이다.

2022 개정 교육과정세계사에서는 본격적으로 이 개념을 도입해 유럽 근세사를 설명한다고 한다.

알다시피 1492년 스페인이 아메리카를 발견하면서 16세기 전에는 상상도 못했을 엄청난 규모의 떼돈을 벌게 된다.

중세 유럽은 왕이 아닌 영주가 직접 세금을 걷던 시대였는데, 스페인이 새로 얻은 식민지는 왕의 직속 영토였기에 식민지에서 벌어들인 돈은 바로 왕의 계좌로 꽂혔다.

재정을 굴리는 데에 있어 영주들의 영향력은 날이 갈수록 추락하고 왕의 직접적 영향력이 압도적으로 강해진 것이다.

왕이 이렇게 갑자기 벌어들인 국가 단위의 떼돈을 굴리는 행위, 즉 재정을 잘해야만, 특히 군대에 투자해야만 유럽에서 강대국으로 군림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중세 유럽의 또다른 특징은 지금처럼 전쟁이 안 일어나도 훈련받고 복무하는 상비군이 거의 없었다는 것이다. 비전시에 기사들은 그냥 놀고 먹으면서 농민들 착취하는 게 일상이었다. 할 일이 너무 없어 깽판을 부리고 다니는 기사들도 많았는데 돈키호테가 바로 이런 시대상을 반영해 쓰인 것.

기존에는 영주가 기사들에게 돈을 주고 기사들이 영주를 위해 전쟁에 나섰으나, 이제 떼부자가 된 왕 입장에서는 굳이 전쟁 상황이 아니어도 군인들에게 급여를 주는 것이 가능해졌고, 이렇게 항상 자기를 위해 일하는 군인들이 있으면 주변국들이 절대 넘보지 못할 것이었다.

이렇게 유럽의 국가들은 갈수록 상비군이라는 것을 갖추게 되었고, 유럽의 국방은 전시에만 싸우는 기사에서 비전시에도 훈련받는 군인들 위주로 돌아가게 되었다.

더 강한 군대는 더 많은 영토 확장과 전쟁 승리, 더 많은 돈을 의미했다. 그리고 그렇게 번 돈은 더 강한 군대를 만들 수 있으니 개이득이 되는 것이다.

이것을 바로 '재정-군사 국가'라고 부른다.

물론 이는 18세기쯤 가서 한계가 드러나게 된다. 18세기 당시 유럽에서 가장 강한 재정군사국가는 프랑스 왕국이었다. 하지만 돈이 많아도 너무 많았던 루이 14세의 엄청난 플렉스로 인해 프랑스의 재정이 조금씩 거덜나기 시작했다. 결국 18세기 후반쯤 되면 프랑스는 빚쟁이 국가로 추락해버리고, 이는 프랑스 혁명을 초래해 왕과 귀족이 주도하는 재정군사국가에서 평민들이 주도하는 민족주의 국가로 이행한다. 이는 다른 말로 '국민 국가'라고 번역되기도 한다.

영국은 의회 중심이라라서 국왕 중심의 프랑스와는 다른 양상을 띠었지만 어쨌든 재정과 군사를 강구하는 수단만 다를 뿐 재정군사국가였으나 제1차 산업 혁명으로 인해 자본가들의 영향력이 강해지고 체제는 조금씩 자본주의로 대체되어갔다. 그리고 자본주의가 더 돈이 된다는 걸 깨달은 영국은 시장을 넓히기 위해 제국주의 국가인 대영제국으로 거듭난다.

이렇게 18세기에 민족주의와 자본주의, 제국주의라는 개념이 생겨나면서 재정군사국가들은 하나둘씩 사라지게 된다.

기존에는 자기가 어느 나라의 국민임을 의식하지 않았지만 민족주의 국가에서는 모든 국민들이 '나는 이 나라와 민족의 국민이니까 우리 민족을 위해 군인으로 일해야지'라는 마인드를 장착하게 되었고, 더 많은 군인들을 싸게 부려먹을 수 있게 되어 재정군사국가의 상비군은 근대 민족주의 징병제 국가의 국민군으로 변화했다.

자본주의 국가에서는 국가뿐만 아니라 돈이 많은 개인의 역할이 매우 중요해지기 때문에 국가가 굳이 열심히 돈을 벌 필요가 줄어든다. 따라서 국가는 강해진 군대를 통해 식민지를 마련해주기만 하면 되고 그곳에서 떼돈을 벌어 나라의 경제를 활성화시키는 건 자본가들이 알아서 해주면 된다.(이렇듯 야경국가가 이 시기의 대세였으나 독과점의 폐해가 심해지고 여러 차례 공황이 반복되다가 훗날 대공황까지 오면서 정부가 경제에 개입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민족주의와 자본주의로 똘똘 뭉친 19세기의 이 '표독한' 근대 국가들은 이전 재정군사국가 시절보다 더 많은 돈을 벌고 자기들 민족의 위대함을 증명하기 위해 다른 대륙의 국가들을 침략하기 시작, 제국주의 국가로 거듭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