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이동

토론:독립

새 주제
K-위키
주의. 이 문서는 중증 파오후 일뽕이 작성하였으며 일뽕 그 자체를 다루무니다.
이 글에는 아마테라스 츠쿠요미의 은총과 씹덕의 향기가 가득하무니다.
이 글은 친일성향을 띠는 방사성 물질인 세슘이 존나 함유됐으무니다.
만약 당신이 제정신인 갓한민국의 애국자라면 이 글이 매우 역겨울 수 있으니 주의하시기 바라무니다.
○○짱 카와이하다능... 쿰척쿰척

틀:엾

지난 1957년 프랑스 대통령 드골은 아프리카에 있는 프랑스 식민지 13개국을 독립시킨 바 있는데, 당시 이 식민지들은 모두 프랑스의 일부로 남아 있을 것인지 아니면 독립할 것인지를 투표에 의해 선택할 기회를 가졌다. 결과는 13개국 모두 독립을 선택했다.

그러나 오늘날 어떻게 하든 프랑스 땅을 밟기 위해 목숨을 걸고 밀항을 시도하고 있는 이들 지역의 젊은이들은 과거 자신들의 조상들과 부모가 내렸던 결정을 어떻게 생각할 것인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만약 당시 한두 나라라도 독립을 거부하고 프랑스의 영토로 남아 있었다면 이들은 주변 아프리카의 국가들보다 훨씬 나은 삶을 누릴 수 있었을 것이며, 최소한 프랑스로 자유로이 여행하고 이주할 수는 있었을 것이다

후진국에게 있어 독립이란 항상 달콤하고 멋진 정치구호이지만 대체로 권력을 장악하고자하는 독립 운동가들에게만 이익을 줄 뿐, 주민들에게는 손해를 끼치는 선택인 경우가 많은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과거 1919년 3.1 독립운동에서 아무런 실익도 없는 자주독립을 선동한 사람들과 세계정세를 볼 때 독립은 아무 실익이 없으니 자중할 것을 호소한 이완용 백작 가운데 어느 쪽이 옳았는가를 다시 한번 생각해보아야 한다

카리브해에는 푸에르토리코라는 이름의 조그마한 섬나라가 하나 있는데, 이곳은 지금 미국의 연방에 편입될 것인지 아니면 계속 자치령으로 남아있을 것인지를 선택하는 문제로 갈등을 겪고 있는 곳이다. 이웃한 멕시코나 쿠바에서 하루에도 수천 명의 사람들이 국경을 넘고 험한 바다를 건너 미국에 밀입국하려 시도하는 것을 감안하면, 이것은 일종의 행복한 고민이다.

19세기 말까지만 해도 스페인의 영토였던 푸에르토리코는 1898년 미국이 군대를 보내 스페인을 물리치고 섬을 점령함으로써 미국의 영토가 되었다. 이후 미국이 100년 동안 통치한 결과 가난한 농업국이었던 푸에르토리코는 선진공업국으로 변모했고 현재 1인당 국민소득이 1만 달러가 넘는 중남미에서 가장 잘사는 나라가 되었다.

그런데 이런 나라에도 미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위해 무장투쟁을 하는 게릴라들이 있다. 푸에르토리코의 민족해방군은 아직도 밀림 속에서 자주독립의 그 날을 꿈꾸며 세계최강의 미군을 상대로 열심히 싸우고 있으며, 주민들 가운데에는 이들에게 돈과 식량 등을 지원해주는 사람들도 있다는 것이다. 이들은 아마도 과거 조선의 독립 운동가들과 마찬가지로 미국에 의해 푸에르토리코가 약탈당하고 있기 때문에 자주독립을 이룩하는 것만이 미래를 위한 유일한 선택이라고 주민들을 선동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제3자의 시각에서 푸에르토리코를 보면, 미국의 통치를 받지 않았다면 아직도 그저 라틴아메리카의 거지 국가들 가운데 하나로 남아있었을 이 나라에서 왜 독립운동을 하는 것인지 이해하기 힘들 것이다.

따라서 국익이라는 것이 지배자의 이익이 아닌 주민의 이익을 말한다고 할 때, 현재의 나라를 과거의 나라보다 만족하고 주민이 보다 더 인간적인 삶을 누리고 높은 삶의 질을 향유할 수만 있다면 나라를 잃거나 유지한다는 명제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다

과거 조선의 독립 게릴라들은 지금의 푸에르토리코 민족해방군과 비슷한 존재들로 평가될 수 있을 것이다. 한일합병은 대다수 조선인들에게 좋은 일이었겠으나 그에 저항했던 독립 게릴라들은 그들이 받은 유교 교육의 영향으로 인해 과거 조선왕조에 향수를 갖고 있거나 아니면 '독립'만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잘못된 사고방식을 지니고 있었다고 하겠다

1945년 일본이 패망했다는 소식에 거리로 뛰어나와 기뻐했던 조선인들이 이후 그들 앞에 펼쳐질 분단과 전쟁과 가난이라는 참혹한 미래를 조금이라도 짐작할 수 있었다면 그처럼 기뻐할 수 있었을까. 실제로 일본이 패망한 뒤, 한반도에 거주하던 일본인 60만 명은 모두 썰물처럼 일본으로 귀국했지만 일본에 거주하던 조선인 100만 명은 거의 귀국하지 않고 아직도 일본에서 살아가고 있다.

해방이 아니라 재앙의 시작이었다. 연합국은 이미 2차대전이 끝나기 직전 일본이 메이지유신 이후 취득한 모든 해외영토를 몰수한다는 원칙을 세우고 일본을 처리했기 때문에 한반도가 일본에서 분리되는 것은 당시 조선으로서는 불가항력이었을 것이다. 그 조치에 따라 구 일본은 사할린, 남북한, 대만, 일본열도의 5개 지역으로 분할된 것이다.

일본으로부터의 분리가 어쩔 수 없었다면 남북한은 전후 모스크바 3상 회의에서 미국과 영국, 소련이 결정한 5년 신탁통치 안이라도 받아들였어야 한다. 당시 남북한의 좌익은 모두 신탁통치를 찬성하는 입장이었지만 김구 이승만 등 우익들이 반탁운동을 고집하는 바람에 한반도의 분단은 고정되고 말았다. 신탁통치를 받아들였으면 강대국의 힘을 빌어 현대적인 법체계와 정치 경제체제를 정비하는 과도기를 거쳐 일본처럼 통일국가로 독립할 수 있었을 것 아닌가 말이다.

그리고 더 현명한 선택은 조선 스스로가 일본의 일부라고 주장하면서 독립을 거부하는 것이었다. 국가니 민족이니 독립이니 하는 허황한 개념들을 버리고 개인의 자유개념으로 바라보면서 지난 100년의 역사를 새로이 바라본다면 우리는 [독립]이라는 이데올로기의 일그러진 모습을 만날 수 있게 될 것이다

위의 분 이야기 할 거 있는데,

[원본 편집]

푸에르토리코의 예를 들었지만, 오히려 일제시대의 한국은 지금 중국 지배하의 티베트랑 더 비교를 할 수 있습니다.

처음 티베트는 중국과 호의적이었지만, 중국의 대약진 운동 등의 삽질로 중국과의 관계과 나빠지기 시작했고, 중국 공산당이 처음부터 실시한 정책은 독립을 방지할 목적으로 강제동화정책을 실시했습니다. 티베트어로 된 경전은 불태워졌고, 승려들은 강제로 환속해야 했으면, 거부하면 총살되었습니다. 티베트어도 중국어로 가르쳤고요.

2. 더 잘 살았다고요?

다음은 1989년 라싸 폭동에 대한 중국 공산당원들의 증언입니다.

티베트인 청년이 중국인민무장경찰에게 돌 2개를 던졌다. 부소대장이 물었다. "저놈을 패야 하지 않습니까?" 돌멩이 하나를 다리에 맞은 부대대장이 명령을 내렸다. "패라!" 그러자 부소대장은 무장경찰 3명을 이끌고 돌을 던진 티베트인을 쫓아갔다. 티베트인들은 일반 티베트 가족이 사는 집으로 뛰어 들어갔다. 중국인민무장경찰은 문을 차고 들어가 모든 거주자를 사격으로 싹슬이했다. 가족 6명이 모두 죽었다. 가족 중 막내는 겨우 11세였다. 그러나 돌을 던진 티베트인은 벽을 타고 올라가 도망쳤다. 무장경찰은 그의 뒤를 쫓아가 다리에 총상을 입혔다. 그러자 한 무장경찰이 부리나케 달려가서 자신의 총을 들어 티베트인의 머리에 대고 발사했다. 그런데 소총이 갑자기 오발되어 그 뒤에 있던 무장경찰 하나가 목에 총상을 입고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병사가 죽는 것을 보고 분노한 부소대장은 돌을 던졌던 티베트인의 머리를 때렸고, 티베트인 청년의 머리가 깨져 뇌가 밖으로 쏟아졌다. 이 티베트인 청년이 중국인민무장경찰에게 총으로 구타당했을 때,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자신의 집 문간에 서있던 한 티베트인 가족 6명이 '살인자! 살인자!'라고 외쳤다. 부소대장은 경기관총을 들더니 가족을 향해 기관총을 쏘아대 모두 죽여 버리고 말았다.

요약하면, 시위 중에 돌멩이 하나 던졌다고 총으로 쏴 죽이고, 가족까지 찾아가 어린아이까지 총살한 중국 경찰들. 우리나라 일제 강점기때, 한국인들에게 일본이 했던 짓을 떠올려야 합니다.

이런데도 독립운동을 하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