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해 병신들아

편집

편집해서 없애도 또 세우고, 없애도 또 세우고, 없애도 또 세우는 뇌사좀비뇌에 가까운 유슬람 후장빨이 경뽕개후레년들 앰창 사고체계를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 이것도 일종의 정신병이냐?

ㄴ 편집글까지 좆뽕으로 바꿔치기하는거 보면 확실히 제정신인 애는 아닌거 같다. 얘도 그 일본해인가 하는 정신이상자와 비슷한 부류겠지. 걍 좆뽕 앰창인생 상대로 시간낭비 말고 관둬라.

문서가 갈수록 난잡하게 변하고 있다. 이 문서에 똥덩어리 몇 번 싸본 사람으로서 아주 확실히 느낌


일본과의 비교가 확실한 왕조인지라. '일본에게 뒤쳐진 왕조'라는 평이 많다.

일본에 대한 연구나 대중적 이해가 깊어지면서 조선과 일본의 국력차가 역전된 시기는 갈수록 과거로 가는 성향이 있다.

다만 세계사적으로 한반도는 중국에 종속된 속방 취급을 받아 비중이 거의 없고, 그나마 나눠지는 범주는 중국, 인도, 일본 이 셋이었다. 이에 따르면 일본은 유사이래 농업생산력과 높은 인구밀도 등으로 기원후 이래 쭉 아시아의 경제강국 위치를 놓치지 않았다고 나온다. 물론 일본뽕 먹은 서양학자들 (근거는?) 의 서술일 수도 있지만 우리들 생각처럼 한반도가 삼국시대까지는 비교도 안되게 짱 셌다가 조선 시대를 거치면서 역전된 그런 건 아니었다는 것이다.

현 아재세대들이 꼬꼬마였을 시절 교육의 대세는 '조선은 일본보다 정치경제문화 모든 면에서 선진국이었는데 메이지유신으로 조선보다 20년 빨리 개항해서 우리가 20년 뒤쳐진 것이고 모든 잘못은 대원군에게 있다!'였다. 네 다음 좆식충새끼의 망상좆빠는 소리. 좆식충아 수능까지 이백일도 안남은거 아니?

이후 일본이 에도막부 시절 네덜란드 등과 접촉하면서 난학을 발전시키고 통신사가 일본의 물산이 풍족함을 부러워했다는 사실이 알려져 가면서 '조선은 일본보다 모든 면에서 앞선 선진국이었으나 임진왜란 때 도자기 뺏기고 도공들 납치당하고 탈탈 털리면서 전세가 역전 되었다!'로 바뀐다.

최근 조선왕조실록이 완전 디지털화 되어 조선사가 소수 식자의 전유물에서 벗어나 갑남을녀도 검색하여 진위를 파악할 수 있는 물건이 되었는데, 이를 통해 나온 결론은 일본은 조선 초부터 이미 종이, 안료, 무기, 광물지식 등 제조업과 산업분야에서 조선보다 더 발전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실록에 지들 불리한 것까지 꼼꼼히 기록한 거 하나는 인정해줄 만하다. 아니, 당시에는 상공업 뒤쳐졌다는 것이 부끄럽다는 생각조차 안했으니 그랬을수도?


일본은 재수 좋게 일찍 문물을 개방하여 요행으로 강대국이 된 것이 아니라 한참 전부터 강대국이 될 소양을 축적하고 있었으며 메이지유신은 그 결과일 뿐이고, 그 소양이 한반도를 능가한 시기도 파면 팔수록 점점 과거로 올라갔다는 사실을 추정할 수 있다

그런데 조선초에도 제법 격차가 있었다는 게 사실이라면 양국의 질적 역전은 고려시대에 발생했을 소지도 충분하기에 조선 때문에 일본과의 우열관계가 역전되었다는 책임은 탕감될 수도 있다. 이 경우 조선은 역전의 책임보다는 뒤집어진 차이를 메꾸지 못하고 넘사벽으로 벌려놓은 책임을 지게 되는 것이다.

기록을 통해서 알아보자.

세종 46권, 11년(1429 기유 / 명 선덕(宣德) 4년) 12월 3일(을해) 5번째기사 박서생이 시행할 만할 일들을 갖추어 아뢰다

>통신사 박서생(朴瑞生)이 시행할 만한 일들을 갖추어 아뢰기를, >“1. 신이 일본에 이르러 대마도(對馬島)로부터 병고(兵庫)에 이르기까지 적들의 수효와 왕래하는 길을 살펴보오니, 대마도와 일기주(一岐州) 사이의 내외의 큰 섬들과 지하(志賀)·평호(平戶) 등의 섬들은 적간관(赤間關) 이서(以西)의 적들이요, 사주(四州) 이북 조호(?戶)·사도(社島) 등지는 적간관 이동(以東)의 적이온데, 그 군사가 거의 수만에 이르고, 그 선척의 수효도 1천 척을 넘어서, 만약 동서의 적이 서로 호응하여 일시에 군사를 일으킨다면 방어하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그들의 서쪽으로 향해 오는 길로는 대마도가 여러 적들의 총 집합장으로 되고, 적간관은 사주(四州)에 있는 여러 적들의 출입하는 문(門)이오니, 만일 서쪽으로 향하는 적이 있을 때에, 종정성(宗貞盛)이 그 백성들에게 영을 내려 급수(汲水)하지 못하도록 하고, 대내전(大內殿)은 적간관에 영을 내려 서쪽으로 나가는 것을 금지한다면 해적들은 왕래할 수 없을 것입니다. 또 지하·조호·사도 등지의 적은 대내전이 이를 주관하고, 내외(內外)의 큰 섬은 종상전(宗像殿)이 이를 관장(管掌)하고, 풍후주(豊後州) 해변의 모든 적은 대우전(大友殿)이 이를 다스리고, 일기·평호 등의 섬은 지좌(志佐)·좌지(佐志)·전평(田平)·호자(呼子) 등의 각전(各殿)에서 나누어 맡고 있으니, 저 모든 섬의 도주(島主)로 하여금 엄중한 금방(禁防)을 세우게 한다면 도적질할 마음이 생길 수 없을 것입니다. 대저 그 풍속이 예의(禮義)를 알지 못하여 조금만 뜻에 맞지 않아도 그 몸을 돌아보지 않고, 비록 어소(御所)의 명령이라 할지라도 항거하고 좇지 않습니다. 이것으로 보건대, 어소와 수호(修好)하는 것이 비록 교린(交隣)하는 도리는 되오나, 해적을 금방하는 계책에 있어서는 오히려 미흡합니다. 또 일본은 구하는 바가 있으면 사절을 보내서 이를 청하고, 만약 구하는 바가 없으면 비록 신주(新主)를 하례하고, 구왕(舊王)을 조상하는 큰 예절이라 할지라도 예를 닦지 않습니다. 이제 신 등이 명을 받들고 갔는데도 접대하는 것이 또한 예대로 하지 않으니, 이는 아마도 그 나라 옛 역사에 쓴 바로 인하여 그런 것이 아닌가 합니다. 원컨대, 이제부터 국가의 부득이한 일과 보빙(報聘)하는 이외에는 사신을 보내는 것을 허락하지 마시고, 윗항의 여러 섬들의 도주(島主)에게는 보내는 것은 후하게 하고, 받는 것은 박하게 하여 그들의 마음을 기쁘게 해 주고, 간간이 사신을 보내어 지극한 뜻을 돈독히 효유(曉諭)하여 해적의 금지책으로 삼도록 하소서. > >1. 일본이 불교를 숭상하고 있으므로 교호(交好)하는 데 있어 증여할 물건은 불경(佛經)보다 나은 것이 없사오니, 각처에 있는 불경을 고찰 열람하고 그 성질(成秩) 여부를 살펴서 옛 것을 보충하여 성질이 되도록 하고, 이를 저장 비축(備蓄)하여 뒷날 통호(通好)의 자료로써 대비하소서. > >1. 일본 농민에게 수차(水車)를 설비하여 물을 퍼 돌려 전답에 대는 자가 있기에, 학생(學生) 김신(金愼)으로 하여금 그 수차를 만든 법을 살펴보게 하였더니, 그 수차가 물을 타고 저절로 회전하면서 물을 퍼 올려 대고 있어, 우리 나라에서 전년에 만들었던 수차인 인력(人力)으로 물을 대는 것과는 다른데, 다만 물살이 센 곳에는 설치할 만하오나, 물살이 느린 곳에는 설치할 수가 없습니다. 수침(水砧)1431) 도 또한 그러하였으니, 신이 가만히 생각해 보니, 비록 물살이 느리더라도 사람이 발로 밟아서 물을 올린다면 또한 물을 댈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이제 간략하게 그 모형을 만들어 바치오니, 청컨대 각 고을에 설치할 만한 곳에 이 모형에 따라 제작하여 관개(灌漑)의 편리에 돕도록 하소서. > >1. 일본은 그 국도(國都)로부터 연해(沿海)에 이르기까지 돈[錢]을 포백이나 미곡보다도 훨씬 더 많이 사용하기 때문에, 여행하는 사람들이 비록 천리를 가더라도 돈꿰미[錢緡]만 차고 식량을 휴대하지 않으며, 길가에 사는 사람들이 행려자(行旅者)들이 기숙할 처소를 설치해 놓고, 만약 손님이 올 것 같으면 서로 앞을 다투어 청하여 영접하고, 손님이 주는 돈에 따라 인마(人馬)의 숙식을 제공하며, 관량(關梁)에 있어서는 큰 강(江)에는 주교(舟橋)를 설치하고, 조그마한 냇물에는 누교(樓橋)를 설치해 놓고는 그 곁에 사는 자가 다리 세(稅)를 관장하고 있는데, 그 다리를 지나가는 손님에게 돈 10문(文)이나 5문을 징수하되, 다리의 대소를 참작하여 세를 징수하여 뒷날의 보수(補修) 자금으로 삼고 있사오며, 토전(土田)이나 주거(舟車)의 세까지도 돈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없기 때문에, 돈을 사용하는 법이 광범위하여 사람들이 무거운 짐을 지고 먼 길을 가는 노고가 없습니다. > >1. 일본에서는 대나무로 큰 밧줄을 만들어 양쪽 언덕에 매어 놓고, 통나무를 깎아서 배를 만들어 대나무 밧줄에 등자[?]을 달아 배 위로 내려뜨리고는, 기둥을 세우고 들보를 가설하고, 널빤지[板子]를 죽 깔아 다리를 만들어 놓고는, 진리(津吏)로 하여금 건너는 세를 가볍게 징수하게 하여 후일에 교량이 낡아 허물어졌을 때의 보수 자금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우리 나라의 한강과 임진강은 남북을 통하는 큰 관진(關津)입니다. 비옵건대, 이 예에 따라 다리를 가설하고 다릿세를 거두어서 무너지는 대로 즉시 보수하게 한다면, 다만 돈을 사용하는 법이 광범위해질 뿐만이 아니라 남북의 인마(人馬)가 험로(險路)를 걸어서 피곤해 쓰러지는 폐단도 또한 없어질 것입니다. > >1. 원우(院宇)의 시설은 행려자(行旅者)들을 기숙하게 하기 위하여 된 것인데, 지은 이는 이미 죽고 그의 수즙(修葺)을 이어나가지 못하기 때문에, 햇수가 오래 되고 퇴락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애석함을 금치 못하게 하는 사평(沙平)·판교(板橋) 같은 원우가 많습니다. 근래 각 관사(官司) 및 교량을 영선(營繕)한 중들에게는 모두 관직을 제수하고 절을 주기 때문에 중들이 모두 이를 즐겨하고 있사오니, 원컨대 이제부터 각처의 길을 긴완(緊緩)으로 구분하여 사원(寺院)의 다소(多少)를 정하고, 중으로서 능히 보수하거나 창건할 수 있는 자를 택하여 주지(住持)로 삼아 원우를 나누어 관리하도록 하고, 수령으로 하여금 그 영건(營建)과 공판(供辦)의 능부(能否)를 고찰하여 감사에게 보고하게 하고, 감사는 다시 그 사실 여부를 답험하여 출척(黜陟)의 증빙으로 삼도록 하되, 만약 그 공로가 탁월하게 뛰어난 자가 있으면 이를 큰 사원(寺院)으로 올려 주어 뒷사람들을 권장하도록 하소서. > >1. 이미 주지(住持)를 임명하였으면 묵은 미두(米豆)를 지급하여 행려자들을 공궤(供饋)하게 하되, 손님이 이르면, 그 손님이 들여놓는 돈의 다소에 따라 공궤하게 하고, 매 월말마다 그 돈을 관(官)에 수납(輸納)하게 하고 다시 미두를 받아 가서 공궤하도록 하며, 행려자들로서 쌀을 휴대하고 밥을 지어 먹는 자를 금하기를 계속하여 돈을 사용하는 법을 넓히소서. > >1. 각처의 어량세(魚梁稅)는 사옹원(司饔院)과 사재감(司宰監)에 공상(供上)하는 것 이외에는 모두 돈으로 바치게 하고, 각도 염장(鹽場)의 소금 값과 각처의 선세(船稅)·그리고 외방(外方) 각 관사의 노비(奴婢)의 공물(貢物)까지도 면포(綿布)를 제외하고는 모두 돈으로 바치게 하여 그 용도를 크게 일으키도록 하소서. > >1. 일본인의 풍속이 노소없이 목욕하고 몸을 깨끗이 하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큰 집에는 각기 욕실(浴室)을 설치하고, 여염(閭閻)마다 또한 여러 군데 욕탕을 설치하고 있는데, 그 욕실의 제도가 매우 잘 되어 있어 편리합니다. 탕(湯)을 끓이는 자가 각(角)을 불면, 이 소리를 들은 사람들이 다투어 돈을 내고 목욕을 합니다. 비옵건대, 제생원(濟生院)·혜민국(惠民局)·왜관 한증(倭館汗蒸)·광통교(廣通橋) 등지와 외방의 의원(醫院) 등, 사람들이 많은 곳에 모두 욕실을 설치하여 돈을 사용하는 법을 돕도록 하소서. > >1. 일본 상가(商街)의 제도는 시장 상인들이 각기 처마 아래에다 널빤지로 층루(層樓)를 만들고 물건들을 그 위에 두니, 다만 먼지가 묻지 않을 뿐만 아니라 사람들이 쉽게 이를 보고 살 수 있었으며, 시중(市中)의 음식물들을 귀천(貴賤)의 구별 없이 모두 사 먹고 있었습니다. 우리 나라의 시장은 건습(乾濕)할 것 없이 모든 어육(魚肉) 등의 식물들을 모두 진토(塵土) 위에 두고는 혹은 그 위에 앉기도 하고 밟기도 하오니, 비옵건대 운종가(雲從街) 좌우의 행랑(行廊)에서부터 동쪽 누문(樓門)에 이르기까지, 종루(鍾樓) 남쪽에서부터 광통교(廣通橋)에 이르기까지 모두 보첨(補?)을 달아내고, 그 아래에 물건들을 진열해 놓을 층루를 만들어, 어느 간(間)은 무슨 물건을 둔 곳이라고 죽 편액(扁額)을 달아서 쉽게 알아 볼 수 있도록 하소서. > >1. 일본에 갔다 오려면 풍랑과 해적(海賊)을 만날까 두려워 낮에는 망(望)보고, 밤에는 경계하면서 마음을 잠시라고 해이하게 가질 수 없어, 반인(伴人)으로부터 격군(格軍)에 이르기까지 한 사람도 노역(勞役)에 종사하지 않는 사람이 없이 항상 스스로 삿대를 잡고 노를 저으면서 1주년이나 혹은 2주년 만에 돌아오니, 그 신고(辛苦)와 피로가 육로로 가는 것보다 배나 더하온데, 배 위에서 능히 인솔을 잘한다 하여 재차 혹은 삼차에 이르기까지 왕복한 자가 있어도, 혹 성상의 은례를 아직 입지 못한 자가 있으니 실로 민망한 일입니다. 원컨대 이제부터 사명을 받들고 갔다 온 자는 그 공으로의 차례대로 재품(才品)을 나누어서 천거하게 하고, 반인 이하까지도 모두 직(職)으로써 상(賞)을 주소서. > >1. 신 등이 일본 박대(博大)에 도착하매, 왜인 망고라(望古羅)가 유구국(琉球國)에서 와서 말하기를, ‘피로(被虜)된 귀국 사람들이 근래 기근으로 말미암아 고향 생각을 더욱 간절히 하고 있는데, 유구국의 왕이 귀국에 미곡을 구걸하려고 정미년 6월에 50여 명을 찾아서 배에 실었다가, 역풍(逆風)으로 인하여 출발하지 못하고 마침 국란(國亂)이 있어 실행하지 못했다.’ 하옵기에, 신이 사정(司正) 등차랑(藤次郞)에게 말하기를, ‘네가 가서 데리고 오는 것이 어떠냐.’ 하니, 대답하기를, ‘만약 상명(上命)을 받는다면 내가 반드시 가겠다.’ 하오니, 엎드려 바라옵건대 사람을 보내어 이들을 찾아오게 하여 다년간 고향을 그리던 쓰라린 정을 풀도록 하소서. > >1. 사역원(司譯院) 생도(生徒) 이생(李生)이 말하기를, ‘감자(甘蔗)1432) 는 맛이 달고 좋아서 생으로 먹어도 사람의 기갈(飢渴)을 해소하게 되고, 또 삶으면 사탕(沙糖)이 되는데, 유구국(琉球國)에서는 강남(江南)에서 얻어다가 많이 이를 심고 있으며, 또 서여(薯?)1433) 라는 것이 있어, 큰 것은 기둥만 하고 작은 것은 서까래만 한데, 역시 남만(南蠻)에서 얻어다가 이를 재배한다.’ 하오니, 엎드려 바라옵건대, 모두 채취해 오게 하여 그 재배를 널리 보급하도록 하소서. > >1. 일본에서는 모든 금(金)·은(銀)·동(銅)·철(鐵) 등 진귀한 물품이 생산되는 곳에 방금(防禁)을 세우지 아니하고 그 지방에 사는 자로 하여금 대대로 채취하여 이익을 보게 하고, 나라에 바치는 세공(歲貢)은 일정한 수량뿐이고 다른 부역이 없기 때문에, 이를 주관하는 자가 태만하지 아니하여 보물의 생산이 무궁하여, 공사(公私)간에 모두 이익이 된다고 합니다. 원컨대, 이제부터 일본의 예에 의하여 모든 진귀한 물품이 생산되는 곳에는 금법(禁法)을 세우지 말고 평민들에게 그 이익의 독점을 허용하여, 세공(歲貢)을 제정하고 부역을 면제해 주어 길이 세업(世業)을 삼도록 하소서. > >1. 왜적들이 일찍이 우리 나라를 침략하여 우리 인민을 붙잡아다가 노비(奴婢)로 삼고는, 혹 먼 나라에 전매(轉賣)하기도 하여 영원히 돌아오지 못하도록 하니, 그 부형과 자제들이 원통하여 이를 갈면서도 복수하지 못하는 자가 몇이겠습니까. 신 등의 사행(使行) 길에 정박하는 곳마다 잡혀 간 사람들이 다투어 도망해 오려고 해도, 그 주인이 가쇄(枷鎖)를 하고 굳게 가두어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있으니, 진실로 민망한 일입니다. 일본에는 사람은 많고 먹을 것이 적어서, 흔히 노비를 팔아 먹고 있어 혹 남의 자제들을 훔쳐다 팔기도 하는데, 이는 허다하게 볼 수 있는 일입니다. 일기도(一岐島)는 지금 병란으로 인하여 양곡이 다하여 먹을 것이 떨어졌사온데, 내년 봄에 더욱 기아가 심하게 되면, 만약 도둑질을 하지 않을 것 같으면 사람을 팔아서 생활을 영위하는 자가 더욱 많을 것입니다. 근래 우리 나라의 금지로 인하여 연변(沿邊)에 와서 파는 자가 없어졌습니다. 그윽이 생각하건대, 값에 따라 원수를 갚는 것은 고금의 공통된 사의(事誼)인 것입니다. 저자들이 이미 잡아다가 부렸으니, 우리는 마땅히 저들을 사다가 천역(賤役)을 시켜야 할 것입니다. 원컨대, 이제부터 남자 10세, 여자 20세 이하는 모두 와서 팔도록 허용하고, 또 일본에 가는 자로 하여금 모두 사다가 영구히 노비로 삼아서, 백성을 위하여 원수를 갚는 의리를 보이도록 하고, 만약 ‘연변에 모여 살면 후환(後患)이 될 염려가 있다. ’고 말한다면, 깊고 먼 곳으로 전매(轉賣)하도록 허용하여 해변에 살지 말도록 하소서.”

5 출처 조선왕조 실록 세종 46권, 11년(1429 기유 / 명 선덕(宣德) 4년) 12월 3일(을해) 5번째기사

일본에 다녀온 박서생의 보고 내용을 간단히 요약해 보면

>1 수차 사용법이 우리나라에는 없어서 데리고 간 김신에게 그 원리를 알아보게 했는데, 일본 수차는 물이 떨어지는 힘을 이용해 수차가 저절로 돌아가면서 물을 퍼올려 논밭에 물을 대고 있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내나 강은 물살이 약하기는 하지만, 일본 것과 같은 수차를 만들어 발로 밟아 물을 퍼 올리면 두레박을 사용하는 것보다 힘이 크게 절감될 수 있을 것이다. 일본 수차의 모형을 그려 보내니, 그 모형을 본따 수차를 만들어 사용해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 >2 우리나라가 면포나 미곡으로 물물교환을 하는 것과 달리, 일본은 동전을 사용하기 때문에 먼 길을 여행하는 사람이라도 식량을 갖고 다니지 않고 동전만 허리에 차고 길을 떠난다. 또, 길가에는 여행자를 위해 잠자고 먹을 수 있는 집을 설치해놓고 여행자를 손님으로 맞고 있다. 여관 주인은 받는 동전의 가치에 따라 사람과 말에 편의를 제공한다. 강과 내 근처에 사는 사람들은 강과 내에 배를 잇대어 다리를 만들어놓고 건너다니는 사람에게 돈을 받아 생활하고 다리를 보수하는 비용으로 용한다. 일본은 토지세부터 다리 통행세에 이르기까지 모두 동전을 사용하는데 익숙해 무거운 짐을 지고 먼길을 가는 노고를 할 필요가 없다. > >3 집집마다 욕실이 있고 마을마다 목욕탕이 있어 주민들이 편리하게 사용하고 있다. 물 끓이는 사람이 호각을 불면 사람들이 동전을 내고 목욕을 한다. 우리도 제생원, 혜민국 등과 같이 의료기관과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광통교와 지방의 의원 등에 욕실을 설치하여 몸을 깨끗하게 하고 또 돈을 사용하는 방법도 터득하게 하는 것이 좋겠다 > >4 일본의 상가는 상인들이 각기 자기 상가 처마 아래로 널빤지로 진열대를 만들어놓고 그 위에 물건을 진열해놓아서 먼지가 묻지 않고 손님이 물건을 보고 쉽게 고를 수 있다. 진열된 물건은 신분의 귀천 없이 누구나 살 수 있다. 조선의 시장은 마른 물건이나 젖은 물건을 구별해 진열하지 않고, 생선이나 육류 또는 채소를 모두 흙바닥 위에 두고 팔고 있어, 행인들이 물건 위에 앉기도 하고 물건을 밟기도 한다. 이제부터 종로에서부터 광통교까찌 상점 처마에 보첩을 달고 보첩에 단을 만들어 어느 칸에 무슨 물건이 있는지 표시를 해 손님이 쉽게 물건을 보고 살 수 있게 해야 한다 > 라고 할수 있다.

또한 세종실록의 여러 기록등을 통하여 당시 일본이 조선보다 앞서 있음을 알수 있는데

세종 41권, 10년(1428 무신 / 명 선덕(善德) 3년) 7월 1일(신해) 3번째기사 일본에서 《백편상서》를 사오게 하다

>임금이 대언(代言) 등에게 말하기를, >“일본국(日本國)에 《백편상서(百篇尙書)》가 있다고 들었는데, 통신사(通信使)로 하여금 사오도록 하고, 또 왜국의 종이는 단단하고 질기다 하니, 만드는 법도 배워 오도록 하라.” >하니, 지신사(知申事) 정흠지(鄭欽之)가 계하기를, >“일본국에는 금이 많이 생산되니, 명주와 모시[苧布]를 가지고 가서 사오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중국에 바치는 금·은을 만일 면제 받을 수 없다면 사다가 바치는 것이 옳다.” >하였다. > >일본의 종이 기술이 조선보다 발전되어 있음을 알수 있다.

6


세종 46권, 11년(1429 기유 / 명 선덕(宣德) 4년) 12월 3일(을해) 6번째기사 박서생이 일본에서의 심중청 도은조지 등의 제조법을 갖추어 아뢰다

>박서생이 또 일본에서의 심중청(深重靑)·도은조지(鍍銀造紙)·주홍경분(朱紅輕粉) 등의 제조법을 갖추어 아뢰니, 모두 이를 머물러 두게 하였다. > >일본의 안료 기술이 조선보다 발전되어 있음을 알수 있다.

7


세종 46권, 11년(1429 기유 / 명 선덕(宣德) 4년) 12월 23일(을미) 2번째기사 이천이 동·철의 산지를 조사한 것을 아뢰다

>중군 총제(中軍摠制) 이천(李?)이 아뢰기를, >“은장(銀匠) 김생(金生)이 고하기를, ‘동석(銅石)이 금화현(金化縣)에서 난다. ’고 하옵기에 일찍이 대호군 백환(白環)으로 하여금 김생과 같이 초철법(炒鐵法)으로 시험해 보도록 하였고, 그 뒤에 또 심중청(深重靑)과 유사한 돌이 고성(固城)에서 나고, 수은(水銀)과 유사한 돌이 창원(昌原)에서 나며, 또 김해(金海)·밀양(密陽)·함안(咸安)·의성(義城)·인동(仁同)·고성(固城) 및 대구(大丘) 경내의 하빈(河濱) 등 각 고을에서 모두 동(銅)과 철(鐵)이 난다 하오니, 비옵건대 백환을 보내어 초철법으로 시험해 보는 것이 유익할 것 같사오며, 또 동·철을 본래 우리 나라 소산이오나, 초철법을 오랫동안 폐하였기 때문에, 그 산지(産地)마저 잊어버리고 전하지 않사오니, 청하옵건대 일본에서 배워 온 법에 의하여 널리 출산지를 구하도록 하고, 동·철이 나는 것이 홀로 경상 1도만이 아니오라 다른 도에서도 또한 혹 산출하기도 하오니, 아울러 이문(移文)하여 조회하고, 만약 신고하는 자가 있으면 양인(良人)은 직위로 상을 주고, 천인(賤人)은 〈물품으로〉 상을 주도록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이천이 또 아뢰기를, >“이번에 가져 온 일본의 심중청석(深重靑石)과 수은석(水銀石)을 각도로 나누어 보내어 그 모양의 돌을 널리 구하여, 만약 신고하는 자가 있으면 양인은 벼슬로 상을 주고, 이속(吏屬)은 면역(免役)하게 하며, 공천(公賤)은 자신에 한하여 역(役)을 풀어 주고, 사천(私賤)은 물품으로 상을 주도록 하소서.” > >일본의 광물지식과 연구가 조선보다 발전되어 있음을 알수 있다

8


세종 48권, 12년(1430 경술 / 명 선덕(宣德) 5년) 6월 1일(경오) 6번째기사 일본에서 칼 만드는 법을 배워 칼을 한 자루 바친 심을에게 옷 등을 하사하다

>의령(宜寧)에 거주하는 선군(船軍) 심을(沈乙)이 일찍이 일본에 건너가서 칼 만드는 법을 배워 칼 한 자루를 만들어 올리니, 일본 칼과 다름이 없으매, 명하여 군역(軍役)을 면제시키고 옷 한 벌과 쌀·콩 아울러 10석을 하사하였다. > >일본의 칼 제조법이 조선보다 발전되어 있음을 알수 있다

9


세종 75권, 18년(1436 병진 / 명 정통(正統) 1년) 12월 22일(계미) 3번째기사 왜통사 윤인보 등을 시켜 백성에게 칡뿌리 캐먹는 법을 전수시키다

>왜통사(倭通事) 윤인보(尹仁甫)·윤인소(尹仁紹) 등이 가뭄으로 인하여 흉년 구제의 계책을 진술하면서 아뢰기를, >“일본 사람들은 상시로 칡뿌리와 고사리뿌리를 먹으니, 만약 이것을 사용하여 흉년을 구제한다면 이치가 있을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렇게 여겨서 인보(仁甫)를 경상도에 보내고, 인소(仁紹)를 전라도·충청도에 보내어, 그것을 캐어 먹는 방법을 가르치게 하였다. > >일본의 식재료 활용법이 조선보다 발전되어 있음을 알수 있다

10


세종 48권, 12년(1430 경술 / 명 선덕(宣德) 5년) 5월 19일(무오) 3번째기사 예조에서 각 포구의 병선과 군기를 점검할 것을 건의하다


>또 강남(江南)·유구(琉球)·남만(南蠻)·일본 등 여러 나라의 배는 모두 쇠못을 써서 꾸민 데다가, 또 많은 날을 들여서 만들었기 때문에 견실하고 정밀하며, 가볍고 빨라서 비록 여러 달을 떠 있어도 진실로 물이 새는 일이 없고, 비록 큰 바람을 만나도 허물어지거나 상하지 않아서 2, 30년은 갈 수 있사온데, 우리 나라 병선은 나무 못을 써서 꾸민데다가, 또 만들기를 짧은 시간에 급히 하여 견고하지 못하고 빠르지도 못하며, 8, 9년이 못가서 허물어지고 상하게 되므로, 따라서 상하는 대로 보수하기에 소용되는 소나무 재목도 이어가지 어렵사오니, 그 폐단이 적지 않습니다. 청하건대, 이제부터 여러 나라의 배 만드는 방법에 따라서 급하게 만들지 말고, 쇠못으로 꾸며서 단단하고 정밀하며, 가볍고 빠르게 하고, 그 위의 구조도 여러 나라의 배와 같이 가운데는 높고 밖은 낮게 하여, 물이 빗가로 흘러 내려가게 하여 배 안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여, 배 다니기에 편리하게 하옵소서. > >일본의 조선술이 조선보다 발전되어 있음을 알수 있다

11


세종실록의 여러 기록을 통해서 이미 여러 분야에서 조선초 세종시기에도 일본이 문명적으로 조선에 비해 더 발전되어 있음을 알수 있다.

분명하게 조선왕조실록에서의 출처를 가지고 이야기 하였고 각 부분마다 출처를 정확하게 밝혔고 조선왕조실록 홈페이지 링크를 통해 기록이 엄연한 사실임을 확실하게 해두었으니 나무위키 유저중에 위 내용이 자신의 의견이나 맘에 들지 않는다고 함부러 위 내용을 삭제하거나 수정하지 마시고 반박할 부분이 있으면 아래에 작성하기 바랍니다.

나무위키에서 위 내용에 대해서 반박 못하고 그냥 삭제하는 병크를 저질렀다.

역시 국뽕위키 .... 실록 기록 링크까지 되어있으니 ㅂㄷㅂㄷ 대면서 반박 못하고 그냥 일.빠의 글 어쩌고 하면서 삭제 해버림.

현대적 기준으로 윗글 읽어보면 평범한 이의 상식으로도 상업 공업 모든 면에서 조선을 추월하고 있었음이 충분히 유추 되는데 이정도면 과거 조-센 사관이나 지도층들이 생각한 문명국과 야만국의 기준은 성리학에 얼마나 통달하였는지 하나뿐이 아니었나를 심각하게 의심할 필요가 있다. 요즘으로 치면 1차 2차 3차 산업 모두 질적으로나 양적으로나 후달리는데 이슬람교 경전 이해도가 딸린다고 하여 아랍국가가 유럽선진국을 보고 미개한 나라라고 비웃는 꼴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겠다

위 실록자료의 중요성은 일본이 한국을 침략해서 털어먹었기 때문에 잘 살게 된 것이지 전쟁 일으켜서 안쳐들어왔으면 아직까지 훈도시찬 야만인으로 살았으리라는 상식을 깨준다는 것이다. 국가단위의 침략이 없었던 조선초에도 이미 많은 분야에서 국왕이 직접 배워오라고 지시할 정도로 차이가 벌어져 있었다면 우리의 상상과는 달리 일본은 전쟁 없이도 통일신라~고려시대 기간 동안 중국에서 자체적으로 기술과 문화를 배워서 한반도 국가를 따라잡은 뒤 앞질러 버렸다는 계산이 나오기 때문이다 다르게 표현하면 반도인들이 열도인보다 노오오오력을 덜했다는 뜻이 된다

애초에 국제정치학적으로 볼 때 국가가 힘이 세지고 역량이 축적 되면 반드시 영토를 넓히거나 영향력을 넓히기 위해 군대를 마련해서 와 쳐들어갔다. 힘이 세지면 한반도를 쳐들어온 것은 북방 여진족 거란족 그리고 한족 왕조 어느 것 하나 예외가 없었다. 심지어 한반도 왕조들도 힘이 남아돌면 반드시 주변국가를 쳐들어가서 땅따먹기를 했다. 사실 일본의 침략적 근성 운운하는 것은 착한나라 나쁜나라가 따로 있다고 생각한 도덕주의 세계관과, 중국>조선>일본으로 랭킹을 정하는 사대주의 때문에 우리보다 힘센 나라한테 당한 것은 어쩔 수 없다고 합리화하고 우리보다 좆밥이라고 생각한 일본이 상국 조선을 범한 것은 천륜을 저버린 행동이라는 사고 때문이다. 강한 나라가 만만한 나라에 쳐들어가는 건 세계사적으로 아주 흔하고 평범한 일이었다. 그냥 일본이 한국보다 힘이 강해졌을 때에 팽창본능으로 쳐들어온 것이다 딱히 둘 다 좆밥인 상황에서 일본에만 폭력의 유전자가 강하여 세계평균보다 더 많이 쳐들어온 게 아니라는 얘기임

전근대 농업사회의 국력에 결정적인 넓은 영토와 많은 인구라는 면에서 이미 일본은 조선시대 이전부터 인구면에서 한반도 국가를 압도하고 있었으며 그 절대치의 추월 시기는 통일신라 시기다, 가마쿠라 막부 초기다 등등 다양하나 일단 위 조선 초 일본인구는 한반도를 한참 능가한 시점이었다. 국토면에서도 일본은 혼슈 하나가 압록-두만 이남 한반도보다 약간 더 크고 규슈와 시코쿠 또한 만만치 않게 크다.

ㄴ국뽕들은 일본이 호랑이가 싼 똥이라면서 한반도 딥따 크게 그리고 옆에 똥조각 4개 그리면서 비하했는데 똥이 본체보다 1.7배 큰 것이 함정. 특이한 건 일본인들조차 현대식 지도가 나오기 전까지는 한반도가 자기들 땅보다 더 큰 줄로 알고 있었다고 한다.

게다가 일본은 태평양에 바로 맞닿아 있고, 한반도보다 남쪽에 있어 기후가 훨씬 따뜻하고 강수량 역시 높다. 때문에 농업 부분에서도 당연히 한반도보다 유리한 위치에 있었다. 한반도에서는 17세기에 들어서야 정착한 모내기법 또한 일본에서는 풍부한 강수량 덕분에 이미 15세기 부터 전국적으로 이뤄지고 있었다. 이미 조선시대 이전부터 일본은 큰 국토와 축복받은 기후 덕에 월등한 생산력을 보여주었다.

ㄴ단군 왕검 위치선정 ㄱㅆㅎㅌㅊ...

ㄴ 대신 지진이랑 쓰나미같은 자연재해는 별로 없으니 그걸로 만족하자

하지만 일본은 농민들로 부터 기본적으로 50% 많게는 80%까지 세금으로 뜯어 갔으니 세금면에서는 조선이 낫다고 볼 수가 있다는 건 헛소리.

상업이란 건 본디 잉여생산물이 나오면서 발달하는 건데 왜 일본보다 조선이 상업으로 후진적이지? 저렇게 살인적 세율로 인해 일본 농민은 남는 것도 없는데? 쟤네는 쫄쫄 굶어가며 쌀 팔아서 사치품 샀나?

ㄴ이건 헛소리인게 애초에 상업발달은 일본 농민의 구매력 때문에 증가한게 아님. 걔네한테서 세금 뜯어간 귀족들이나 쌀거래하는 상인들의 상거래로 빈부격차 잔뜩 벌려놓고 자본을 독점해서 생긴 현상이지. 오히려 일본농민들은 조선농민보다 못 살았음. 일본의 상업이 발달한게 아니라 신분에 따라 사는 곳이 각각 정해져 있기에 어느 한 지역만 비대하게 자본이 몰린거임

공식적 세율은 조선이 낮지만 오히려 그 낮은 세율로 인해 정부 재정도 바닥이고 그 재정이 바닥이기 때문에 관리새끼들도 봉록체계를 보면 종9품 벼슬아치가 자기 혼자도 먹고 살기 힘든 봉록을 받으니 당연히 횡령. 실제로 실무를 보는 서리, 아전새끼들은 무보수로 일하니 횡령해야 먹고 산다.

과연 실제적 세율로 따져볼 때 조선 농민이 일본 농민보다 나은가?

무보수공무원에 낮은 세금 에엥? 이거 완전 조센징들 이상사회아니나? 국회의원 월급 없애야 한다는 분들 대가리 박고 자살 앙망 역시 조선부터 내려오는 피는 못 속인다. DNA 속에 조센 사회로 회귀하고픈 유전자가 이미 각인되어 있다는 것임. 돈 없이 도덕타령만 해도 저절로 밥이 생기고 배가 불러지고 오곡백화 만발한 유토피아가 펼쳐지리라는 판타지가 아직도 피속에 녹아 있다.

통신사의 목적이 선진문화를 조선을 통해 흡수하기 위해서 즉 백제가 왜에 문물전수하던 것과 같은 원리라는데 그건 국뽕맞았던 70년대 주장이고, 이후 연구에 따르면 조선은 상국이 하국에 문물을 전한다는 정신승리 + 사실은 일본에게 호되게 얻어맞고 재침략 받을까봐 무서워서 견제 및 달래기 목적으로 보낸 것이고 일본측은 지방영주들의 통신사대접 경쟁을 통해 군기를 잡고 + 조선이 쇼군께 잘 보이기 위해 사신을 보낸다 고로 우리가 조선보다 위에 있는 나라라고 홍보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즉 서로 잘났다고 외치던 동상이몽 성격의 문화사절단이었던 것이다.

가끔 일뽕들이 외치는 약소국 조선의 입조 드립이 나온 이유가 조선은 침략로를 들킨다고 일본사신을 부산포까지만 오게 하고 서울에 못오게 했기 때문임. 사실 한양에서 부산까지 길다운 길도 없었기에 일본통신사가 제대로 올 수도 없었을 것이며 만약 오더라도 육로가 아니라 배타고 한강으로 들어와야 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후 병인양요나 신미양요 때 프랑스나 미국 군인측에 보낸 조선의 문서를 보면 '우리나라는 궁벽하고 털어먹을 것이 없다'라고 언급하는 부분이 보이는데, 당시 조선 윗대가리들이 일본사신을 받지 않은 이유가 비루하고 허접한 조선의 실상을 스스로들 잘 알고 있었고 이를 일본에게 보여주기 싫은 열등감 때문이 아니었나 의심해봄직 하다.

병자호란 이후 외부와의 교류를 일체 막고 은둔해 버린 조선이 그나마 서양의 발전한 문물을 간접체험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창구가 통신사였다. 12번 사신을 보낼 동안 조선조정은 도대체 뭐를 배우고 써먹을 생각을 한 것인지 의문이다. 그나마 고구마나 향신료, 감자 등을 들여와서 구황작물로 써먹기는 했는데, 당시 수행사들 중 일부가 일본에 널리 퍼져 있던 난학관련 서적이나 서양문물을 갖고 오기도 했으나 개인수집품으로 끝나고 시스템을 배우겠다는 생각은 없었다. 통신사들은 왜놈들이 물자는 풍족한데 주자를 모르니 야만스러운 것들이로고 이딴 소리나 해댔음

국뽕들의 주장처럼 통신사가 일방적인 방향의 문화사절단이었음은 분명 팩트이다. 그러나 그것은 문명의 질적 수준 때문에 생겨난 단방향의 흐름이 아니라, 일본은 성리학 찌끄래기라도 배우려고 오픈된 자세를 보였으나 조선은 그럴 생각조차 없었다는 것 때문에 생겨난 흐름이었다. 좆본도 조센을 엄청 무시했는데 19세기 초 더이상 조선으로부터 뭔가를 얻을 게 없다고 판단했고 1811년 쓰시마에서만 조선사신을 받았고 이후 본토로의 사절단은 1878년 수신사 전까지 없었다. 머저리같은 조선 놈들은 바짓가랑이를 붙들고 제발 수교해 달라고는 못할망정 쪽바리라고 욕하기 바빴는데 그 결과가 바로 일제강점기다.

궁금해서왓는대 고종,순조 조선왕조vs일제강점기 둘중 누가더 최악임?? 그당신 백성들의 입장으로 봣을떄

이 글 읽으면 세종대왕님이 욕하실 듯

편집

하늘나라에서 욕하실 듯 같아요. 사용자:황총제/서명 2016년 10월 19일 (수) 15:00 (KST)

역센징 형님 고생하셨습니다

편집

역센징 형님 복붙하시느냐고 고생하셨습니다

복붙냄새가 너무 나서 당신 글 복사해서 네이버에 붙여넣기 하니까 홍팍에 똑같은 글이 있더라고요?

팩트로 나오니까 할 말이 없다고 생각하면 오산입니다.

세종실록만 가져와서 그것도 자기가 쓸거만 끌어와서 그 때 일본이 조선보다 ~가 낫다 이런 논리는 씹노답중 상 개노답이다.

그래도 열심히 썼으니 반박 해드릴게요

먼저 왜 통신사 박서생이 가져온 일본왕의 답서를 누락하셨는지?

전문 올린다.

통신사 박서생(朴瑞生)이 일본에서 돌아와서 일본 국왕 원의교(源義敎)의 답서(答書)를 바쳤다. 그 글에 이르기를,

"금년 여름에 전위(專爲)하여 보내신 사신이 이르렀고, 살피건대 지난해 섣달에 발송하신 바는 대대로 닦아 온 우호(友好)를 잊지 않으시고 이웃 나라를 비호하는 데 힘쓰시기를 이와 같이 하시니, 어찌 그렇게도 위대하십니까. 누방(陋邦)은 부형(父兄)의 기업(基業)을 이어받으매, 책임은 중하고 힘은 미약하여, 국내의 조그마한 치무(治務)에 급하여 미처 국외와의 수경(修敬)에 미치지 못하였던 바, 먼저 예명(禮命)이 욕림(辱臨)하니 기쁘고 위로됨을 어찌 다 술회하오리까. 보내 오신 글에 이르기를, ‘잘 이어받고 잘 준행하며, 역대의 우호를 돈독히 하여 양국을 복되게 하라.’ 하셨으니, 지극하옵신 말씀입니다. 다시 어찌 더하오리까. 거의 이 교훈을 잊지 아니하고 길이 우호를 보지(保持)할까 하나이다. 내려 주신 보배로운 물건들을 일일이 영수하였사오며, 박소(薄少)한 물품을 별폭(別幅)에 갖추었사오나, 보답(報答)이 되지 못겠습니다. 혹 먼 데서 온 것이라 하여 윤허해 받아 주시겠습니까."

하였다. 예물은 채선(彩扇) 1백 자루, 장도(長刀) 2자루, 주칠 목차완(朱漆木車盌) 대소를 합하여 70개, 주칠 천방분(朱漆淺方盆) 대소를 합하여 20개, 휴칠 목통(髹漆木桶) 2개이었다.

앙망문 뺨치는 굴욕적인 답서이다.

누방에 부형에 영수에 단어 선택한 거 보면 일본왕이 말로만 조선와 형제 관계지 사실상 군신관계 수준이다.

이제 본격적으로 반박 들어갑니다.

근데 내일 시험이라 다 못 쓸듯


첫번째, 일본 제지술이 조선보다 뛰어나서 배우러 갔다?

태종때 이미 조지소를 만들고 이미 세종 이전에 중국급의 제지기술을 가지고 있었다.

태종이 제지기술에 관심이 많아 중국에서 화지공을 데려와 제지기술을 배우게 하라고 명했을 정도다.

태종 12년(1412년)에 “요동 사람 신득재(申得財)가 화지(華紙)를 만들어 바치니 득재에게 쌀과 면포를 하사하고 지공(紙工)에게 전습하도록 하였다.”는 기록이 그를 뒷받침 하는 것이다.

그리고 세종 12년, 일반 서책에 사용되는 일반종이가 아닌 고급지까지 만들기 시작했는데 고급지의 중요한 원료인 질긴 일본의 왜저(일본 닥나무)가 필요했기 때문에 일본 닥나무를 수입한 것이지

제지기술이 일본보다 떨어져서 배워오라는 게 아니라는 이야기이다.세종은 가까운 일본의 제지가 질기고 단단하여 좋다고 이야기를 듣고 다양한 제지기술을 습득하기 위해 배워오라고 한 것이다.

이미 아버지인 태종때 중국의 최고 제지기술을 배웠는데, 그 아래의 화지(和紙)기술을 굳이 배울 필요가 없었다. 그리고 화지(華紙)나 화지(和紙)나 같은 재료와 방식으로 만드는 건데....

그리고 여기서 역센징 형님이 간과한 점은 일본의 제지술을 전파한 인물이 고구려의 담징이다. 그 기술을 토대로 발전해온 것이라는 건 시중에 나온 책만 읽어도 아는 사실인데.......

그리고 2번째 안료 이야기

역센징이라서 한국 역사의 흐름은 모르시는 건가?

고려 후기부터 씹선비 사대부들이 판을 치면서 문화도 깨끗한 하얀색을 많이 사용하기 시작했기 때문에 안료기술이 당연히 도태되었다.

그리고 세종때는 갓세종이 여러 부문의 기술에 관심이 많았기에 안료기술을 배워오라고 한 것이다.

비교 자체가 불가능 한거지

비고로 역사적 흐름상 광해군 이후부터 도자기등등 안료를 포함한 색채가 들어간 경우가 많았다.

원래 다 반박할려고 했는데 너무 내용이 하찮아서 그냥 요약해서 조지겠다

배운다는 뜻이 기술이 없어서 배우는 것이 아니라 주변 국가의 기술을 배워 국익에 도움을 주겠다는 뜻이다.

제발 좀 생각을 하고 써라 진짜 광물 연구와 칼 제조법까지 참고 읽었는데 칡뿌리와 고사리뿌리 캐먹는 법이 갑자기 식재료 활용법으로 둔갑되고 이게 조선보다 나은 점이라고 지껄여 놨다.

조선술에서 빵 터졌다. 갓순신의 배를 제외해도 세조때 맹선-병조선, 명종때 판옥선으로 왜나라 왜구들 개 때려잡았는데 세종때에 국한해서 조선의 조선술을 판단하는 클라스 오졌따리 오졌따


그리고 애초부터 이런 반박도 필요가 없는게 15C 조선 세종 초기에 왜적들 본보기 보여줄려다가 대마도 한번 털어볼려다가 서로 루즈-루즈가 되었다. 그렇게 일본 봉건 영주들도 노략질하다가 털릴거 같아서 못해먹으니까 교역해달라고 징징댔고 조선은 교린 정책을 취해 일본과 계해 약조를 맺어 제한된 범위 안에서 조공무역을 허락해 줬다.

그 후 일본의 세견선(조선이 인증한 무역선)을 보내면서 조공무역 조졌는데 교역지는 부산포 · 제포 · 염포인 세 개였고 왜는 쌀 · 무명 · 삼베 · 서적 · 공예품 등을 가져갔고, 조선은 구리 · 황 · 향료 · 약재 등을 가져왔다.

쌀도 부족해서 빌빌대며 가져가는 나라가 무슨 기술과 문화를 따지냐? 문화를 따져서 양질의 서적을 그렇게 쓸어갔냐?

ㄴ 다만 쌀이 부족해서 빌빌댔다는 표현은 좀 애매함. 15C 중반부터 무로마치 막부가 ㅈ나게 흔들리고 바로 전국시대 돌입해버리는 바람에 쌀 부족했던건 당연한 일. 쌀 생산할 농업 기술이 딸려서 쌀 수입한 건 아니라는거. 전쟁 준비하다 보면 어느 나라든지 식량은 부족해진다. 쌀 수입 가지고 "기술과 문화는 따질 필요도 없다"라고 단정짓는 것은 좀 비약이 있다.

그리고 역센징으로써 조선을 깔려면 좀 폭넓게 조사 좀 하고 까세요.

꼴랑 가져온게 세종실록 10여편.........

제가 역사에 관심이 존나게 많아서 이덕일 같은 유사역사학자들이 쓴 책들까지 포함해서 역사서만 한 1000권 넘게 읽고 조선왕조실록만 한 20번 읽었거든요?

이거 말고도 조선과 왜나라 비교해서 조선 깔거 존나게 많아요..

당연히 조선과 왜나라 비교해서 왜나라가 개털릴 건 더 많지만...

노오력을 하세요 제발

역센징도 노력이라도 해야 역센징이지

노력 없는 역센징은 그냥 음식물쓰레기보다 못한 존재입니다.

아시겠죠?

아! 그리고 역사사료를 토대로 그 내용을 자신이 꼴리는대로 단정지어 해석하고 판단하시는 것 같은데 정말 한심한 짓이에요

유명한 세계 역사학자들도 사료를 보고 추측을 하지 판단이나 단정을 짓지 않습니다.

어차피 역센징은 답이 없기 때문에 여기서 끝내겠습니다.

"조선" 문서로 돌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