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를 카우츠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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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광 우럭따 8ㅅ8
카를 요한 카우츠키
생년월일 1854년 10월 16일
사망일 1938년 10월 17일
국적 오스트리아 제국(1854~1867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1867~1918년)
오스트리아(1918~1934년)
체코슬로바키아(1934~1938년)
무국적(1938년)
종교 무신론

체코 출신의 민주사회주의자.

공산당 선언을 읽기 전에 먼저 다윈의 인간의 기원을 먼저 읽었다. 다윈은 진화라는 것은 아주 점진적으로 발생하는 것이라고 여겼는데, 카우츠키는 이 견해를 평생토록 받들어서 늘 되도록 개혁을 선호했다.

이후 엥겔스와 교류하면서 마르크스주의자가 됐고, 1891년 에르푸르트 강령 전반부를 쓰기도 했다. 에두아르트 베른슈타인과 친구이기도 했다. 엥겔스가 1895년 사망한 이후부터 제1차 세계대전까지 20년 가량의 세월동안 마르크스주의의 최고권위자로 꼽혔다. 룩셈부르크, 레닌, 트로츠키, 스탈린 등등도 카우츠키의 분석에 의존했었고, 카우츠키는 아예 마르크스주의의 교황으로까지 불렸다.

그러나 러시아 제국에 대해서는 너무 후진적이라는 이유로 혁명을 용인한 반면, 서유럽에 대해서는 개혁을 우선시했기 때문에 개량주의도 혁명주의도 아닌 중간파로 여겨졌다. 이러한 애매함은 계속해서 볼셰비키와 충돌하는 요소가 됐다. 가령 본인이 활동하고 있던 독일에 관해 전쟁 공채에는 개인적으로 반대하면서 공개적인 비판은 거부했다. 제1차 세계대전 발발 이후에는 독일이 러시아에 맞서 방어전쟁을 하는 것이라고 주장했고, 독일의 야욕이 노골화된 1915년 경에 들어서야 전쟁에 반대하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제국주의론을 제기하기 시작했는데, 나중에 레닌 등이 주장한 것과는 달리 제국주의가 자본주의의 정점도 필연적 단계도 아니며, 오히려 자본주의가 최고 수준에 이르게 되면 합리적으로는 경제적 상호의존성을 고려해서 제국주의를 지양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제국주의란 정치인들의 비합리적 선택으로 인해 계속되는 비합리적 현상일 뿐이고,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당연히 볼셰비키에서는 이 주장에 반대했다.

그러나 진정으로 카우츠키와 볼셰비키가 서로 틀어지게 된 것은 볼셰비키 혁명 이후부터다. 볼셰비키가 혁명을 이르키고서 점차 비민주적으로 행동하자 카우츠키가 이를 비판했다. 그러자 레닌이 프롤레타리아 혁명과 배신자 카우츠키를 써서 카우츠키를 배신자로 낙인찍었고, 이내 볼셰비키 전체가 그와의 관계를 끊어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우츠키는 초제국주의론, 민주주의 강조 등의 자신의 견해를 평생토록 굽히지 않았다. 다른 한편으로는 더는 보편적으로 인정받는 마르크스주의의 교황같은 것은 없게 돼서 현재까지 그 상태가 이어지고 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에도 계속 활동하다가 1933년부터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서 파시스트들이 부상하자 국적을 체코슬로바키아로 옮겼다. 1938년에 안슐루스가 벌어지자 프라하로 망명했다가, 독일이 체코슬로바키아마저 장악하자 네덜란드로 망명했다. 그곳에서 아리스토텔레스마냥 가난하고도 쓸쓸하게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