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데미안
토론 1
[원본 편집]기본적으로 기독교적인 세계관을 깔고 들어가는 책이다. 기독교적 전통이 없는 한 읽기 굉장히 난해한 텍스트다. 추가로, 이 책의 데미안이라는 인물은 니체가 주장하는 초인의 영향을 받았다.
- 이 책이 기독교적 테마를 바탕으로 저술되었다고 하는 새끼는 헤르만헤세에 대해서 조또 모르는 빠가새끼인게 분명하다.
헤르만헤세가 외조부의 영향을 받아 인도 힌두교와 불교적 관점이 심오하게 스며들어있다.
자아를 찾아가는 내용 또한 불교에서 말하는 열반과 해탈과 매우 유사하다.
기독교적 종교관이라고 하는 새낀 겉멋만 든 새끼가 분명하도다.- 흰두교,불교적인게 다른책인 싯다르타와 유리알 유희에서처럼 사상의 중심이 되는건 맞다.
하지만, 카인과 아벨에서의 카인의표적, 십자가와 죄인, 에바부인의 이름 뜻에 있는 이브의 의미 등 기독교적인 내용을 알아야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 있는건 사실이다.
애초에 헤르만 헤세가 동양철학/종교에 진짜 심취하기 이전에 쓴 것이라 그런지 이 책에는 동양적인 이야기도 별로 없다.
- 흰두교,불교적인게 다른책인 싯다르타와 유리알 유희에서처럼 사상의 중심이 되는건 맞다.
아니다. 기독교적이라기보단 영지주의에 가까운 세계관이다.
초반에 주인공이 말하는 빛과 어둠으로 갈린 두개의 세계, 그리고 데미안이 남기고 간 쪽지에 쓰여있던 상반된 두개의 모습을 모두 가진 신으로 표현되는 압락사스, 그리고 주인공을 깨달음으로 이끄는 자 데미안과 여성과 남성의 모습이 혼재된 여인의 화신인 에바 부인까지...
소설의 처음부터 끝까지 영적인 것과 관련되어 이야기가 진행되고 주인공이 각성해나가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특히 압락사스라는 신은 영지주의 문헌에서 언급되는 이름이다. 이런 성향은 헤세의 다른 작품들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 영지주의에 더 가까운 세계관이라는 것에는 이견이 있다. 선과 악, 신앙과 비신앙 등, 대립되는 관계를 나누는 이원론적인 태도가 비단 영지주의의 고유적인 특징이 아니다. 굳이 따지자면 영지주의는 보다 극단적인 이원론을 보이는 거겠지만 말이다. 물론, 설정 등에서 영지주의에 영향을 받았다는건 팩트다. 하지만, 영지주의를 떠올리게하는 내용은 압락사스, 빛과 어둠에 대한 비유 정도를 빼곤 그다지 없다. 좀 더 이야기하자면, 이원으로 나눈것들 중 어느 쪽도 부정되거나 모른척하지 말아야한다고 하므로, 사상적으론 영지주의와 대척점에 서 있는 것이다.
- 극단적인 이원론이 영지주의만의 특성이 아니란건 맞지만 이원론은 영지주의의 특징이 맞다는 것도 사실이다. 헤세가 추구하는 영적 깨달음과 깨달음을 얻은자라는 테마와 데미안에서의 세계관은 분명 영지주의가 베이스가 되고 있으므로 몇가지 비유를 뺴놓곤 영지주의를 떠올리게 하는게 그다지 없다는 말도 맞지 않다. 데미안이 싱클레어를 본 첫날 자신과 같은 표적을 지닌 아이를 보았다고 말하는 부분 또한 영지가 있는 자와 없는 자를 구분해서 보는 시각을 나타내는 부분이며 표적을 지닌자 라는 건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소수의 존재를 가르키는 표현이다. 그리고 책에서 이른건 어둠과 속박으로부터 빛과 자유로 나아가는 내용이니 영지주의의 사상과 전혀 대척점에 서있지 않다.(처음부분 어린 싱클레어가 빛과 어둠을 깨닫고 크로머에게 속박 당하다가 데미안을 만나고 표적을 깨닫고 인도받다 마침내 스스로 알을 깨고 나온다가 핵심적인 내용인 것이다.)
- 싱클레어는 어둠에서 빠져나왔다기 보단 빛과 어둠, 그 어느쪽에 속해있거나 그에 속박되지 않게되었다고 보므로 대척점에 있다고 한것이다. 알다시피, 싱클레어는 어릴적 어둠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게 전이나 후나 빛의 세계에서도 신앙으로 자신의 생각을 결박했고, 나이가 조금 든 뒤에는 또 다른 어둠의 세계에서 악독함으로 자신을 궁지에 몰아넣었다. 책의 내용은 신앙과 무신앙, 선과 악, 빛과 어둠의 구분/압력에서 벗어나 압락사스를 찾아내는 과정이니, 어찌보면 단순히 한 세계에서 다른 한 세계의 이전을 뜻하는 영지주의의 목적과는 다르다고 할 수 있다. 그렇기에, 알은 세계이고, 태어나려는 자는 알을 깨고 나와야한다는 이야기를 한 것이 아닐까?
- 영지주의에서 어둠과 속박은 동의어이고 빛과 자유 또한 동의어이다 그런 의미에서 싱클레어가 계속된 속박(어둠)과 싸워 마침내 알을 깨고 나온다. 즉 자유를 향해 날아오른다는 것을 의미한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신의 이름은 압락사스. 이것이 사실상 책을 관통하는 핵심적인 문장으로 읽히는 것은 바로 그 이유에서이다. 알은 속박을 뜻하고 그것을 깨고 압락사스(신)에게 날아간다는 것은 깨달음을 얻어 자유를 얻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신앙과 기독교적인 가치도 깨달음을 얻기 전에 반드시 깨야 할 속박(세계)의 일부분 즉 혼돈일 뿐이므로 신에게 날아가는 진정한 깨달음이라는 영지주의의 사상과 일치한다. 즉 책에서 나오는 싱클레어를 속박하는 것들은 전부 혼돈이고 거기서 깨달음을 얻어 탈출하는 것이 이 책에 주된 내용이다 그러므로 영지주의의 목적과 다르다는 앞의 주장은 맞지 않는다.
- 싱클레어는 어둠에서 빠져나왔다기 보단 빛과 어둠, 그 어느쪽에 속해있거나 그에 속박되지 않게되었다고 보므로 대척점에 있다고 한것이다. 알다시피, 싱클레어는 어릴적 어둠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게 전이나 후나 빛의 세계에서도 신앙으로 자신의 생각을 결박했고, 나이가 조금 든 뒤에는 또 다른 어둠의 세계에서 악독함으로 자신을 궁지에 몰아넣었다. 책의 내용은 신앙과 무신앙, 선과 악, 빛과 어둠의 구분/압력에서 벗어나 압락사스를 찾아내는 과정이니, 어찌보면 단순히 한 세계에서 다른 한 세계의 이전을 뜻하는 영지주의의 목적과는 다르다고 할 수 있다. 그렇기에, 알은 세계이고, 태어나려는 자는 알을 깨고 나와야한다는 이야기를 한 것이 아닐까?
- 극단적인 이원론이 영지주의만의 특성이 아니란건 맞지만 이원론은 영지주의의 특징이 맞다는 것도 사실이다. 헤세가 추구하는 영적 깨달음과 깨달음을 얻은자라는 테마와 데미안에서의 세계관은 분명 영지주의가 베이스가 되고 있으므로 몇가지 비유를 뺴놓곤 영지주의를 떠올리게 하는게 그다지 없다는 말도 맞지 않다. 데미안이 싱클레어를 본 첫날 자신과 같은 표적을 지닌 아이를 보았다고 말하는 부분 또한 영지가 있는 자와 없는 자를 구분해서 보는 시각을 나타내는 부분이며 표적을 지닌자 라는 건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소수의 존재를 가르키는 표현이다. 그리고 책에서 이른건 어둠과 속박으로부터 빛과 자유로 나아가는 내용이니 영지주의의 사상과 전혀 대척점에 서있지 않다.(처음부분 어린 싱클레어가 빛과 어둠을 깨닫고 크로머에게 속박 당하다가 데미안을 만나고 표적을 깨닫고 인도받다 마침내 스스로 알을 깨고 나온다가 핵심적인 내용인 것이다.)
- 아니다. 영지주의와는 다르다. 영지주의는 어둠의 세계에서 탈출하는, 단순히 더 낮고 어지러운 곳에서 완벽하고 본질적으로 옳은 곳으로 옮겨가 빛과 진리를 되찾는 것이다. 그와 반대로 데미안 내에서 그 사람이 운명을 찾는 것이 중요한 것이지, 그가 시인이나 미치광이나 예언가나 심지어 범죄자가 될지라도,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1]고 했던 것과 같이, 속박에서 벗어남은 단순히 그를 내던지는 것이 아닌, 이원론적 나눔에 집착하는 것을 그만두고, 그것이 무엇이던간에 자신을 찾아가는 것이다. 굳이 따지자면 해탈과 비슷한 경우일 것이다. 그리고 추가로, 싱클레어가 환상에서 경험했던 "여인"의 경우 또한, 어느 한 면의 모습을 보이거나 부정하기보다는, 이원의 융합으로 나타난다. 이렇듯이 데미안의 주제의식은 이원론적인 그 무엇이 아닌, 이원에 얽매여 본질을 왜곡하거나 운명을 회피하는 것을 그만두고, 자신의 운명을 찾아나서는 것을 이야기하지, 단순히 더 나은 세계로 날아가는 것을 이야기하는게 아니다. 후반에 싱클레어가 신체적/외부적 세계와 충돌하여 마침내 결과를 얻었다는 것을 보면 더 확실해지겠다만, 자신을 얽매는 세계관을 깬다는 것은 그 과정이다.
- 그 사람의 운명이란 영지주의에서 영적인 인간, 정신적인 인간, 물질적인 인간로 나눠진 인간의 운명을 뜻하며 시인이나 범죄자 또한 그냥 물질세계의 일부일 뿐이다. 지금 앞의 주장은 급진적이고 절대적인 이원론만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고 완화된 이원론에선 물질적인 세계에서 탈출해서 빛과 자유를 찾는것 즉 신(데미안에선 이것을 압락사스로 표현했다.)에게 가는 것이 목표이며 이것은 데미안의 내용 그 자체다. 해탈이라는 주장은 영지주의에서 이르는 초월이라는 부분에서 일맥상통 하지만 이것 또한 표적이라고 말하는 영지가 등장하는 데미안에서는 완벽히 들어맞는다 볼 수 없다. 이원론에 얽매이는 것이 아니라 혼돈 즉 물질세계에서 자신의 운명을 찾아서 지키는 일을 뜻하는 것이다. 싱클레어가 가진 표적(운명)이 그것을 대표한다. 특히 데미안이 처음 싱클레어의 표적에 대해 이야기 할때 카인의 이야기를 하며 그가 진정으로 강한자이기 때문에 표적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는 부분 역시 영지주의 분파인 카인파의 영향으로 보이는 부분도 존재한다. 이 모든 의미와 상징들은 분명히 영지주의를 가르키는 것이며 영지주의가 베이스로 깔려있다는 것을 저자는 책 속 여기저기 여러 상징으로 암시해놓았다.
- 정말로 데미안이 단순히 물질세계에서 벗어나서 정신적인 성장을 이루는 것만을 이야기했다면, 그 주장에는 완전히 동의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정신, 내부세계의 충돌로 싱클레어는 성장했지만, 그 완성은 외부세계의 사건에 의해 이루어지지 않았는가? 이를 단순히 혼돈에서 벗어나기 위한 영혼적인 몸부림이 중요하다고 표현하기에는 결말부에 대한 회의가 남는다. 정말 영지주의적인 이야기로 끝이 나려면, 싱클레어가 엠마부인과 만나고 완성되어야했다. 하지만, 그런 그도 물질세계의 커다란 충돌로 바스러지고 깨지고 나서야 이야기의 끝을 보였다는 것이다. 여기서 운명을 찾으라는 말은 단순히 혼돈과 물질세계에서의 초월을 뜻하는게 아닐 것이다. 오히려 그런 구분이야말로 대립되는 양면의 동일한 이해, 지적 수용이라는 작품의 전개에 반발하는 것이 아닐까싶다.
- 싱클레어는 육신을 지닌 물질세계의 존재다. 영지주의에서 물질적인 세계란 깨달음을 막는 장애물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그렇기에 싱클레어가 물질세계에 장애물들과 부딪치면서 그것을 극복해나가는 것은 영지주의적인 관점이 맞다. 그런데 이것을 이 이야기가 영지주의의 영향을 받았다고 보기 어려운 이유로 꼽는다는 것은 영지주의를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같은 이유로 책의 마지막이 에바부인과의 만남으로 끝맺었어야 한다는 것도 설득력이 없다. 책의 마지막에서 데미안은 싱클레어에게 너의 내면에 귀를 기울이라고 말하고 에바부인의 키스를 전하고 사라진다. 그리고 싱클레어 깨어나서 알을 깨고 나온 자신을 본다. 이것은 물질세계에서의 고난과 장애물을 헤치고 싱클레어가 마침내 내면의 목소리를 듣고 영적인 인간으로 각성했다는 상징적인 장면이다.
- 데미안 내에서는 물질세계를 부정하라는 말이 없고, 다만 한쪽을 긍정하면 다른 한쪽을 긍정해야 한다는 말이 나오는데, 이는 그러한 것들이 장애물처럼 앞을 가로막는 것이 아닌 하나의 길처럼 되어서 이끈다는 것이다. 그가 해야할 것은 그 길을 아는 것 뿐이었는데, 받아들임을 통해 앞으로 나아간다는 사상은 영지주의보단 불교나 다른 것들에 가깝지 않은가? 그런식의 깨달음은 수행을 기초로하는 다른 종교나 의식 또한 목표로 하는데 그것을 영지주의적이라고만 할 수 있을까? 단지 그가 불완전한 세계에서 역경을 해치고 완전해졌다는 이유로 영지주의라 한다면 그것은 참 이해하기 힘든 일일 것이다.
- 그들은 바깥에 있는 물상들만 현실로 생각해서 마음속에 있는 그들 자신의 세계가 전혀 발언되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야(152p) 데미안에선 분명 바깥(물질세계) 때문에 자신의 세계가 발언되지 못한다는 것을 분명히 한다. 이것은 물질세계가 장애물 역할을 하고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못박는 문장이다. 불교의 교리와 비슷하다는 주장은 앞에서도 말하지만 표적으로 상징되는 영지의 존재 때문에 올바른 설명일 수가 없다. 그리고 표적은 빛과 어둠의 세계를 바로 보는 눈이며 그로인해 궁극적인 깨달음에 다다르는 것이 목표이다. 압락사스가 두가지가 혼재된 신으로 표현되는 것은 그 이유에서이다.
- 작품 외적으로 보면 헤르만 헤세는 동양철학과 불교에 대한 관심과 지식이 있었다. 이에 위에서 말한 이유들로 테마나 배경, 상징이라는 것 때문에 "깨달음을 얻어 성장하고 완성되어가는 것"이라는 주제를 무조건적으로 영지주의에만 묶을 수는 없다고 한 것이다. 그리고 물상에 대한 서술은 그것이 당대 실존주의에 영향을 받아, 세계는 자아의 투사일 뿐이라는 뜻으로 이어진 것이지, 물질이 장애물이라는 이야기를 하기 위해 나온 것이 아니다. 그렇지 않다면 데미안 내에서 모든것은 그 자신 안에 있다.는 내용이 어찌하여 계속해서 되풀이 될 수 있었겠는가? 이는 세계가 장애물이라는 주장을 한 것이 아니라, 그것에 대한 실존주의적 해석을 보여준 것 뿐이다.
- 그들은 바깥에 있는 물상들만 현실로 생각해서 마음속에 있는 그들 자신의 세계가 전혀 발언되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야(152p) 데미안에선 분명 바깥(물질세계) 때문에 자신의 세계가 발언되지 못한다는 것을 분명히 한다. 이것은 물질세계가 장애물 역할을 하고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못박는 문장이다. 불교의 교리와 비슷하다는 주장은 앞에서도 말하지만 표적으로 상징되는 영지의 존재 때문에 올바른 설명일 수가 없다. 그리고 표적은 빛과 어둠의 세계를 바로 보는 눈이며 그로인해 궁극적인 깨달음에 다다르는 것이 목표이다. 압락사스가 두가지가 혼재된 신으로 표현되는 것은 그 이유에서이다.
- 데미안 내에서는 물질세계를 부정하라는 말이 없고, 다만 한쪽을 긍정하면 다른 한쪽을 긍정해야 한다는 말이 나오는데, 이는 그러한 것들이 장애물처럼 앞을 가로막는 것이 아닌 하나의 길처럼 되어서 이끈다는 것이다. 그가 해야할 것은 그 길을 아는 것 뿐이었는데, 받아들임을 통해 앞으로 나아간다는 사상은 영지주의보단 불교나 다른 것들에 가깝지 않은가? 그런식의 깨달음은 수행을 기초로하는 다른 종교나 의식 또한 목표로 하는데 그것을 영지주의적이라고만 할 수 있을까? 단지 그가 불완전한 세계에서 역경을 해치고 완전해졌다는 이유로 영지주의라 한다면 그것은 참 이해하기 힘든 일일 것이다.
- 싱클레어는 육신을 지닌 물질세계의 존재다. 영지주의에서 물질적인 세계란 깨달음을 막는 장애물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그렇기에 싱클레어가 물질세계에 장애물들과 부딪치면서 그것을 극복해나가는 것은 영지주의적인 관점이 맞다. 그런데 이것을 이 이야기가 영지주의의 영향을 받았다고 보기 어려운 이유로 꼽는다는 것은 영지주의를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같은 이유로 책의 마지막이 에바부인과의 만남으로 끝맺었어야 한다는 것도 설득력이 없다. 책의 마지막에서 데미안은 싱클레어에게 너의 내면에 귀를 기울이라고 말하고 에바부인의 키스를 전하고 사라진다. 그리고 싱클레어 깨어나서 알을 깨고 나온 자신을 본다. 이것은 물질세계에서의 고난과 장애물을 헤치고 싱클레어가 마침내 내면의 목소리를 듣고 영적인 인간으로 각성했다는 상징적인 장면이다.
- 정말로 데미안이 단순히 물질세계에서 벗어나서 정신적인 성장을 이루는 것만을 이야기했다면, 그 주장에는 완전히 동의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정신, 내부세계의 충돌로 싱클레어는 성장했지만, 그 완성은 외부세계의 사건에 의해 이루어지지 않았는가? 이를 단순히 혼돈에서 벗어나기 위한 영혼적인 몸부림이 중요하다고 표현하기에는 결말부에 대한 회의가 남는다. 정말 영지주의적인 이야기로 끝이 나려면, 싱클레어가 엠마부인과 만나고 완성되어야했다. 하지만, 그런 그도 물질세계의 커다란 충돌로 바스러지고 깨지고 나서야 이야기의 끝을 보였다는 것이다. 여기서 운명을 찾으라는 말은 단순히 혼돈과 물질세계에서의 초월을 뜻하는게 아닐 것이다. 오히려 그런 구분이야말로 대립되는 양면의 동일한 이해, 지적 수용이라는 작품의 전개에 반발하는 것이 아닐까싶다.
-헤세의 불교에 대한 관심과 지식에 관한 것은 이 문단 맨위에 사용자들이 적어놓은 부분을 보면 되겠다. 표적이라는 표현은 선천적인 것이다. 이것은 불교의 교리와 완벽하게 대치되는 부분이며 반대로 영지주의와 궤를 함께하고 있는 부분이다. 헤세가 데미안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이 실존주의적인 입장과 맞닿아 있는 부분이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표적과 압락사스의 존재 알을 깨고 신에게 날아가는 새라는 메타포는 분명 영지주의와 그 분파인 카인파의 영향이 존재했었다는 것에 대한 증거다. 그저 실존주의의 입각한 내용이었다면 이러한 영적인 꺠달음을 중요시하는 내용을 뭐하러 넣었단 말인가? 앞에도 말했듯 바깥의 물상만을 현실로 생각해서 마음속의 세계가 발언되지 못한다는 부분은 실존주의적 입장이라기 보단 물질적인 세계가 가로막는 영적인 내면 세계에 대한 이야기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
- 그것이 영적이거나 종교적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설명하자면, 압락사스=신=자아, 싱클레어=완성된 인간[2] 그리고 종교적 관습에서 벗어나 운명(자신)을 찾는다는 것은, 니체가 말한 초인 사상과 관련이 크다. 또한, 실존주의는 유신론적 실존주의와 무신론적 실존주의로 나뉜다. 헤르만 헤세가 뚜렷한 종교가 있던 것으로 보이진 않으나 종교에 대한 존중을 작품집필들을 통해 보인다. 그로 인해서인지, 신비주의적/주술적인 내용과 서술이 더해졌고, 결국엔 종교와 영을 쫒으며, 그러한 것들에 대한 깨달음을 얻는 것처럼 받아들이기 쉽다는 것은 이해한다. 하지만 나는 그 모든 것이 단지 한 테마에 집중하고 그것에 종속시킨 것이 아님을 말할 수 밖에 없다. 그 모든 것이 뒤엉켰으나, 비단 특정한 방향성을 가지지 않은 것이다. 그 토대를 말하자면 초인이나 실존주의, 깨달음 등이 있겠지만, 겨우 그런것들만으로 설명해지기엔 이 작품에 의해 말해질 수 있는 것이 보다 많지 않은가?
- 확실히 이 작품이 실존주의와도 맞닿아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비단 이 작품은 내재적 가치만을 중요시 여기지 않고, 거기서 더 나아가 초월적인 가치를 긍정하고 있다. 앞에 사용자가 문서에 적어놓은 대로 니체의 초인사상이 엿보이는 것도 사실이다.(반드시 둘이 같은 궤를 달린다고는 볼 수 없지만 이것의 영향을 간과할 수는 없을 듯하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점은 싱클레어를 본 데미안이 말한 표적의 존재다. 만약 이것이 실존주의적 이야기라면 이 표적의 존재는 상당한 모순점이다. 데미안은 오직 싱클레어에게서만 표적의 존재를 봤으며 그것은 타고난 것 즉 선천적이란 것이다. 이것의 존재는 영지주의와 궤를 같이하며 이 이야기가 영지주의 특성인 영지를 가진 자를 표현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저 단순히 종교적으로 읽기가 쉬워서가 아니라 책 속에 존재하는 상징점들을 읽다보면 분명 실존주의만으로는 완벽한 해석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물론 나도 헤세의 데미안이 영지주의만으로 설명할 수 있는 텍스트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분명 영지주의에 대한 내용이 베이스를 작성하는데 도움을 준 것은 사실이란 이야기이다.
- 표적이나 신비주의, 주술적인 내용들은 헤세의 장치일 뿐이다. 그가 얼마나 종교와 영혼을 사랑하는 (그러나 그가 믿는 신이 어느 경전인지, 또는 경전 상에 있기나 한건지 막연한 것인지는 그 누구도 모르겠지만) 인물인지 잘 알잖은가? 또한 표적이 타고났다는 것은 그가 자신을 찾아 떠돌게 될 것이라는 암시를 보여주는 것이고, 결국 그 또한 그 내부의 표상임을 나중에 알게되지 않는가? 결말부에 싱클레어가 어떻게 되는지를 기억하라.
- 만약 표적이 그저 그런 장치에 불과했다면 작중에서 오직 싱클레어와 데미안 에바부인만이 표적을 가지고 있고, 그들만이 나를 소유할 수 있는 소수의 존재들이라는 이유는 무엇인가?(나를 표현할 수 있는 소수의 존재들이란 건 나의 해석이다 정확히는 표적을 지닌 소수의 존재들이라고 하는 것이 맞다. 오해의 소지가 있는 것 같아 덧붙인다.) 그것이 소수여야 할 이유가 하등 없다. 그럼에도 작중에선 그것이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있는 것이란걸 강조한다. 이것은 불교 교리와 대치되며 실존주의로도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다.
- 표적이나 신비주의, 주술적인 내용들은 헤세의 장치일 뿐이다. 그가 얼마나 종교와 영혼을 사랑하는 (그러나 그가 믿는 신이 어느 경전인지, 또는 경전 상에 있기나 한건지 막연한 것인지는 그 누구도 모르겠지만) 인물인지 잘 알잖은가? 또한 표적이 타고났다는 것은 그가 자신을 찾아 떠돌게 될 것이라는 암시를 보여주는 것이고, 결국 그 또한 그 내부의 표상임을 나중에 알게되지 않는가? 결말부에 싱클레어가 어떻게 되는지를 기억하라.
- 확실히 이 작품이 실존주의와도 맞닿아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비단 이 작품은 내재적 가치만을 중요시 여기지 않고, 거기서 더 나아가 초월적인 가치를 긍정하고 있다. 앞에 사용자가 문서에 적어놓은 대로 니체의 초인사상이 엿보이는 것도 사실이다.(반드시 둘이 같은 궤를 달린다고는 볼 수 없지만 이것의 영향을 간과할 수는 없을 듯하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점은 싱클레어를 본 데미안이 말한 표적의 존재다. 만약 이것이 실존주의적 이야기라면 이 표적의 존재는 상당한 모순점이다. 데미안은 오직 싱클레어에게서만 표적의 존재를 봤으며 그것은 타고난 것 즉 선천적이란 것이다. 이것의 존재는 영지주의와 궤를 같이하며 이 이야기가 영지주의 특성인 영지를 가진 자를 표현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저 단순히 종교적으로 읽기가 쉬워서가 아니라 책 속에 존재하는 상징점들을 읽다보면 분명 실존주의만으로는 완벽한 해석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물론 나도 헤세의 데미안이 영지주의만으로 설명할 수 있는 텍스트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분명 영지주의에 대한 내용이 베이스를 작성하는데 도움을 준 것은 사실이란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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틀 내용을 충분히 숙지하시고 스크롤을 내리셨습니까?
왜냐하면 그들이 싱클레어의 투영이자 운명이기 때문이다! 답답하니까 걍 스포지르겠다! 마지막에 싱클레어가 데미안의 모습이 되는거 보고도 표식에 대한 답이 안나오는가?
- 맨앞에서 이야기 했듯이 주인공을 깨달음으로 이끄는 자인 데미안으로 인해 싱클레어가 각성하는 것은 사실이다. 데미안(앎)은 표적(영지)를 지닌 자인 싱클레어를 이끈다. 그들의 싱클레어의 운명인 이유는 그들이 같은 표적(영지)을 지지고 있었기 때문이고 그것을 싱클레어와 처음 본 순간 데미안(앎)은 깨닫고 싱클레어에게 깨닫게 해주었기 떄문이다. 그리고 마침내 종국에는 싱클레어(영지를 지닌자)가 데미안(앎)에 다다른 것이다.
- 데미안과 주술들은 싱클레어 자신이 자아에 대한 무의식적 욕구를 세계에 투영한 환상에 지나지 않았고, 그 환상을 통해 결국 자아를 찾아간다는 이야기면 어떨거같나?
- 만약 그들이 싱클레어만의 투영이고 운명이라면 거기선 표적에 대해서 소수라 표현하지 않아야 한다 우리뿐이라고 말해야 말이 되지
- 그들만이 "나를 소유할 수 있는" 소수라는 것이므로 운명이 맞다. 그리고 그것이 소수든 아주 조금이든 쬐에깨든 어 퓨이던간에 그 둘을 이야기 하는 것인데 선천적인 한정인 것처럼 이야기 하는 것인가?
- 그러니까 이것이 싱클레어가 투영한 환상이라면 "나를 소유할 수 있는 소수"가 아니라 "나를 소유할 수 있는 오직 두사람"이라야만 맞다는 것이다. 굳이 소수라고 숫자를 정해놓지 않은 이유가 뭐겠는가? 정말 그 두사람만이 운명이고 싱클레어의 투영이라면 오직 그 둘이라고 했어야 한다. 왜 자신들만이 아닌것 같은 여지를 남겨두었겠는가?
- 그들만이 "나를 소유할 수 있는" 소수라는 것이므로 운명이 맞다. 그리고 그것이 소수든 아주 조금이든 쬐에깨든 어 퓨이던간에 그 둘을 이야기 하는 것인데 선천적인 한정인 것처럼 이야기 하는 것인가?
- 만약 그들이 싱클레어만의 투영이고 운명이라면 거기선 표적에 대해서 소수라 표현하지 않아야 한다 우리뿐이라고 말해야 말이 되지
- 데미안과 주술들은 싱클레어 자신이 자아에 대한 무의식적 욕구를 세계에 투영한 환상에 지나지 않았고, 그 환상을 통해 결국 자아를 찾아간다는 이야기면 어떨거같나?
-소수이던 둘이던 표현의 차이일 뿐인데 그것의 뉘앙스로 확대해석하는가? 그것이 확실치 않은데 몰고가는 것은 단지 궤변이다.
- 참나 그렇다면 그둘이 그저 싱클레어의 투영이고 환상이라는 그 생각도 궤변이라고 봐도 좋은 것인가? "나 자신을 소유할 수 있는 소수의 존재들"을 헤세 자신은 표적을 가진 자로 표현했다. 이것은 분명 선천적인 소수를 뜻하는 표현이 아닌가?(아까부터 오해가 있는것 같아 말하는 건데 나를 소유할 수 있는 소수의 존재들이란 표현은 내 해석이다. 정확히는 표적을 가진 소수의 존재들이 맞다.)
- 아무렴 궤변에 매달려서 하는 말보다야 합리적일 것이다. 표적을 가졌다는 것이 정말 선천적인 것인지 자아에 대한 의지나 무의식적 소망에서 나오는 것인지 정확히 알 수 있는 것도 아닌데 -그것이 또한 비유이고- 단지 소수라는 이유로 본질적으로 타고나는 것이라 생각하는 것이 우스운 일이다. 그렇다면 데미안에서의 자아찾기와 운명에 대한 것들은 단지 아름다운 이야기 그 이상도 이하도 못된다.
- 아니 표적 자체는 소수의 사람만이 가졌다고 분문에 언급한다. 내가 이것을 나를 소유할 수 있는 존재라고 해석한 것일뿐 표적은 소수의 사람이 가지고 있다고 작중에서 표현한 이유에 대한 해석으로 이 책이 영지주의에 영향을 받았다는 수많은 상징적 증거와 설명이 궤변이란 것이라고 주장할 합당할 근거를 내놓지 못한채로 자신의 다른 해석만을 내밀며 이게 합리적이야라고 떠드는 것이 훨씬 더 궤변이다. 헤세가 영적인 것에 관심이 많다는 것을 그쪽에서 먼저 언급하지 않았는가?
- 그런식의 해석이라면 이렇게해도 될것이다라고 비꼰 것이기 때문이다. 달리말하자면, 단지 해석이라고 말할 뿐이면서 그것이 사실인 것 마냥 자신의 주장을 부풀리기만하는 것에 진저리가 났기 때문이다. 그리고 영적인 것에 관심이 많다는게 그 주장에 힘을 실어주는 것이 아닌, 단지 그렇기에 종교거나 그런것으로 보이는 것들이 많이 들어갔다는 것이다. 이거 참 얼마 전까진 사람과 이야기 하는 것 같았는데, 이제는 축음기와 대화하는 것 같아서 좀 그렇다.
- 책에 나오는 상징들이 실제로 영지주의의 사상과 맞닿은 부분이 많다는 것은 사실인데 그것을 이야기한 것이 부풀리기라니 자의적 해석으로 부풀리기는 아까부터 스스로 해놓고선 적반하장이다. 내가 자의적으로 해석해서 오해가 생긴 부분은 앞에 그 부분 뿐이고 이것에 대해선 오해의 여지가 있었다고 해명했다. 그리고 영적이나 종교적인 부분이 큰비중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은 팩트인데 왜 그 부분을 인정하면서도 이렇게 계속 쓸데없는 사족을 다는지 모르겠다. 결국 그 사족이란 것도 자의적인 해석과 부풀리기 아닌가? 그런 사족들 떄문에 짜증스러워서 나도 지쳤다. 이 책이 영지주의에 영향 받은 것은 어느방면으로 보나 확실한 사실인데 이것에 토를 더 달 부분이 뭐가 있는지 모르겠다. 아까부터 쓸데없는 트집과 사족만 늘어놓고 있지 않은가?
- 그런식의 해석이라면 이렇게해도 될것이다라고 비꼰 것이기 때문이다. 달리말하자면, 단지 해석이라고 말할 뿐이면서 그것이 사실인 것 마냥 자신의 주장을 부풀리기만하는 것에 진저리가 났기 때문이다. 그리고 영적인 것에 관심이 많다는게 그 주장에 힘을 실어주는 것이 아닌, 단지 그렇기에 종교거나 그런것으로 보이는 것들이 많이 들어갔다는 것이다. 이거 참 얼마 전까진 사람과 이야기 하는 것 같았는데, 이제는 축음기와 대화하는 것 같아서 좀 그렇다.
- 아니 표적 자체는 소수의 사람만이 가졌다고 분문에 언급한다. 내가 이것을 나를 소유할 수 있는 존재라고 해석한 것일뿐 표적은 소수의 사람이 가지고 있다고 작중에서 표현한 이유에 대한 해석으로 이 책이 영지주의에 영향을 받았다는 수많은 상징적 증거와 설명이 궤변이란 것이라고 주장할 합당할 근거를 내놓지 못한채로 자신의 다른 해석만을 내밀며 이게 합리적이야라고 떠드는 것이 훨씬 더 궤변이다. 헤세가 영적인 것에 관심이 많다는 것을 그쪽에서 먼저 언급하지 않았는가?
- 아무렴 궤변에 매달려서 하는 말보다야 합리적일 것이다. 표적을 가졌다는 것이 정말 선천적인 것인지 자아에 대한 의지나 무의식적 소망에서 나오는 것인지 정확히 알 수 있는 것도 아닌데 -그것이 또한 비유이고- 단지 소수라는 이유로 본질적으로 타고나는 것이라 생각하는 것이 우스운 일이다. 그렇다면 데미안에서의 자아찾기와 운명에 대한 것들은 단지 아름다운 이야기 그 이상도 이하도 못된다.
- 참나 그렇다면 그둘이 그저 싱클레어의 투영이고 환상이라는 그 생각도 궤변이라고 봐도 좋은 것인가? "나 자신을 소유할 수 있는 소수의 존재들"을 헤세 자신은 표적을 가진 자로 표현했다. 이것은 분명 선천적인 소수를 뜻하는 표현이 아닌가?(아까부터 오해가 있는것 같아 말하는 건데 나를 소유할 수 있는 소수의 존재들이란 표현은 내 해석이다. 정확히는 표적을 가진 소수의 존재들이 맞다.)
-하나부터 열까지 다른것은 묵살하고 영지주의만을 이야기하는데, 그 근거마저 멋대로면 내가 화가 안나겠나? 하다못해 내가 내세운 실존주의와 초인의 근거마저 한 부분이라고 일축하면서까지 말하지 않았으면 인정했다. 풀에서 추출한 바닐린과 우유 설탕 착향료 등을 섞어 만든 아이스크림이 자연그대로의 풀맛과 비슷하게 날거라고 생각하는 것이 놀라운 것이라고 말하는거다.
- 그래서 표적에 대한 해석은 내 자의적인 해석이었다고 오해의 소지가 있었다고 앞에 밝혔지 않았나? 그리고 실존주의나 초인사상을 나는 무시한 적이 없고 그것이 한 부분이라고 인정했다. 근데 마치 내가 영지주의만으로 텍스트를 해석하려는 것마냥 그렇게 이해하는게 쉽겠지라는 뉘앙스를 보인건 그쪽이다. 나는 이 책이 영지주의적인 관점만으로 쓰여졌다고 주장한 적이 없다 그것이 베이스를 구성하는 데에 큰 몫을 했다고 말하는 거지 그런데 이것마저 부정하기 위해서 자의적인 해석을 내밀고 이게 맞아 하고 몰아간 것도 당신이다. 그리고 그러다보니 자의적인 해석 대찬치가 열린 것이지
- 영지주의를 부정한적은 없다. 단지 그게 핵심의 큰 부분이라고 하면 아니라고 했다. 그리고 그 사상과 같냐고 하면 그것에 대해 반대했지, 그런 영향이 없다고 못박진 않았다. 그것급진적인 이원론과 그리 급진적이진 않은 이원론의 차이를 잘 아는 그쪽에겐 그러겠다. 만약 부정했다고 한다면 그쪽이야말로, 실존주의에 의해 판단된 세상이라는 것은 그저 겹치는 부분이 있는 것일 뿐이고 결국 다 영지주의라는 것의 문어발 아래에 묶여있다고 말했다. 이런데도 당신이 인정했다고? 아니, 겹친 부분이 있다고만 말한 것이다. 그것도 단지 영지주의랑 안타깝게도 자리싸움하기엔 작다고.
- 아니 오해가 있는 것 같은데 일단 내 주장은 이 책의 베이스는 영지주의가 깔려있다는 것이고 실존주의적 성격도 분명 존재한다. 그런데 그 두개 다 이 책의 핵심은 당연히 아니다. 그래서 궤를 같이 하는 부분이 존재한다고 말한 것이고 이건 실존주의만으로 이 텍스트를 다 이해할 수는 없다고 얘기한 것이지 영지주의가 이 텍스트를 이해하는데 핵심이란 주장이 아니다. 영지주의만으로 이 텍스트를 이해할 수 없듯 실존주의만으로 이 텍스트르 이해할 수 없어서 겹치는 부분이 존재한다고 한것이다. 그런데 계속 영지주의에 대한 설명은 자의적 해석으로 이렇게 생각하면 어떻겠나?하고 부정하려 들길래 난 그 부분을 반박한 거다.
- 영지주의를 부정한적은 없다. 단지 그게 핵심의 큰 부분이라고 하면 아니라고 했다. 그리고 그 사상과 같냐고 하면 그것에 대해 반대했지, 그런 영향이 없다고 못박진 않았다. 그것급진적인 이원론과 그리 급진적이진 않은 이원론의 차이를 잘 아는 그쪽에겐 그러겠다. 만약 부정했다고 한다면 그쪽이야말로, 실존주의에 의해 판단된 세상이라는 것은 그저 겹치는 부분이 있는 것일 뿐이고 결국 다 영지주의라는 것의 문어발 아래에 묶여있다고 말했다. 이런데도 당신이 인정했다고? 아니, 겹친 부분이 있다고만 말한 것이다. 그것도 단지 영지주의랑 안타깝게도 자리싸움하기엔 작다고.
자의적 해석이고 자시고 서로가 가진 이견을 맞부딪히면서 서로 비판한건데 뭔 소린가? 나는 또한 그쪽의 해석도 자의적해석으로 느껴서 깐 것이다. 실존주의를 말하기 이전부터 영지주의 중심적인 해석(물질/정신)에 대해 회의한 것이고. 그래서 그 해석에 대해 비판하기 위해 그 견해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면 좀 다르지 않냐고 한 것이다. 그런데 그냥 이원론도 아니고 완화된 이원론이라니? 그런 코에걸면 코걸이 귀에걸면 귀걸이식 해석으로 압박했으면서 자의적해석이라 말하는가? 그런식으로 해석하면서 길은 영지주의로 통한다고 했는가? 영지주의의 영향을 받은 것과 영지주의적인 해석이 자유로운 것과는 다르다. 그런데 애초에 영지주의적이라고 선언한 것은 어느 이였다.
- 압락사스의 존재에 대해 자아로 치환된다고 영지주의 영향이 아니라는 주장부터 자의적인 해석이 아닌가? 나는 헤세의 작품 속에 나타나는 영지주의의 상징들에 대해서 앞에서 계속 설명했었다. 당신이 앞에서 계속 이원론에만 집착하길래 그런 절대적 급진적 이원론만이 아니라 완화된 이원론을 예로 든 것이다. 더 나아가서는 제한된 일원론도 있지만 아무튼 영지주의는 앎에 의해 구원된다는 큰틀안에 수많은 분파가 있어서 절대적인 이원론만으로는 이 텍스트에 대한 설명이 불가능 하기 때문에 얘기한 것이다.
- 그리고 애초에, 어느 순간에는 영지주의의 영향이 무시할 수 없는 크기였다고 인정하고 나는 항목을 수정했는데, 그 부분도 무시하고 넘어간거같다. 그리고, 이원론의 경우도 완화되던 제한되던 이원의 융합과 이원이라는 것에 얽매이지 않고, (하느님/야훼와 같은 특정 종교의) 신에 얽매이지 않은 자유로운 자아라는 것에 새로 이원을 세우려는 것에 반발감을 느껴서 그렇다. 그것이 무엇을 말하려는 것인지는 알지만, 그것은 마치 모순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압락서스=자아라는 해석은 많이 섣부른 해설이었을 수도 있겠지만, 사람이 도달해야하는 참자아이자 운명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알다시피 압락서스가 진짜 어느 종교의 신이던가 그런 것이 아니니까.
- 그리고 표적에 대한 자의적 해석 부분은 앞에서 시인했으며 내가 오해의 소지가 있다고 몇번이나 밝혔다. 괜히 다른 부분까지 들먹일 이유가 되지않는데 왜 다른 부분까지 비꼬는 것인가? 어느항목을 수정했다는 건지 잘 모르겠으며 적어도 여기선 계속 영지주의에 대해 부정하는 의견을 내놓아서 나는 그것에 대해 반박했을 뿐이다. 이원론에 대한 부분은 아까도 말했듯 앎에 의한 구원은 제하고는 애초에 영지주의에 분파가 많아 상충하는 부분도 존재한다. 카인파를 예로 들면 이들은 속세에서 자신을 더럽히는 것을 구원의 길로 보기도 했다. 나는 그래서 선과 악 빛과 어둠 이 특징들을 혼합하는 압락사스라는 존재를 중요하게 본 것이다. 헤세가 영지주의에 영향을 받은 것은 맞으나 완벽히 영지주의적인 이야기를 쓴것은 아니다 영지주의를 베이스로 깔고 자신의 나름대로의 해석을 가지고서 집필했을 거란 말이다. 그리고 덧붙여서 압락사스는 영지주의 문헌에 언급되는 천사 또는 여러모습이 혼재된 신의 이름이다.(폅집충돌로 앞에 붙여야 될 내용이 계속 늘어났다.)
- 카인파와 압락사스는 말 안해도 아니까 설명 안해도 된다. 그리고, 표식에 대해 정정했을 때부터 그걸로 걸고 넘어진적이 없다. 다른 것으로 비판했지. 어쩌다보니 비슷한 구도가 되어서 그쪽에서도 오해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영지주의를 부정하기보단, 앎과 모름에 대해 영지주의/이원론적 해석을 끼얹는게 아이러니해서 비판한거지, 영지주의에 대해 완전히 부정한적은 없다. (초반에는 비율이 크지는 않고 평범하다고 생각하다가 다시보니 영지주의가 다른놈들에 비해선 그렇게 적지 않구나 해서 적지않다는 의견에 동의했다.) 다만, 이원론적 해석에 의존하는 것은 잘못됬다고 했다.
- 앞에서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냐는식의 해석으로 압박했다면서 그러면서 자의적인 해석이라고 말하느냐고 이원론을 들먹이지 않았나? 표적해석 말고 자의적 해석으로 압박한 사실은 없다 있었다면 그쪽이 말하기 전에 인정했을 거다. 그리고 그쪽이 압락사스의 자의적 해석을 내놓길래 나도 그저 표적의 자의적 해석을 했을 뿐이다 그게 오해의 여지가 생겨 문제가 된 것 같아 밝힌거고 그것으로 혼란이 생겼다는 것은 인정한다. 그리고 이원론에 대한 부분은 그저 초반 두개의 세계로 대비되는 세상을 말하는 부분이 영지주의의 이원론과도 흡사한 부분이 있다고 말한 것이고, 나도 이 텍스트가 이원론적인 세계관으로만 이루어져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완화된 이원론으로 봤을때 영혼이 물질세상의 제한을 극복하고 완전한 상태가 되는 부분이 일치한다고 생각했을뿐
- 카인파와 압락사스는 말 안해도 아니까 설명 안해도 된다. 그리고, 표식에 대해 정정했을 때부터 그걸로 걸고 넘어진적이 없다. 다른 것으로 비판했지. 어쩌다보니 비슷한 구도가 되어서 그쪽에서도 오해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영지주의를 부정하기보단, 앎과 모름에 대해 영지주의/이원론적 해석을 끼얹는게 아이러니해서 비판한거지, 영지주의에 대해 완전히 부정한적은 없다. (초반에는 비율이 크지는 않고 평범하다고 생각하다가 다시보니 영지주의가 다른놈들에 비해선 그렇게 적지 않구나 해서 적지않다는 의견에 동의했다.) 다만, 이원론적 해석에 의존하는 것은 잘못됬다고 했다.
- 그리고 표적에 대한 자의적 해석 부분은 앞에서 시인했으며 내가 오해의 소지가 있다고 몇번이나 밝혔다. 괜히 다른 부분까지 들먹일 이유가 되지않는데 왜 다른 부분까지 비꼬는 것인가? 어느항목을 수정했다는 건지 잘 모르겠으며 적어도 여기선 계속 영지주의에 대해 부정하는 의견을 내놓아서 나는 그것에 대해 반박했을 뿐이다. 이원론에 대한 부분은 아까도 말했듯 앎에 의한 구원은 제하고는 애초에 영지주의에 분파가 많아 상충하는 부분도 존재한다. 카인파를 예로 들면 이들은 속세에서 자신을 더럽히는 것을 구원의 길로 보기도 했다. 나는 그래서 선과 악 빛과 어둠 이 특징들을 혼합하는 압락사스라는 존재를 중요하게 본 것이다. 헤세가 영지주의에 영향을 받은 것은 맞으나 완벽히 영지주의적인 이야기를 쓴것은 아니다 영지주의를 베이스로 깔고 자신의 나름대로의 해석을 가지고서 집필했을 거란 말이다. 그리고 덧붙여서 압락사스는 영지주의 문헌에 언급되는 천사 또는 여러모습이 혼재된 신의 이름이다.(폅집충돌로 앞에 붙여야 될 내용이 계속 늘어났다.)
- 그리고 애초에, 어느 순간에는 영지주의의 영향이 무시할 수 없는 크기였다고 인정하고 나는 항목을 수정했는데, 그 부분도 무시하고 넘어간거같다. 그리고, 이원론의 경우도 완화되던 제한되던 이원의 융합과 이원이라는 것에 얽매이지 않고, (하느님/야훼와 같은 특정 종교의) 신에 얽매이지 않은 자유로운 자아라는 것에 새로 이원을 세우려는 것에 반발감을 느껴서 그렇다. 그것이 무엇을 말하려는 것인지는 알지만, 그것은 마치 모순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압락서스=자아라는 해석은 많이 섣부른 해설이었을 수도 있겠지만, 사람이 도달해야하는 참자아이자 운명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알다시피 압락서스가 진짜 어느 종교의 신이던가 그런 것이 아니니까.
-내가 말하는 그쪽이 하는 자의적 해석이 그 완화된 이원론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영혼이 물질세상의 제한을 극복했다니? 어떤 과정에서 그런 결과가 나온 것인지 모르겠다. 제한 그자체를 극복했다고 말해도 될 것을 물질과 정신 그렇게 이원으로 나눠서 설명할 필요까지야 없다는 것이다. 경계를 대상으로 제한을 파악한게 아니라 제한을 대상으로 경계를 만든 것차럼 느껴진다.
- 완화된 이원론이란 물질적인 세계는 정신적인 세계보다 한단계 낮은 세계로 인식하는 것이다. 그래서 영혼이 물질세계의 제한을 극복하고 완전해 지는 것을 목표로 삼았고
- 그니까, 어느 한쪽을 낮게 생각할만하다기보단 그 사람에게 일어나는 심리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그것이 극복이나 어느 세계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닌, 변화인 것처럼 달라지는 것으로 보이는데 말이다.
- 물질적인 세계의 제한에서 벗어나 완전해지는 것 즉 물질세계의 제한을 극복하는 것이다. 완전해지는 것이 변화인가 벗어나는 것인가라고 물으면 둘다라고 대답하겠다. 그리고 앞에서 압락사스를 언급한건 그게 어느 종교에 신이라던가 그런 것이 아니라고 하길래 영지주의 문헌에 나오는 신이 맞다고 대답한 것이다.
- 여기서의 압락서스는 야훼나 그런 종교의 신과는 성질니 다르다는 뜻이다.
- 아, 그랬군 난 압락사스와 영지주의의 연관성이 있다는 걸 몰라서 한말인줄 알았다.
- 여기서의 압락서스는 야훼나 그런 종교의 신과는 성질이 다르다는 뜻이다. 그리고, 변화에 대한 것은, 그것이 차원의 것이라는 건 아니다. 아까 말했듯 실존주의와의 연관을 보면, 세계를 부수고 나오는 것은 결국, 허상이나 운명을 가로막는 것들을 되돌려보내고, 자아로서 세계의 투영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본다. 압락서스의 신자로서 본다면,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들이니. 나는 여기서 이원이라는 것에 회의를 느꼈던 것이다. 허상을 그것이 있었다고 말할 수 있기는 하겠지만, 그것이 말해질 정도로 의미가 있지는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것을 스스로 말할 수 있을 땐, 더는 존재하지 않기에.
- 아, 그랬군 난 압락사스와 영지주의의 연관성이 있다는 걸 몰라서 한말인줄 알았다.
- 여기서의 압락서스는 야훼나 그런 종교의 신과는 성질니 다르다는 뜻이다.
- 물질적인 세계의 제한에서 벗어나 완전해지는 것 즉 물질세계의 제한을 극복하는 것이다. 완전해지는 것이 변화인가 벗어나는 것인가라고 물으면 둘다라고 대답하겠다. 그리고 앞에서 압락사스를 언급한건 그게 어느 종교에 신이라던가 그런 것이 아니라고 하길래 영지주의 문헌에 나오는 신이 맞다고 대답한 것이다.
- 그니까, 어느 한쪽을 낮게 생각할만하다기보단 그 사람에게 일어나는 심리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그것이 극복이나 어느 세계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닌, 변화인 것처럼 달라지는 것으로 보이는데 말이다.
-두번이나 반복해서 말할 필요는 없는데 흠 영지주의는 앎 자체가 구원인 종교이다. 압락사스 사실상 메타포이고 중요한건 영지를 지닌자의 깨달음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실존주의의 자아 투영과 상충한다고 느껴지지는 않는다. 실존주의에서도 무신론적 유신론적 해석과 견해가 다양하지 않는가 영지주의도 이런 관점에서 이해해주면 좋겠다. 사실 가장 중요한 큰틀만 같을뿐 그속에서는 의견과 견해가 상충하거나 갈라지는 부분이 영지주의에도 존재하는 것이다.
- 나는 단지 그러한 것에서 이원의 분류가 껄끄럽다고 느꼈기에 그랬던거지 사실 영지주의랍시고 무작정 까고싶었던건 아니다. 물론 그 외에도 불만은 있어서 이야기하기는 하지만 그것이 진정한 문제가 되지는 못함을 아니까.
- 뭐 내가 실존주의에 대해 배척하는 것처럼 보였다면 그것도 내가 오해의 소지가 있게 말한 부분이 있는 모양이지만 난 실존주의가 궤를 같이 하는 부분이 있다는 의미로 쓴말이고 여태까지 한말도 영지주의 또한 궤를 같이 하는 부분이 있다는 말이었다. 앞서 말한대로 하나의 개념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텍스트이므로 다양한 해석과 관점이 있을 수 있다는 점을 존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