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 아렌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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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 아렌트
Hannah Arendt
생년월일 1906년 10월 14일
사망일 1975년 12월 4일
국적 독일국(1906~1937)
무국적(1937~1951)
미국(1951~)
직업 철학자, 작가

독일 출신의 유대계 철학자. 대개 정치철학자로 불리지만 자신은 그런 명칭을 거부했고, 대신 스스로를 정치이론가라고 묘사했다. 이 외에 자유주의자, 보수주의자, 마르크스주의자 등의 명칭도 부정했다. 실존주의 계열로 엮이기도 하지만 이런 명칭 역시 받아들이지 않았다.

신동이라서 16세 때에 칸트의 순수이성비판, 이성의 한계 안에서의 종교, 야스퍼스의 세계관의 심리학을 읽었다고 한다.

대학생 때에는 하이데거 및 불트만과 사제관계였다. 이 때 하이데거와 잠깐 연인이었는데, 단지 애정만 있던게 아니라 서로 떡을 치기도 했다. 하지만 얼마 안 가 하이데거와 결별하고 야스퍼스 본인과 사제관계였다.

1933년에 교수자격 논문을 썼지만 이 때 히틀러가 집권하는 바람에 당연히 교수직이 금지당했다. 이후 프랑스로 도주했는데, 거기서 시온주의자들, 베냐민, 브레히트, 츠바이크 등과 교류했다. 1937년에는 독일 국적마저 박탈당했다.

그러다가 1940년에 독일이 프랑스마저 장악하자 결국 미국으로 망명했는데, 이 때 불법으로 비자를 부여받아서 미국에 정착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 와중에 베냐민의 유고들을 보존하는데 성공했고 나중에 출간했다. 제2차 세계대전 후에는 갑자기 하이데거에 대한 태도를 바꿔서 하이데거의 이전 행태를 옹호해댔다. 1951년에 미국 국적을 받았다.

이후 열렬히 저술활동을 하다가 주요 작품들이 미완인 채로 1975년 심장마비로 죽었다.

전체주의의 기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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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렌트에게는 전체주의의 정의 자체가 다른데, 아렌트는 전체주의를 나치즘과 현실사회주의만을 가리키는 용어로 썼고, 이탈리아 파시즘 등은 권위주의적이어도 전체주의는 아니라고 취급했다. 아렌트에게 전체주의는 반유대주의, 제국주의로 인해 대내외적으로 차별의식이 형성되고, 체제가 부정하는 인간들을 없어도 되는 잉여로 취급하는 상황에서 기존의 국민국가가 몰락하며 위기가 심화되자 앞서 언급한 요소들이 결합하면서 형성되는 것이라고 여겼다. 아렌트는 전체주의에 있어서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그런 운동을 추종하는 이름없는 대중이고, 그 지도자 등은 그것에 의존하는 것이고 대중이 원한다면 얼마든지 교체될 수 있다고 여겼다.

악의 평범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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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렌트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악의 평범성이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하지만 이 개념은 흔히 곡해되는 것처럼 일반인들이 모두 사악하다는게 아니라, 악이 꼭 비범한 형태로만 나타나는게 아니고, 평범한 형태로도 나타날 수 있으며, 평범한 형태로 나타날지라도 반성적 사고가 부재한 '죄'를 짓는 것이므로 단죄해야 한다는 것이다.

정치의 영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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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렌트는 정치의 영역을 고대 아테네에 기초해서 정의했다. 아렌트에게 정치란 평등하고 자유로운 참여로서 나타나는 것이다. 따라서 시민들끼리 서로의 평등을 인정하지 않고, 더 나아가 위계질서가 형성되면 더는 정치는 없게 되는 것이다.

기타 견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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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적으로는 자유방임주의에 부정적이었지만, 복지국가에도 반대했다.

1930년대에서 1944년까지는 시온주의 지지자였지만, 시온주의자들이 이스라엘 민족국가를 세우려고 하자 원래 민족주의에 반대하던 아렌트가 이스라엘 건국에 반대했다. 이스라엘 민족국가가 세워지면 대규모 난민이 발생하고, 아랍국가 대 이스라엘의 지정학적 분쟁이 영구화될 것이라고 여겼는데 아주 정확한 통찰이었다. 아렌트는 대신 아랍인과 유대인이 평등하게 참여하는 연방제 국가를 제시했다.

비판 및 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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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중심주의 논란 및 부정확한 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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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렌트는 평생토록 세계, 인류 등의 보편적 가치를 주장했지만, 정작 인류를 계속해서 유럽의 문화 및 역사와 동일시하는 행태를 보이다보니 유럽중심주의 논란이 있다. 그리고 고대 아테네의 실상을 미화했다는 비판도 받는다.

또한 피상적인 관찰 및 선입견에 기초한 부정확한 주장들도 상당하다. 가령 전체주의의 기원에서만 해도 아프리카는 기원후에는 특별한 문명이 없이 비어있는 공간이었다, 마르크스가 유대인 문제에 대해 논한 것이 단 한 번뿐이었다, 전체주의 지도자들은 단지 대중의 여론을 수동적으로 반영하기만 했다는 식의 주장들이 있다.

유대인 위원회에 대한 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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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에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관련해서 가장 논란인 것은 아이히만에 대한 태도와 악의 평범성 개념이지만, 사실 책이 출간될 당시에 가장 논란인 것은 다름아닌 나치 집권기의 유대인 위원회의 구실에 대한 아렌트의 비판적 접근이었다. 당시의 논란은 유대인들 사이에서 아주 비난 및 곡해받았고, 심지어 아렌트와 절교한 유대인도 있었다. 하지만 아렌트는 사과하기를 거부했다.

개인적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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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은 두 번 했지만 자녀는 없었다. 그리고 심각한 골초였는데 사진들 중에도 손에 담배 들고 있는 것들이 상당하다.

아도르노와 원수지간이었다. 아렌트는 베냐민의 자살은 아도르노가 생전에 적극적으로 돕지 않아서 그런 거라고 비난하기도 했고, 하이데거에 대한 견해에서도 서로 대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