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오쩌둥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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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오쩌둥을 근간으로 삼는 공산주의 분파.

원래 마오를 비롯한 중국공산당은 코민테른의 지시를 따라서 국민당과 합작했었다. 그러나 쑨원이 죽고 장제스가 자리를 계승하고는 공산당에 대해 무자비한 탄압을 시작했다. 이에 중공을 이끌게 된 마오는 코민테른은 믿을게 못 된다는 생각을 갖고 독자노선을 걷기 시작했다. 이후 중일전쟁이 끝나고 공산당이 국민당을 본토에서 쫓아내는데 성공하면서 마오가 공산주의의 우두머리 중 하나로 떠오르게 되었고, 1960년대의 중소결별을 계기로 외교적으로도 소련과 분리되면서 마침내 독자적인 이념이 된다.

농민중심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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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마르크스주의에서는 농민과 노동자를 서로 분리하는데, 여기서 노동자는 주로 공업 등과 관련해서만 쓰이는 용어이다. 1940년대까지 중국 대부분은 끊임없는 전쟁과 외침 때문에 전근대 경제상태로 머물러 있었고, 당연히 노동자보다 농민이 훨씬 더 많았다. 이에 마오는 노동자가 농민을 이끌어야한다는 고전적인 마르크스주의 혁명론을 뒤집어서 오히려 농민을 가장 우위에 뒀다. 이후 제2차 국공내전에서 사실상 승리하자 역시 자신이 옳았다고 선전하고 다닌 것은 당연하다.

모순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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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마르크스주의에서는 사회적 모순은 궁극적으로는 극복할 수 있는 것으로 여겼지만, 마오는 모순이라는 것은 결코 극복될 수 없는 일종의 법칙이라고 주장했다. 이 때문에 설령 혁명에 성공하더라도 내부에서조차도 반혁명세력이 계속해서 나타나기 마련이며, 결국 영원토록 이를 경계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관념론적 경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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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마르크스주의에서는 물질적 조건을 근간으로 둘 것을 강조하지만, 마오는 자신이 1927년의 제1차 국공내전부터 1949년의 중화인민공화국 성립까지의 22년동안의 험난한 세월을 공산주의에 대한 열정으로서 극복한 것을 강조하고 과장하면서 이러한 정신상태만 있다면 그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것처럼 선전해댔다. 이러한 사고방식이 대약진운동이나 문화대혁명과 같은 극단적 사태를 불러이르킨 것은 물론이다.

여성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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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주의가 원래부터 여성해방을 강조하긴 했지만, 마오주의는 '여성이 하늘의 절반을 든다'며 이러한 경향을 더욱 강조했다. 물론 그래서 정말로 여성의 지위가 높아졌냐하면 아니겠지만.

민족주의 용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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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외로 민족주의를 부정하지는 않고 다만 국제주의와 결합돼야한다고 주장했다.

자칭 반교조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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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다른 의외로 교조주의자들은 똥보다 나쁘다고 비난했다. 물론 결국에는 마오 본인이 입장 바꿀 때 순종하지 않는 자들 숙청하려고 한 얘기겠지만.

소련과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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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대까지 소련과 중공은 적어도 공식적으로는 우호적 관계를 유지해왔지만, 흐루쇼프의 등장 이후부터 관계가 점차 틀어져서 결국 결별하기에 이른다. 이 때 이 두 세력간의 논쟁을 벌였는데, 당시 소련이 추진하던 서방과의 '평화적 공존'은 핵무기 등의 위험성 때문에 불가피한 것이라고 항변하자, 중공은 그러한 무기 역시 중요한 요소인 것은 맞지만, 그보다도 '인민'이 더 중요한 것이라고 반대했다. 마오주의에 적대적이라는 현대 중공도 당시의 이러한 논리만큼은 계승하고 있다. 즉 소련은 인민의 지지를 잃어서 망했지만 중공은 인민을 계속해서 '관리'했기 때문에 어쨌거나 계속되고 있다는 식.

해외의 마오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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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오주의는 전세계의 개발도상국에도 곧바로 사회주의 낙원으로 갈 수 있다는 희망을 엄청 불어넣었고, 1960년대 들어 소련과 결별한 이후부터는 반소련 성향의 극좌파에게도 '대안'이 되었다. 하지만 1970년대 들어 문화대혁명의 실상이 드러나고, 미국과 중국이 서로 친해지고, 마오가 결국 죽자 그렇게 컸던 인기는 결국 사그라들고 말았다. 하지만 인도, 네팔, 필리핀 등지에서는 여전히 마오주의자들이 잔존해있는 편이다.

캄보디아의 경우, 킬링필드를 이르킨 크메르 루주 세력이 마오주의의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이들은 중국의 내부 상황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어서 덩샤오핑의 지원도 마다하지 않고 받았다.

원래는 호자주의와도 밀접한 관계였지만, 중국과 미국이 서로 친해지자 엔베르 호자가 이에 반발해 아예 중국과의 관계를 끊어버렸다.

현대 중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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덩샤오핑이 개혁개방 등의 수정주의적 조치를 취하자 당연히 마오주의자들은 이에 반대했고, 사실 천안문 6.4 항쟁 때 참여한 시위자들 중에 마오주의자들도 있었다. 이러한 대립관계 때문에 현대 중공은 사실상 마오주의를 적대하고 탄압하고 있는 상황이다.

주의사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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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 판본에서도 그렇고 어떻게 전근대사회에서 바로 사회주의로 직행할 수 있느냐는 식의 오해에서 비롯한 비아냥들이 꽤 됐었다. 물론 중공이 집권 이후에 지나치게 터무니없는 목표들을 잡은 것은 맞지만, 마르크스주의의 역사발전론 문단에서도 설명했듯이 전근대사회가 꼭 자본주의의 수백년을 거쳐야만 사회주의로 갈 수 있는 것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