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기독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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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반기독교가 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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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반기독교가 되는지에 대해서는 수많은 원인들이 있겠지만, 주된 원인으로는 기독교의 사고방식 자체가 폐쇄적이고 전체주의적이라는 것에 있다. 기독교에서는 자기네들만이 구원대상이고 나머지는 전부 영벌 대상에 그래야 마땅하다는게 근간에 깔려있고, 더욱이 자신들이 기독교를 믿는 그 자체가 이미 은총에 '불가피한' 구원을 받게 된 것으로 간주하다보니, '신앙'은 유지하는 선에서는 그 어떤 짓이건 저질러도 무방하다는 사고방식이 지배적이다. '죄는 씻을 수 있습니다' 따위가 그 결과 중 하나라고 볼 만하겠다.

또 앞서 말했듯이 모든 불신자들은 영벌의 대상이니 역시 아무리 함부로 대해도 무방하다는 사고방식이 깔려있다. 당연히 이 모든게 '우상파괴', 종교재판, 종교전쟁, 검열, 권위주의, 독재 따위로 이어지는 것이다. 당장 음란물 금지 따위의 짓거리도 기독교 세력이 떠받치고 있는 부분이 상당하다. 또 자기네들 신념에 어긋나는 사실들은 죄다 탄압하려고 드는데 진화론 부정도 이와 관련해 참 오랫동안 진행된 것이며 특유의 극우주의, 음모론과 시한부 종말론 따위도 이런 식의 현실도피에서 벌어지는 것이다.

물론 기독교 측에서는 불리해지면은 일부 이단, 사이비 드립을 치거나 진정한 기독교는 사랑, 용서, 관용 등을 가르치네 따위를 씨부리면서 자기 책임을 회피하려 들 것이다. 하지만 어떤 범죄자에 대해서 그가 저지른 범죄는 그의 진정한 자아가 저지른 것이 아니고 진정한 자아는 너무나도 선량하다 따위의 드립은 물론 심각한 정신병이 있지 않는 이상 그냥 기각인 것처럼 이 모든 것은 되도않는 꼬리자르기일 뿐이다.

이렇듯 반기독교 성향을 가질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지만, 이런 반기독교 세력 중에서 이름 난 인물들과 단체들을 살펴보면 어째 극좌파, 복고주의적 파시스트들, 기독교 아닌 종교의 극단주의자들 등등이 상당수다. 이렇듯 반대 세력이 구심점이 떨어지는 것은 물론이고 구성원들끼리도 서로 내부총질 벌일 판국이다 보니 기독교가 아직도 살아남아 있다고 볼 수 있겠다.

고대 로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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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로마 제국은 익히 알려졌듯이 초기에는 기독교를 탄압했는데, 단지 네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디오클레티아누스 같은 황제나 권력자들만 기독교를 혐오한게 아니라 일부 사상가들도 기독교에 반감을 나타냈다. 초기 기독교사 기록 중 가장 유명한 타키투스의 연대기에도 기독교는 부정적으로 서술되어 있다.

로마의 기독교 탄압은 항상 일관적인 탄압을 가했다기보다는 때에 따라 그 강도가 다르게 나타났다. 기독교를 믿든 말든 좆도 신경을 안 쓴 황제들이 있는가 하면 기독교에 심각한 발작 증세를 보이는 황제들도 있었다.

보통 대대적인 종교 탄압은 이제 막 새로 권력을 얻거나 혈통이 딸리는 등 각종 사유로 정통성이 부족한 군주들이 이를 만회하기 위해 벌이는 편인데, 실제로 네로도 브리타니쿠스에 비해 정통성이 부족해서 문제를 겪었고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아예 천민 출신으로 추정하고 있다.

즉 로마의 기독교 탄압은 종교 및 사상의 문제와 덩달아 정치적인 의도도 있었던 것이다.

그나마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정통성 문제도 거의 없었으며 황제이기 이전에 사상가로서 기독교를 논리적으로 비판하려고 했다.

그러다가 313년밀라노 칙령을 통해 기독교가 공인됐다. 이후 율리아누스 황제가 기독교를 견제하려고 시도했지만 결국 실패했고, 380년 테살로니카 칙령으로 기독교가 아예 국교가 되면서 오히려 반기독교 세력이 수세에 몰리고 만다.

다만 1~3세기에 기독교를 억누르려다 오히려 세력이 커진 것처럼 이번에는 정반대로 기독교의 비기독교 탄압으로 인해 반기독교 세력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기독교의 승리 이후 적지 않은 수의 이교도들이 로마를 벗어나 사산 왕조 페르시아 등 적국과 결탁했다.

이후의 내용은 아래 문단 참고.

서유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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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상스를 계기로 에피쿠로스주의 등 근본적으로 반종교적인 철학이 발굴돼서 영향을 끼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본격적인 계기는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개인의 종교의 자유가 인정받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이때부터 서서히 기독교 자체에 반감을 갖는 경우가 나타났다.

독일은 유럽 전체에서 가장 일찍 종교비판이 시작된 나라들 중 하나다. 종교비판이 아예 반기독교로 격화된 것은 포이어바흐부터인데, 그는 종교와 인간은 서로 반대관계에 있는 것이기에 인간이 살기 위해서는 종교가 망해야한다고 주장했다. 포이어바흐는 독일뿐만 아니라 특히 러시아에서 그 이후의 거의 모든 무신론자들에 직간접적 영향을 끼쳤다. 마르크스는 포이어바흐의 견해를 이어받아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라고 썼지만, 정작 생애 중엽부터는 종교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고 정치경제적 문제에 관심을 돌렸다. 마르크스보다 기독교에 꾸준한 관심을 가진 것은 엥겔스인데, 그는 초기 기독교는 반체제운동으로 나타났지만, 공인된 기독교는 오히려 체제협조적으로 타락한 것으로서 초기 기독교와 단절됐다고 주장했다. 니체는 특히 더 주목할만한 사례인데, 그는 여러 종교들 중에서도 특히 기독교를 표적으로 삼았고, 기독교는 포이어바흐가 주장한 것처럼 단순 무지나 소망의 투영의 결과가 아니라 오히려 애초부터 인류 전체를 노예로 부리기 위해서 고안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런 반기독교 사상이 정치권에 영향을 끼치기 시작한 것은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부터다. 공산당을 비롯한 자기 외의 모든 정당들을 몰아낸 나치는 일단은 기회주의적으로 기독교와 타협하면서도, 은밀히 기독교를 경멸하고, 적절한 시기가 오면 기독교를 탄압하고 약화시킬 계획을 세웠었다. 그러나 나치가 패망한 뒤 독일이 동서로 나뉘었는데, 이 때 공산당이 장악한 동독에서는 당연히 반기독교 정책이 시행됐었다. 하지만 독일 통일로 인해 마침내 국가 차원의 기독교 탄압이 소멸됐다.

스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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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은 아주 오랫동안 기독교가 국가의 근간이 됐었지만, 특히 19세기 초부터 스페인이 심각하게 쇠퇴하기 시작하면서 서서히 반기독교 운동이 생겨났다. 반기독교 운동이 가장 과격화된 것은 1930년대라고 할 수 있는데, 이 때 극좌파들이 자신들이 점령한 곳에서 기독교에 대한 무자비한 박해를 벌였다. 그러다가 결국 국민파가 승리하면서 반기독교 운동이 한동안 소멸했다.

프랑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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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에서는 17세기 태생의 장 멜리에 신부가 시초라고 할 수 있다. 그는 부모의 요구 때문에 겉으로는 평생토록 신부 생활을 했지만, 성직자들이 서민 착취에 가담하는 것을 목격하면서 분개해 사적으로는 극도로 반기독교적인 신념을 지녔다. 이후 18세기에 계몽주의가 본격화됐는데, 이 때 프랑스 계몽주의자들 중 반기독교로 유명한 경우는 볼테르, 디드로가 있다. 관련해서 특히 주목할만한 인물은 사드 후작인데, 앞서 언급한 인물들이 법적 처벌이 두려워 신성모독적인 행태는 잘 보이지 않은 반면, 사드는 프랑스 혁명이 발생하기 한참 전부터 기독교에 온갖 조롱과 모욕을 퍼부었다.

프랑스 혁명 시기에는 익히 알려진 것처럼 성직자들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이 벌어졌다. 공포정치로 악명높은 로베스피에르파는 사실 최고 존재의 제전 따위를 세우며 기독교와 어느정도 타협하려고 한 반면, 에베르파는 훨씬 폭력적이고 노골적인 반기독교 및 국가무신론 운동을 벌였다. 그러다가 테르미도르의 반동, 나폴레옹(1세)의 집권 등을 거치면서 반기독교 운동이 잠시 소멸했다.

그러다가 1830년 7월 혁명으로 기존 왕실이 몰락하면서 극좌파 운동이 부활했는데, 이와 함께 반기독교 운동도 재발생했다. 당시 반기독교의 대표 인물로는 프루동, 블랑키가 있는데, 특히 블랑키주의자들은 노골적으로 모든 종교를 금지하자고 주장했다. 그러나 나폴레옹 3세가 집권하면서 이런 운동이 다시 쇠퇴했다가, 보불전쟁으로 그가 축출된 뒤 파리 코뮌이 발생해 종교세력을 축출하려고 했다. 파리 코뮌은 얼마 안 가 멸망했지만 이후에도 세속주의가 점진적으로 제도화되면서 기존 기독교세력이 타격을 입었다.

동유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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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유럽은 한동안 이렇다할 종교적 변화가 없다가, 19세기 나폴레옹 전쟁을 계기로 계몽주의가 유입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계몽주의 사상은 급속도로 과격화됐는데, 특히 아나키스트들, 공산주의자들, 허무주의자들(19세기 말까지 이들은 서로 구별이 잘 안되고 서로 겹치기도 했다)이 반기독교주의를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이러한 경향이 정치적 결실을 맺게 된 것은 볼셰비키 혁명부터다. 혁명 초기부터 볼셰비키들은 이미 자신들에 순응하지 않는 기독교 세력을 탄압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탄압이 본격화된 것은 스탈린 정권부터인데, 헌법상으로는 종교의 자유를 보장한다고 했지만 실제로는 무신론자들을 공격적으로 지원하고 기독교를 더욱 박해했다. 그러다가 독소전쟁을 계기로 스탈린 정권이 국내에서 기독교 탄압을 다소 완화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공산주의자들이 동유럽 대부분을 장악하게 됐고, 이들은 당연히 기독교 탄압을 벌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스탈린 사후에는 흐루쇼프가 기독교 탄압을 재개하기도 했다. 그리고 특히 주목할만한 사례로 알바니아가 있는데, 이 나라에서는 헌법에서부터 무신론 국가를 선포하고, 종교의 자유를 완전 부정하면서 노골적으로 기독교 말살을 시도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이 당시 러시아 등지에서의 신이교주의자들이 역시 반기독교 성향을 띄기도 했다. 그러나 고르바초프가 글라스트노스트 정책을 벌이면서 종교의 자유를 진정으로 보장하기 시작했고, 1980년대 말부터 동구권이 탈공산화하면서 이런 탄압이 마침내 끝나게 됐다.

아메리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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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리카는 전체적으로 수백년간 크리스천들에 의해 식민지배당했다보니 현재까지도 기독교의 영향력이 압도적인 편이다. 하지만 예외 사례로 멕시코가 있는데, 20세기 초부터 세속주의자들이 권력을 잡아서 성직자들에 대해 대대적인 탄압을 벌였다. 그리고 아메리카 원주민들 중 급진주의자들은 기독교를 당연히 적대시하기도 한다.

중동의 경우 유대교이슬람에 대해 간략하게나마 짚고 넘어가야 한다. 유대교는 예수를 메시아로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그로부터 따라오는 모든 교리들을 당연히 인정하지 않으며, 이 때문에 유대인과 크리스천 간의 적대관계는 아주 일찍부터 시작됐고, 유대교 문헌들 중에서 기독교를 비난하는 내용들이 있기도 하다.

다른 한편으로 이슬람은 기독교 전통을 부분적으로 받아들이면서도, 삼위일체, 원죄설, 예수의 속죄 등의 기독교의 핵심 교리들을 부정했다. 하지만 이슬람은 그래도 크리스천들은 성서의 백성이고 최후의 심판 때 함께할 것이라는 식으로 어느정도 관용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기독교에 대한 무슬림의 태도는 늘 가변적이게 됐다.

무슬림과 크리스천이 서로 본격적으로 충돌하기 시작한 것은 십자군 전쟁 시기부터이지만, 세간의 오해와 달리 이를 계기로 무슬림이 기독교를 증오하게 된 것은 아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같은 종교 국가끼리 싸우거나 다른 종교 국가끼리 힘을 합치는 등의 양상이 나타났으며, 십자군 전쟁이 끝나가려는 시점 몽골 제국이 튀어나와 이슬람 세계의 모든 증오가 몽골로 쏠려버렸기 때문이다. 여하튼 이 이후에도 이슬람 국가들은 크리스천들을 관용하는 편이었다.

오늘날과 같이 기독교를 무조건적으로 배척하는 이슬람의 등장은 19세기부터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 서양이 중동지역을 식민화하기 시작하면서 이에 반발해 이슬람주의가 태동했고, 당연히 이슬람주의자들은 기독교를 적대시하기 시작했다. 초기 사례로 오스만에서는 청년튀르크당이 1913년부터 흑화하면서 기존의 다문화주의를 팽개치고 이슬람주의에 경도됐고, 결국 아르메니아인, 그리스인, 아시리아인 등 크리스천이 주류인 민족들에 대해 학살을 벌였다.

다른 한편으로 유대인 시오니스트들 중 극단주의자들은 기독교도 적대시하기도 한다.

아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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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는 특히 19세기부터의 영국의 식민지배 속에서 반기독교 사상이 생기기 시작했다. 물론 독립운동가들 중에 간디처럼 기독교를 인정한 경우도 있었지만, 다른 한편으로 사바르카르같은 인물들은 힌두트바를 주장하면서 노골적으로 반기독교주의를 퍼트리기 시작했다. 물론 제3의 세력으로 공산주의자들도 생겨났다. 20세기에 영국이 철수한 이후로 인도는 헌법적으로는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고 있지만, 갈수록 세력이 커지는 힌두교 극단주의자들이 반기독교 운동도 벌이고 있다.

인도차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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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에 공산주의자들이 인도차이나를 장악한 뒤 기독교를 본격적으로 탄압하기 시작했다. 규모나 정도는 국가마다 차이가 있었는데, 특히 캄보디아에서 킬링필드라는 대학살이 벌어졌다. 캄보디아에서는 크메르 루주가 결국 몰락했지만, 이외의 국가에서는 현재까지도 기독교 탄압이 계속되고 있다.

일본은 동아시아 국가들 중에서 제일 먼저 기독교가 유행한 나라인만큼 반기독교 정책도 가장 먼저 뿌리내렸다.

일본의 기독교 유입이 온 나라가 수많은 다이묘들의 전쟁터였던 전국시대에 이루어진 만큼 몇몇 다이묘는 기독교를 믿었고, 한 다이묘가 기독교를 믿으면 영지의 주민들은 모두 기독교를 믿어야 했다. 이러한 강제 개종의 과정에서 신흥 종교인 기독교에 대한 반감이 싹트기 시작했다. 만약 불교 등을 믿는 다이묘가 기독교 다이묘의 영지를 점령할 경우 주민들은 다시 기독교를 버려야 했다.

16세기 후반 전국시대가 어느 정도 마무리되고 기독교에 관용적이었던 오다 노부나가를 중심으로 아즈치모모야마 시대가 시작되면서 여러 장수들이 기독교를 믿기 시작했다.

그러나 혼노지의 변으로 오다 노부나가가 죽고, 암살자인 아케치 미츠히데를 처단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집권하며 상황이 뒤바뀐다. 그는 평소부터 기독교를 싫어했었고, 바테렌 추방령을 내려서 선교사들을 추방한 것이 시초이다.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동군이 승리하고 1603년 에도 막부가 들어서면서 기독교 탄압은 전례없이 극심해진다. 먼저 전국적인 금교령을 내려서 기독교 자체를 금지해버렸다. 그리고 기독교에서 예수를 죽인 십자가형을 모방해 기독교인들을 매달아버리는가 하면 예수의 성화가 그려진 그림을 밟게 하고 밟지 못하면 처벌하는 후미에(踏み絵, 그림 밟기) 등의 온갖 창의적인 기독교 탄압이 이루어졌다.

중앙집권이 역대 막부 중에서 가장 강력했던 에도 막부에서는 기독교인들을 눈에 불 키고 색출했으며, 대부분은 배교했다. 그러나 극히 일부만이 신앙의 형태를 바꿔나가며 숨어서 기독교를 믿었는데, 이들을 카쿠레키리시탄(隠れ切支丹, 숨은 기독교인)이라고 부른다. 19세기 후반 종교 탄압이 공식적으로는 해제되고 외국 선교사들에 의해 발견되었는데, 이들은 이미 원조 가톨릭과는 모습이 많이 달라져버렸으며 가톨릭으로 다시 합류하라는 선교사들의 요구에 불응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1873년 메이지 정부에서 금교령을 마침내 철폐했다. 이후 일본은 공식적으로는 기독교를 인정했지만, 갈수록 국가신토를 크리스천에게마저 강요하며 탄압했다. 그러다가 태평양 전쟁에서 패망한 후 국가차원의 기독교 탄압이 마침내 소멸했다.

확인할 수 있는 최초의 기독교 탄압은 당나라 때이다. 네스토리우스파(경교)가 중국에 들어오면서 나름 세를 떨쳤는데, 840년대 당 무종의 삼무일종으로 인해 불교가 탄압받는 동시에 경교도 같이 쳐맞았다.

이후 원나라 때는 서역에서 들어온 일부 기독교도 다루가치들도 있었지만 명나라 이후 탄압당했다.

청나라에서는 초기에는 기독교를 용인했지만, 교황청에서 공자에 대한 제례 등을 우상숭배로 여기고 금지시키자 강희제가 격노해서 중국 전통을 존중하는 선교사들만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이후 옹정제는 선교 자체를 금지시켰다. 그런데 이런 반기독교 정책이 오히려 반정부운동에 역영향을 끼쳐서 태평천국의 난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러다가 1860년 베이징 조약을 맺으면서 마침내 선교 금지를 풀었다. 하지만 이런 기독교 세력은 대개 서구제국주의와 결탁해서 민간에서의 기독교에 대한 반감은 더 커지게 됐고, 의화단 운동 때 반기독교 폭동을 벌이기도 했다.

신해혁명 이후에는 쑨원같은 크리스천도 있었지만 다른 한편으로 공산주의가 유입되기 시작했다. 특히 중국공산당은 설립 초기부터 무신론자들만 회원으로 받아들였다. 국부천대 이후 중공은 본격적으로 기독교 탄압을 벌이기 시작했는데, 특히 문화대혁명 시기에는 기독교는 '인민'의 아편도 아니고 제국주의의 아편이라며 아예 그 자체를 금지해버렸다. 그러다가 덩샤오핑 이후에 '비교적' 탄압이 완화됐다가, 시진핑 시대에 이르러서 탄압이 다시 본격화됐다.

한반도에서는 정조 때인 1791년에 신해박해를 벌인 것이 시초이다. 이후 고종 때의 병인박해까지 기독교 탄압이 70년 넘게 이어지다가, 1886년 조불수호통상조약을 계기로 기독교가 묵인되기 시작했고, 1899년 교민조약으로 기독교가 마침내 합법화됐다.

그러나 20세기 초에 공산주의가 유입되기 시작했다. 일제시기에는 공산주의자들이 대놓고 반기독교를 주장하는 것은 피하다가, 소련이 38도 이북을 점령하면서 그곳에서 기독교 탄압이 본격화됐다. 그리고 이런 행태에 반발하던 크리스천들 대부분이 월남하면서 북한에서의 기독교 몰락이 가속됐다. 당시 평안도는 전국에서 기독교도 비중이 가장 높은 지역 중 하나였고 평양은 조선의 예루살렘이라 불릴 정도였는데, 한순간에 기독교가 탄압받는 종교가 되어버리니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탈출해야 했던 것이다.

이후 북한은 다들 알겠지만 현재 세계에서 가장 악명높은 반기독교 국가 중 하나이고, 남한에서는 기독교 탄압은 커녕 오히려 한 때는 정부차원에서 노골적인 지원을 받기도 했지만, 대신 기층에서 반기독교 정서가 서서히 커지는 중이다. 관련해서 2026년 기사에 의하면 한국에서 교계를 불신하는 비율이 75.4%나 된다고 하며 그들의 여론조사에서는 최고수준이다.

아프리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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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아프리카 지역은 수십년이 넘는 서양의 식민지배 때문에 기독교가 광범위하게 퍼져 이렇다할 반기독교 운동은 없는 편이다. 반면 북아프리카에서는 수백년 전부터 이슬람이 광범위하게 퍼져있다보니 당연히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이 기독교 박해를 자행하기도 한다.

단지 반종교적인 인물은 적지 말고 되도록 기독교를 특히 비판/비난/부정 등을 한 인물만을 적는다. 반기독교에서 전향한 인물은 기재하지 말 것.

4세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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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세기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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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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