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피쿠로스 학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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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피쿠로스를 시조로 하는 철학 학파이다. 에피쿠로스주의, 에피쿠로스철학으로도 부른다. 도가와 유사점이 많은 편이다.
에피쿠로스는 악의 문제를 제기해서 신과 세계의 부조리를 나타냈다. 하지만 에피쿠로스는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결론내리지는 않았고, 신들은 자기만족적이기 때문에 세계에 개입할 아무런 동기가 없다고 생각했다. 이 때문에 기적, 계시, 은총 등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여겼다. 이런 경향 때문에 에피쿠로스의 후학들 중에서는 노골적으로 반종교적인 인물들도 있었다.
에피쿠로스에게 자연은 신의 섭리에 의한 것이 아니라 우연적인 결합과 해체를 통해 생겨난 것이다. 그래서 운명은 실재하지 않으며 당연히 운명에 대해 걱정할 필요가 없다. 생명체도 당연히 그러한 과정을 통해 생겨났다고 간주했는데, 이는 진화론에 선구적인 주장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외계 생명체의 존재를 믿기도 했다.
초자연적 세계의 개념을 거부했고, 자연은 오로지 물질 뿐이라고 간주하면서 유물론을 취했다.
에피쿠로스는 인간의 실생활에 도움이 되지 않는 철학은 전부 헛되다고 말하면서 실천적인 철학의 필요성을 간주했다. 에피쿠로스에게 삶의 최고선은 행복인데, 이러한 행복은 쾌락을 통해 얻는 것이다. 하지만 쾌락을 두 가지 종류, 즉 적극적 쾌락과 소극적 쾌락으로 나누었는데, 적극적 쾌락은 말그대로 욕망을 만족시켜서 얻는 것이지만 소극적 쾌락은 욕망을 줄여서 얻는 것이다. 그리고 적극적 쾌락보다 소극적 쾌락을 중시해야한다고 말했다. 즉 욕망을 최소화해서 만족을 얻는 것이 우선이라는 것이다.
세부적으로는 욕망을 세 가지로 나누었는데, 첫째는 자연적이고 (생명유지에) 필수적인 욕망, 둘째는 자연적이고 필수적이지 않은 욕망, 셋째는 자연적이지도 않고 필수적이지도 않은 욕망이다. 그리고 첫째에는 식욕, 둘째에는 성욕, 셋째에는 명예욕 등이 해당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첫째를 제외한 유형의 욕망들을 특히 최소화해야한다고 여겼다. 에피쿠로스는 '빵과 물만 있으면 신도 부럽지 않다'고 말했다고 전해지는데, 처음 듣기에는 그런가보다 싶겠지만, 더 갈 것도 없이 빵과 물만 먹으면서 신도 부럽지 않게 만족하라고 하면 얼마나 과격한 발상인지 곱씹게 될 것이다. 이러한 만족의 상태를 아타락시아라고 불렀다.
죽음에 대해서는 에피쿠로스는 자신이 존재할 때에 죽음은 없고, 죽음이 존재할 때에 자신은 없으므로 삶과 죽음은 영원히 관련이 없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죽음에 대한 걱정은 전부 헛되다는 것이다. 루크레티우스는 죽음에 대해 또다른 주장을 했는데, 유물론자에게 탄생 전과 죽음 후는 같은 것인데, 인간은 탄생 전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처럼 죽음 후도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물론 이런 주장들은 현대에 비판을 받기도 한다.
정치에 대해서는 현자는 비상사태로 인해 필수적인 경우를 제외하면 무관심해야한다고 여겼다. 에피쿠로스는 자신의 공동체에 노예, 여성, 심지어 매춘부도 환영했다고 하는데, 이는 현재에도 그렇지만 당시 그리스의 기준으로는 아주 파격적인 태도였고, 에피쿠로스철학의 평등주의를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에피쿠로스는 신분, 성별, 직업에 대해서는 차별없이 관용적이었던 반면 다른 철학 학파와 그 철학자들에 대해서는 비난을 퍼부었다. 이 때문에 이들 간에 자연히 대립관계가 형성됐고, 에피쿠로스 학파는 교조화돼서 내부적 비판이 마비됐다고 한다.
원래는 기원전 4세기에 고대 그리스에서 기원했다. 태초에는 자신들과는 정반대의 철학을 설파한 플라톤주의자들을 적대시하다가, 나중에는 스토아 학파와도 경쟁관계였다. 그러다가 고대 로마가 강력해지고 그리스와 교류하기 시작하면서 로마에도 전파됐다. 인기가 얼마나 많았는지 참여자가 40만 명까지 됐다고도 한다.
기독교와 관련해서는 사도행전 17장 18절에서 언급된 것이 시초이다. 스토아 학파와는 달리 에피쿠로스 학파는 반종교성이 너무 강했기에 이단시됐고, 기독교가 국교가 된 후로는 수백년간 잊힌 상태였다.
그러다가 제2천년기부터 에피쿠로스 문헌들이 발견되기 시작했고, 에피쿠로스주의가 서서히 부활했다. 하지만 초기 반응 중에서 단테가 신곡에서 에피쿠로스를 지옥행에 처한 것도 있었다.
르네상스 시기에는 에피쿠로스주의가 특히 부활했는데, 이 때 영향을 끼친 사상가들로는 다빈치, 마키아벨리, 몽테뉴, 갈릴레이, 홉스, 가상디, 스피노자 등이 있다. 그리고 이후의 서양의 유물론자들 모두가 에피쿠로스주의의 직간접적 영향을 받았다고 해도 무방하다.
19세기에는 쇼펜하우어, 다윈이 영향을 받았다. 니체는 에피쿠로스 학파에 대해 복잡한 견해를 갖고 있었는데, 에피쿠로스 학파가 속세를 멀리하고 절제하는 삶을 추구한 것은 긍정했지만 쾌락주의는 부정적으로 여겼다. 하지만 에피쿠로스 학파가 반종교적 성향을 보인 것도 긍정하면서, '(고대) 로마에서 모든 존경할만한 지식인은 에피쿠로스주의자였다'고 말했다.
20세기에는 아인슈타인, 들뢰즈, 알튀세르가 에피쿠로스주의의 영향을 받았다. 이 시기에 에피쿠로스주의는 새로운 정치적 의미가 부여됐는데, 스탈린주의가 지나치게 기계화됐다고 여긴 비판자들이 대안 모색 중에 관심을 가졌다. 아이러니하게도 소련 역시 명목상으로 에피쿠로스주의를 긍정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