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유대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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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과 그들의 문화에 대한 부정적 편견 등을 의미한다. 반유대주의와 반유대교를 구별하려는 입장에서는 유대인 전체를 인종으로서 증오하는 경우에만 반유대주의라고 불러야한다는 의견도 있다. 용어로서의 반유대주의는 생각보다 오래되지 않았는데, 1881년에 빌헬름 마라는 독일 반유대주의자가 처음 사용했다.
독일에서의 반유대주의의 역사는 그리 오래되지 않은 편이다. 비록 루터가『유대인과 그들의 거짓말에 대하여』를 써서 반유대인 선동을 하긴 했지만 정작 루터 추종자들조차도 별로 관심갖지 않았다.
독일에서 반유대주의가 본격화된건 19세기부터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이미 프루동과 바쿠닌이라는 반유대주의자들의 영향을 받은 바그너가 자신의 라이벌이라고 '여긴' 이들을 겨냥해 『음악에서의 유대주의』를 써서 유대인 문화가 독일 문화를 해친다고 주장했다. 또 바그너의 사위가 된 휴스턴 체임벌린이 『19세기의 기초』라는 책을 써서 유대인들을 비롯한 이민족들이 독일인의 몰락을 야기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래도 20세기 초까지는 독일인들로서는 특별히 유대인들을 증오할 이유가 없었기에 큰 파장을 일으키진 않았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 패전 이후 기득권이 패전에 대한 책임을 유대인들에 떠넘기기 시작했고, '배후중상설'이라는 이름이 일찍 붙었다. 이에 여러 극우정당들이 동조했는데, 특히 나치당이 결국에는 정권을 잡으면서 반유대주의를 국가 차원에서 퍼트리기 시작했다. 결국 홀로코스트가 발생했고, 그 이후로는 국가 차원에서 반유대주의를 금지해버렸다.
그러나 독일 적군파에서 강성 반시오니즘을 넘어 아예 반유대주의 쪽으로 빠지기도 했다. 이들의 창립자 중 한 명인 호르스트 마흘러는 본인이 유대인임에도 불구하고 아예 네오나치에 홀로코스트 부인론자로 전향하기도 했다.
13세기에 에드워드 1세가 유대인들을 추방한 적 있는데, 이는 유럽에서 국가 차원에서 유대인을 추방한 것으로는 처음으로 여겨진다.
반유대주의가 본격화된 것은 20세기에 영국 파시스트들이 등장하면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도 반유대주의가 계속됐는데, 특히 여전히 영국 치하에 있던 팔레스타인에서 시오니스트들이 영국인들을 살해하자 영국에서 반유대주의 폭동이 벌어진 적 있다. 이후로는 신파시스트들이 반유대주의를 계속하고 있다.
18세기에 마리아 테레지아가 유대인 탄압 정책을 시행한 적 있다. 그러나 19세기에 프란츠 요세프 1세가 유대인들을 대거 받아들이기도 했다. 하지만 제1차 세계대전 이후 결국 나치가 오스트리아를 장악하게 되면서 역시 유대인 탄압과 홀로코스트가 벌어졌다.
이탈리아에서는 의외로 파시스트 정권 초기까지도 반유대주의가 심각하지 않은 편이었다. 게다가 초기 파시스트들 중에는 유대인들도 상당수 있었다. 그러나 1930년대 나치당이 집권한 이후에 그들이 이탈리아에 서서히 반유대주의 정책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또 일찍부터 유대인들을 증오하던 율리우스 에볼라도 이에 거들었다. 결국 파시스트 정권은 1938년에 인종법을 제정해서 유대인 탄압을 시작했다. 특히 1943년 나치가 주도한 이탈리아 사회 공화국이 세워진 이후에는 파시스트 점령지에서 홀로코스트에 대한 협력이 벌어지고 말았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신파시스트들이 반유대주의를 계속하고 있다.
왕정 시절에 필리프 4세가 유대인들의 재산을 몰수하고 추방한 적 있다. 이후 19세기에 피에르조제프 프루동이 유대인에 대한 증오심을 나타냈다. 하지만 19세기에는 그래도 반유대주의가 체계화되지는 않았다.
그러다가 드레퓌스 사건 및 제1차 세계대전 이후 프랑스 파시스트들이 반유대주의를 본격적으로 선전했다. 특히 비시 정권 시기에 유대인들에 대한 체계적인 탄압이 벌어졌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극우 인사들이 반유대주의를 계속하고 있다.
여기도 나름 반유대주의 역사가 오래된 곳이다. 이슬람 제국의 팽창 이후 레콩키스타 시절에 종교적인 열정이 타 유럽 국가보다 극심했던 이베리아 북부의 기독교 국가들로부터 유대인들이 많은 탄압을 받은 바 있다.
스페인 내전 시절부터 국민파에서 유대인, 프리메이슨, 공산당은 한 패라고 선전하기도 했다. 그러나 정작 당시에 여전히 스페인에 살고 있던 유대인들은 얼마 되지도 않았다.
애초에 유대인 자체가 매우 적었던 곳이었지만 어쨌거나 20세기부터 파시스트들이 반유대주의를 퍼트리기 시작했다.
주로 20세기 전반의 헝가리와 루마니아에서 파시스트들이 유대인 학살을 벌였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 이후로는 세력이 많이 줄어든 편이다.
18세기 말에 러시아가 폴란드-리투아니아를 완전히 멸망시키면서, 거기에 살던 유대인들을 그대로 흡수하게 됐다. 폴란드 분할의 장본인인 예카테리나 2세 치세부터 이미 유대인들에 대한 규제가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니콜라이 1세가 즉위하고 나서는 유대인들에 대한 탄압이 더욱 강화되었다. 게다가 당시의 가장 악명높은 반체제 인사였던 미하일 바쿠닌마저도 유대인들을 아주 증오했으니 결국 유대인들은 한동안을 희망없이 살아야했다.
이러한 사태에 더욱 불 붙인것은 알렉산드르 2세 암살 사건이었는데, 암살자들은 유대인이 아니었지만, 유대인 공동체가 암살에 가담했다는 거짓 소문이 번지면서 대규모의 포그롬, 즉 유대인 학살이 벌어졌다. 직후 즉위한 알렉산드르 3세 역시 유대인들을 전혀 좋게 생각하지 않았기에 이런 사태가 한동안 지속됐다. 이후 니콜라이 2세 치세에도 유대인에 대한 탄압이 계속됐다. 희대의 반유대주의 선전물인 『시온장로의정서』도 니콜라이 2세 치세의 러시아에서 제작됐다.
그러다가 제1차 세계대전이 벌어지면서 제정이 몰락했다. 이후 볼셰비키가 혁명을 이르키자, 이에 반대하는 백군 세력은 볼셰비키 세력 중에 유대인이 있다는 사실을 부풀려서 반유대주의를 선전했다. 물론 볼셰비키가 결국 내전에서 이겼지만, 서유럽 등지로 망명한 백계 러시아인들은 거기서도 반유대주의를 계속 퍼트렸다. 이후 공산당은 공식적으로는 반유대주의를 금지했지만, 일반 시민들, 특히 반체제 내지는 분리주의 인사들 사이에서는 여전히 반유대주의가 잔존했다. 또한 소련 치하에서 유대인들의 문화에 대한 탄압은 더욱 체계화되고 말았다. 이러한 사태가 다시금 고개를 든 것은 독소전쟁 시기인데, 이 때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들이 유대인 학살에 가담하기도 했다. 하지만 독소전쟁이 결국 소련 승리로 끝나면서 이 역시 진압되었다.
소련 붕괴 이후에는 주로 네오나치들이 반유대주의를 계속하고 있다.
미국에서 반유대주의를 본격화한 것은 헨리 포드인데, 『시온장로의정서』를 대규모로 배포했고 스스로 『국제유대인』이라는 반유대주의 서적을 쓰기도 했다. 이 때문에 다름 아닌 히틀러로부터 인정을 받기도 했다. 다른 한편으로 특히 20세기 전반에 미국의 흑인우월주의자들 일부도 반유대주의 성향을 띄기도 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로는 네오나치들과 KKK단이 반유대주의를 계속했다. 그리고 강성 반시오니즘 성향의 고보수주의자들이 아예 반유대주의로 빠지기도 한다.
히브리 민족의 근원지인만큼 그 양상이 가장 복잡하게 나타나는 곳이다. 키루스 2세의 칙령 이후 유대교 및 유대인의 민족집단이 형성된 이래로 유대인이라는 특정 집단을 정해놓고 발생한 학살은 1~2세기에 세 차례에 걸쳐 발생한 유대-로마 전쟁이 최초다.
로마에서 기독교가 공인된 이후 로마에서 유대인들에 대한 억압은 더 심해졌다.
지금은 서로 사이가 극도로 나빠진 이슬람 세력과 유대인이 처음 적대한 사건은 628년 해자(Khandaq) 전투에서 메디나를 이끌던 무함마드 세력과 메카 편에 붙었던 유대인들 간의 싸움이었다. 이때 무함마드는 평소에 다른 전쟁포로들에게 자비를 베풀던 것과 다르게 유대인 부족의 남자들을 학살하고 여자들을 노예로 팔아치웠다. 다만 이는 메카-메디나 갈등 도중 해당 유대 부족이 노골적으로 박쥐 짓을 해서 징벌하는 셈 치고 쓸어버린 것이었기 때문에 반유대주의에 근거한 것은 아니다.
이슬람의 등장 이후로는 오히려 기독교 세력보다 이슬람 세력이 유대인에게 더 관대한 대우를 해 주었고, 중동에서의 유대인 억압은 동로마 제국 등을 중심으로 벌어졌다.
시간이 흐르며 중동 대부분이 이슬람화된 후에는 유대인과의 이렇다 할 트러블은 없었다. 오늘날 중동에서 반유대주의의 근거로 자주 언급되는 십자군 전쟁도 팔레스타인 지역에 기독교 국가를 세우는 것이 목적이었기 때문에 딱히 유대인과 관련 있지는 않았다.
이런 식으로 19세기까지만 해도 유대인들이 대체로 공존하던 편이었지만, 20세기 들어서 이슬람주의와 아랍민족주의 등이 판을 치기 시작하면서 반유대주의가 본격화됐다.
1915년부터 1916년까지 대영제국의 헨리 맥마흔과 아라비아 서부 '헤자즈'의 군주 샤리프 후세인은 아랍인들이 오스만 제국에 맞서 반란을 일으키고 아랍 민족의 칼리프제 국가를 세울 것을 지원하겠다는 내용의 서신을 서로 주고받았다. 전세계적으로 민족주의가 널리 퍼지던 시기에 영국이 아랍 민족주의를 부추겨서 동맹국의 일원인 오스만 제국을 무너뜨리려는 의도였다.
그러나 1917년에는 대영제국의 외무장관 아서 밸푸어가 유럽에서의 반유대주의를 약화하려는 의도로 팔레스타인 지역에 유대인의 국가 건설을 약속하는 '밸푸어 선언'을 해버리면서 맥마흔-후세인 간 서신과 모순되는 상황이 발생했다.
제1차 세계 대전 종전 후 유대인들은 유대 기구의 도움을 통해 많은 수가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했다. 날이 갈수록 심해지는 유럽에서의 반유대주의를 피해서 온 것이었다. 당연히 현지에 계속 살던 팔레스타인인과의 충돌이 불가피했다.
이때 오해하면 안 되는 게, 유대인 vs 팔레스타인인이라는 이분법적 통념과 달리 팔레스타인인은 민족적, 종교적 개념이 아닌 팔레스타인에 거주하는 사람들을 지칭하는 지역적 개념이다. 즉 팔레스타인인=아랍인인 것이 아니다. 아랍인이든 유대인이든 팔레스타인에서 살아왔다면 팔레스타인인이 된다.
따라서 대대로 팔레스타인에 거주했던 유대인들, 즉 유대인이면서 팔레스타인인이기도 한 이중적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도 많았다. 이들은 유럽으로부터 새로 들어온 유대인들과도 갈등을 빚었고, 이 둘을 구분하지 못한 다른 팔레스타인인들로부터도 따가운 시선을 받았다.
1920~30년대 영국의 팔레스타인 위임통치 기간 동안 아랍 현지인들과 여러 번 대화를 시도했으나, 영국 입장에서는 오랫동안 유럽 문화를 접하며 살아온 유대인들과 더 많은 교류를 할 수밖에 없었고 아랍인들은 점차 소외되었다. 결국 아랍인들의 의도와 별개로 반유대주의 감정이 싹틀 수밖에 없는 환경이 조성된 것이다.
결국 1936년 영국 및 유대인에 반발하여 팔레스타인에서 아랍인들의 민족 국가를 세우고 유대인 민족 국가 건국을 막으려는 대반란이 발생하고야 만다. 이는 진압되었으나 팔레스타인 지역에서의 반유대주의가 급격히 퍼져나가는 계기가 되었다.
1948년 마침내 팔레스타인 지역에 유대인의 민족 국가인 이스라엘이 건국되었고, 제1차 중동전쟁 때 이스라엘과 인근 아랍 민족 국가가 서로 교전하며 반유대주의 감정은 팔레스타인 지역을 넘어 중동 전반으로 퍼져나가고 말았다.
이후 냉전 시기의 아랍 민족주의는 이스라엘을 지원하는 미국에 맞서 소련을 필두로 한 제2세계와 친하게 지내고 그들의 세속주의, 사회주의적 요소를 가미하는 '아랍 사회주의'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아랍 사회주의의 가장 유명한 분파가 1963년부터 2024년까지 61년 간 시리아를 지배했던 바트당의 바트주의이다.
미국과 친하게 지내며 이스라엘과도 사이가 나쁘지 않았던 걸프의 왕정 산유국들과 달리 아랍 사회주의 국가들에서는 반유대주의 감정이 극심했다.
이집트에서는 바트당과는 다르지만 가말 압델 나세르를 중심으로 아랍 사회주의를 표방하며 이스라엘 및 유대인들을 적대시했다.
이후 아랍 사회주의 국가들과 이스라엘은 몇 번의 중동 전쟁을 더 치렀고, 마침내 이스라엘은 중동에서 거의 공공의 적 취급을 받게 되었다. 훗날 이집트 대통령인 안와르 사다트가 이스라엘과 화해를 시도했을 때 배신자 취급을 존나 받았을 정도다. 친미 국가인 사우디아라비아 등도 중동 국가들과의 관계를 생각해서 이스라엘 제재에 동참해야만 했다.
중동 전쟁이 끝난 이후 1980년대부터는 세속적인 아랍 사회주의에 반대하는 이슬람 근본주의 및 이슬람적 정치운동이 퍼지기 시작했다. 이들은 아랍 사회주의 국가들과는 적대관계였으나 그렇다고 그들의 적인 이스라엘에 우호적이지는 않았다. 오히려 종교적인 이유로 이스라엘을 넘어 유대인 전체를 적대했으며, 중동의 반유대주의 양상은 단순히 이스라엘을 싫어하는 정도에서 끝나지 않게 된다.
이슬람 근본주의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은 유대인을 서구 세력의 앞잡이이자 중동에 정치적 혼란을 불러온 악의 세력처럼 인식하기 시작했다. 근본주의에 동참하지 않더라도 일단 유대인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인식을 가진 중동 사람들이 꽤 많다.
21세기 들어서 아랍 사회주의는 거의 사라졌지만 이스라엘이 중동 전쟁 시기 끌어놓은 온갖 어그로로 인해 대부분의 중동 국가들이 여전히 이스라엘을 제재하는 중이며, 이스라엘과 유대인의 차이를 구분하지 못해 반이스라엘 감정이 막연하게 반유대주의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
말레이시아에는 유대인들이 거의 없음에도 불구하고, 나라 정체성이 이슬람이다보니 반유대주의가 유난히 심한 편이다. 특히 말레이시아 총리였던 마하티르 빈 모하맛이 아예 스스로를 반유대주의자라고 부르면서 반유대주의 음모론을 퍼트리고 다녔다.
일본에서는 친추축국 및 반미 성향의 대안우파 쪽에서 반유대주의 성향을 나타내기도 한다.
한국에서는 당연한 얘기겠지만 유대인들을 특별히 증오할만한 이유가 없다보니 그냥 없다시피하다. 기본적으로 우파들은 친미 및 친이스라엘 성향이 강하면서도 정확한 이해가 부족해 무작정 이스라엘=유대인이라고 뭉뚱그리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친유대성향이 강하다. 반대로 팔레스타인의 해방 등을 요구하는 좌파 진영에서 유대인들을 더 많이 비판해왔다.
그러나 2020년대 이후 인스타그램 등을 중심으로 해외의 대안우파 사상이 국내에 유입되기 시작했고 유대인 관련 음모론이 사람들에게 퍼지면서 대안우파 계열 반유대주의자들이 늘어나고 있다. 이들은 유대인과 이스라엘을 싫어하면서 동시에 팔레스타인도 그렇게 좋아하지는 않으며, 일부는 친유대 성향의 트럼프를 거부하기도 한다.
유대인들과 아프리카는 역사적으로 접점이 거의 없다보니 특별히 반유대주의 정서를 보이는 곳은 없다. 다만 자신들이야말로 히브리인의 후예라고 주장하는 일부 흑인우월주의자들이 유대인들은 가짜라고 비난하기도 한다. 이외에도 특별 사례로는 카다피 치하의 리비아, 이디 아민 치하의 우간다, 마시아스 응게마 치하의 적도 기니 등이 있다. 또 아파르트헤이트 시절의 남아공에서 반유대주의 역시 나타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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