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리니
| 로마 제국의 황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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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콘스탄티노스 6세 | → | 콘스탄티노스 6세 | → | 이리니 | → | 니키포로스 1세 |
| 이리니 | ||||||
| 재위기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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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92년 1월 15일 ~ 802년 10월 31일 (10년) | |||||||||
| 이 문서는 개쩌는 여성에 대해 다룹니다. 이 틀은 하는 거라고는 빼애액밖에 없는 메오후 같은 쿵쾅이들이 아닌, 존경받아 마땅한 여전설들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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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제국의 제81대 황제이자 로마 최초의 여성 황제이다.
지금까지는 왕조의 남자 황족들이 다 죽고 여자만 남으면 명목상의 결혼을 통해 다른 남자를 황제로 만드는 것이 관례였으나 그 관례를 깨고 자기가 직접 황제를 한 것이다. 뭐 어차피 단독 즉위 전에 이미 아들한테 공동 황제로 지명되었으니 그 자리를 유지한 것 뿐이지만...
'이리니'는 그리스어로 평화라는 뜻으로 로마자로 쓰면 Irene, 즉 아이린과 같다. 또한 출신지가 아테네이므로 아테네의 이리니, 아테네의 아이린 등으로도 불린다.
다만 역사에서의 행보는 평화와는 매우 멀었다. 자기 배로 낳은 친아들의 눈을 뽑아 황위를 찬탈하고 수도원에 쳐박은 무서운 인물이기 때문.
750년대의 어느 시점에 아테네에서 태어나 769년 콘스탄티노스 5세 시대에 그 아들이자 황위 계승 예정자인 레온 4세와 혼인했다.
775년 콘스탄티노스 5세가 죽고 레온 4세가 황제가 되자 이리니는 황후가 되었다. 레온 4세가 결핵으로 아팠기 때문에 실질적으로는 이리니가 통치했다.
레온 4세는 성상 파괴론자였고 이리니는 성상 옹호론자였기 때문에 레온 4세가 성상을 부수고 성상 쉴드러들을 잡아 족칠 때 항상 이리니가 끼어들어 그들을 쉴드치고 감형하는 데 도움을 줬다.
780년 레온 4세가 죽고 9살배기 아들 콘스탄티노스 6세가 즉위하자 이리니는 어머니로서 섭정을 10년 동안 벌였다.
787년 제2차 니케아 공의회를 열어 성상 파괴주의를 이단으로 낙인찍었다. 그러나 아들은 성상 파괴론자였다. 이제 둘은 싸울 수밖에 없다.
790년 엄마인 이리니가 먼저 선빵을 쳤다. 그러나 3년 간 이를 갈던 '이단' 성상 파괴론자들은 모두 콘스탄티노스 편을 들었다. 결과는 쿠데타 실패. 이리니는 수도원에 쳐박혔다.
그러나 792년 콘스탄티노스는 삼촌의 반란과 이슬람, 불가리아를 모두 막아내는 것이 힘겹다고 판단, 이리니를 2년 만에 복귀시켰다.
여전히 사이가 더러웠던 그들이다. 그러나 795년 콘스탄티노스가 사이가 나빴던 황후를 쳐내고 시녀를 황후로 들이는 사고를 치자 이때다! 하고 쿠데타를 준비했다.
797년 마침내 쿠데타로 아들을 쫓아내고 두 눈깔을 파버려 수도원에 쳐박아버렸다. 그리고 이리니는 로마 제국의 단독 여제가 되고 말았다.
물론 알겠지만 로마가 특별히 여자한테 관용적이고 성평등적이어서 그녀를 황위에 앉히는 걸 허용한 것은 아니다. 군사 국가인 로마에서 황제는 당연히 군대를 이끌 줄 아는 강인한 전사여야 했는데 여자가 황제라는 것은 국가안보적으로 매우 불안한 요소였던 것이다.
동로마에서 쫓겨난 황제의 눈 코 입 귀를 썰어버리는 이유도 비슷하다. 중세 시대에 신체가 썰린 사람 내지 장애인들은 완전한 인간이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불완전한 인간이 완전한 황제가 될 수는 없었던 것이다. 즉 정적의 신체를 썰어버리면 황제로 즉위할 정당성을 크게 떨어뜨릴 수 있고 황제 자리를 위협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물론 코가 썰리고도 꾸역꾸역 쿠데타를 일으켜 복위한 황제(유스티니아노스 2세)도 있었지만...
프랑크인의 살리카법에서는 여성이 군주가 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고 아예 게르만족들은 로마를 공위상태로 간주했다.
그녀는 먼저 제국의 정책이었던 성상 파괴주의를 근절하고 성상을 공경하게 했다. 성상을 다시 만들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은 제국의 예술(비잔티움 예술)을 발전시킬 수 있다는 것이기도 했기에 문화적 수준 향상에 기여한 셈이다.
근데 비슷한 시기 서방의 강대국 프랑크 왕국에서는 그 유명한 카롤루스 대제(샤를마뉴)가 있었다. 로마 교회와 동로마 제국이 사이가 나빠질수록 로마 교회를 자기 수중에 넣고 프랑크를 황제국으로 만들 가능성이 생기는데, 이리니가 성상 공경으로 로마 교회와 입장이 일치한다는 것은 카롤루스에게 위협이 되는 일이었다.
따라서 제2차 니케아 공의회를 무효화시키기 위해 삼위일체와 관해 가장 큰 논쟁거리였던 필리오퀘 논쟁을 일부러 강조하며 서방교회와 동방교회를 이간질했다.
교황청에서는 제2차 니케아 공의회는 유효하다고 보았지만, 교황령 성립에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친 프랑크 왕국을 무시할 수 없었기에 카롤루스에게 800년 서로마 황제 대관식을 치러주었다.
이로서 476년 서로마 영토 상실 이후 동로마로 반납된 줄 알았던 서로마 황제 직이 324년만에 느닷없이 갑툭튀하여 유럽의 황제는 셋이 되었다.(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와 동로마 제국의 황제, 불가리아의 황제)
여기서 끝났으면 좋았겠지만 이리니에게는 불행하게도 800년대 초반의 카롤루스는 욕심이 너무 많았다. 바로 카롤루스와 이리니가 서로 혼인하여 동서로마의 통합을 이루고 유럽의 단일 제국을 세우겠다는 아이디어를 낸 것이다.
이리니가 이 아이디어에 호의적이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시민들은 카롤루스-이리니 결혼설을 진지하게 받아들였고 결국 802년 10월 31일 이리니를 쫓아내 니키포로스 1세를 황제로 세웠다. 이로서 이사브리아 왕조는 끝나고 니키포로스 왕조가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