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레리아누스
| 로마 제국의 황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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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이깁투스의 군주 | ||||
| 아이밀리아누스 | → | 발레리아누스 | → | 갈리에누스 |
| 갈리에누스 | ||||
| 재위기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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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53년 9월 ~ 260년 6월 (6년 9개월) | |||||||||
로마 제국의 제33대 황제.
우리에게는 로마 황제들 중 최초로 포로가 된 황제로 유명하지만 그것 말고도 다른 것들이 있었다.
수백년 전 삼두정치 때 크라수스를 배출한 리키니우스 가문 출신의 원로원이었다. 이미 세베루스 왕조 시기부터 정치 활동을 하며 율리아 가문의 지원을 받았다.
군인 황제 시대가 열린 후에도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특히 여섯 황제의 해 때 고르디아누스 부자가 발레리아누스에게 로비를 했을 정도다. 푸피에누스와 발비누스가 잠깐 황제를 해먹었을 때 잘나가다가 고르디아누스 3세가 집권하자 정치적 보복의 대상이 되었다.
이후 필리푸스 아라부스, 데키우스, 트레보니아누스 갈루스 세 황제와는 모두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그러던 중 아이밀리아누스가 갈루스를 토벌하기 위해 반란을 일으키자 갈루스는 발레리아누스에게 지원병을 요청했다. 갈루스의 군대를 모두 끌어모았을 때쯤 갈루스가 살해당했다는 소식을 접하자 군대를 이끌고 아이밀리아누스를 토벌하러 갔다. 아이밀리아누스는 3달 만에 척결되었으며 이렇게 발레리아누스가 황제가 되었다.
발레리아누스는 아들 갈리에누스와 공동 황제로서 즉위했다.
4세기부터는 자주 발생할 제국의 분할통치의 프로토타입이 이 시기에 처음 나타났다. 발레리아누스 본인은 250년대 들어 사산 왕조 페르시아의 침입이 많아진 동부를, 아들 갈리에누스는 서부를 담당했다.
7년 동안 이 두 사람은 나름 로마를 평화롭게 이끌어나갔다. '그 사건'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그리고 발레리아누스는 257년부터 258년 사이에 기독교를 강하게 박해한 것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이에 따라 258년에는 로마 주교(지금의 교황)인 식스토 2세가 순교했다.
그러던 260년 초 에데사에서 로마군과 사산 왕조 페르시아군이 맞붙었다. 이때 페르시아의 샤푸르 1세는 황제가 소수의 수행원만 데리고 협상에 임하라고 요구했고, 놀랍게도 발레리아누스는 그렇게 했다. 누가 봐도 함정이었고 결국 발레리아누스는 페르시아군에게 붙잡혀 포로가 되고 말았다.
그렇게 한순간에 황제직을 잃고 포로로서 페르시아에서 살아가다가 사망했다. 아직 황제로 일하고 있던 갈리에누스는 계속 로마를 이끌어나갔지만 역대급으로 혼란한 시기를 맞이하고 만다.
일설에 따르면 페르시아가 그를 여러 행사에 끌고 다니며 조리돌리고 샤푸르 1세 전용 발판으로 썼다고 하지만, 역사학자들은 이것이 사실이 아니고 나름 좋은 대우를 받았을 것이라고 추정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