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오도시우스 2세
| 로마 제국의 황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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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르카디우스 | → | 테오도시우스 2세 | → | 마르키아누스 |
| 재위기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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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08년 5월 1일 ~ 450년 7월 28일 (42년 88일) | |||||||||
로마 제국의 제53대 황제.
테오도시우스 성벽은 사실 테오도시우스 1세 대제가 아닌 바로 이놈 때 지어진 것이다. 그런데 대제가 훨씬 유명하고 2세는 존재를 아는 사람 자체가 거의 없어 항상 묻힌다. 안습
401년 4월 10일생으로 아버지인 아르카디우스가 408년 5월 1일에 사망하자 사산 왕조 페르시아의 야즈데게르드 1세에게 후견인 자격을 맡기고 섭정으로 안테미우스를 앉혔다.
400년대에 서로마와 동로마는 요한 크리소스토무스 문제로 사이가 크게 나빠져 있었다. 이를 개선하기 위해 409년~410년 서로마가 서고트족에게 줘털리고 있을 때 군대를 보내 도왔다.
또한 그 유명한 천혜의 요새인 테오도시우스 성벽을 짓기 시작했다. 이렇게 완공된 성벽은 1453년 오스만 제국의 메흐메드 2세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함락시키기 전까지 천 년 동안 그 누구도 뚫지 못했다.
이 안테미우스의 외손자가 훗날 서로마 제국의 동명이인 황제 안테미우스이다.
414년 안테미우스가 죽고 나서는 아일리아 풀케리아가 누나로서 416년까지 섭정을 맡았다. 이 기간 동안 궁궐의 분위기는 수도원처럼 씹선비처럼 바뀌었다.
섭정은 416년에 끝났으나 그 이후에도 풀케리아의 영향력은 건재했다.
풀케리아는 동생의 아내로 아테네의 이교도 철학자 레온티우스의 딸 에우도키아를 시집보냈다. 이로서 황실은 그리스 문화의 상당한 영향을 받게 되었으며 425년에는 대학교와 비슷한 교육기관을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세웠다.
426년에는 기독교인이 다른 종교로 개종하는 배반 행위를 금지했다. 435년에는 이교 의식을 행할 경우 최대 사형까지 처할 수 있게 법을 개정했다.
427년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가 된 사람은 그 유명한 네스토리우스파를 이끄는 네스토리우스였다. 그는 예수의 인격과 신격이 따로 분리되어 있다고 주장했는데, 황제의 누나 풀케리아와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 키릴로스에 의해 431년 에페소스 공의회에서 파문당했다.
425년부터 438년까지는 '테오도시우스 법전'이라 불리는 로마 제국 전체 법률을 서로마의 발렌티니아누스 3세와 함께 만들었다. 즉 적어도 이때까지는 서로마와 동로마가 별개의 국가가 아닌 하나의 국가를 두 사람이 통치한다는 관념이 보편적이었다. 이후 서로마에서 만들어진 법들은 서로마 영역에서만 적용되었다.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던 풀케리아와 헬레니즘 문화를 영위하던 에우도키아는 충돌할 수밖에 없었고, 황제는 보통 누나 풀케리아의 편을 들어주었다. 결국 443년 에우도키아는 궁궐에서 떠났다.
한편 이 시기부터는 페르시아에서 로마에 우호적이었던 야즈데게르드 1세가 죽고 샤한샤가 몇 번 바뀐 끝에 바흐람 5세가 집권했다. 421년에 페르시아가 쳐들어왔다가 격퇴당한 바 있다.
훈족도 쳐들어와 돈을 내는 조건으로 전쟁을 막았으며, 페르시아와 반달족, 훈족의 3중 레이드 때문에 상당한 돈을 뜯겨야 했다.
누나와 황후가 둘 다 퇴물이 되자 환관인 크리사피우스가 실권자가 되었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 외부 침입이 계속되어 삥을 뜯기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449년 크리사피우스는 이를 타개하고자 아틸라 암살 시도를 했으나 망했다.
이렇게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쯤 450년 7월 28일 테오도시우스 2세가 사냥에서 다쳐 사망했다. 후계자가 없어 누나인 풀케리아가 형식적으로 장군인 마르키아누스와 결혼해 그를 즉위시키고 테오도시우스 왕조의 수명을 늘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