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스탄티노스 5세
| 로마 제국의 황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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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온 3세 | → | 콘스탄티노스 5세 | → | 콘스탄티노스 5세 | → | 콘스탄티노스 5세 | → | 레온 4세 |
| 아르타바스도스 | ||||||||
| 재위기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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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41년 6월 18일 ~ 775년 9월 14일 (34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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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제국의 제77대 황제.
아버지인 레온 3세의 의지를 이어 성상 파괴주의 기조를 이어나가는 바람에 훗날 정적들로부터 똥쟁이(코프로니모스)라는 별명까지 붙었으나, 실제로는 이슬람과 불가리아와의 전쟁에서 크게 승리하고 내치를 안정시킨 성군이었다. 다만 이 사람 때 교황령인 라벤나 일대를 랑고바르드 왕국에게 빼앗겼다.
718년 7월생으로 741년 6월 18일 부황인 레온 3세가 사망하자 뒤이어 즉위했다. 당시 로마 제국은 레온 3세가 우마이야 왕조를 막아낸 덕분에 역으로 우마이야 왕조를 공격할 수 있는 위치였고, 이에 따라 누이 안나의 남편이었던 아르타바스도스를 시켜 우마이야가 먹고 있는 고토를 탈환하게 했다.
그런데 아르타바스도스는 우마이야로 가지 않고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진격해 콘스탄티노스 5세를 쫓아내버렸다.
물론 콘스탄티노스의 세력도 건재하던 상황이었고, 제국은 성상 공경론자인 아르타바스도스의 세력과 성상 파괴론자인 콘스탄티노스의 세력으로 양분되었다.
2년 간의 내전 끝에 사르디스 전투에서 콘스탄티노스가 아르타바스도스를 격퇴했으며, 아르타바스도스는 우마이야에게 도움을 요청했으나 내전으로 혼란스러웠던 우마이야는 도울 수 없었다. 결국 아르타바스도스는 붙잡혀 눈이 뽑혔으며 콘스탄티노스는 그를 수도원에 쳐박아버렸다.
745년부터 747년까지 전염병으로 인해 제국의 인구 1/3이 사망했다.
746년 우마이야 왕조를 쳐들어가 아버지의 출생지인 게르마니키아(現 튀르키예 마라쉬)를 탈환했다.
747년 알렉산드리아에서 이슬람군에게 그리스의 불을 쏴 통구이로 만들어버렸다.
이 시기 우마이야와의 영토 탈환전은 진짜 영구적으로 제국의 영토를 회복하는 것보다는 어차피 나중에 다시 뺏길 땅임을 메타인지하고 인구만 제국으로 이주시킨 다음 도시를 파괴해서 상대의 회복을 느리게 하는 것에 그 목적이 있었다.
서쪽의 상황은 나빴다. 기본적으로 로마 교회를 믿는 서방에서는 성상 파괴를 외치는 동로마에 호의적이지 않았다. 결국 751년 라벤나를 랑고바르드 왕국에게 빼앗기며 서방 교회에 대한 영향력을 상실했다.
754년 콘스탄티노스 5세는 시노드를 열어 성상 파괴주의의 정당함을 역설하고 반대파들을 때려패거나 죽였다.
같은 해 프랑크 왕국의 피핀 3세가 랑고바르드 왕국을 공격해 구 라벤나 총독부 영토를 빼앗고 이를 교황 스테파노 2세에게 증여했다.
756년 피핀 3세가 또 한 번 교황에게 영토를 증여하면서 교황령이 성립되었다.
그의 나머지 20년의 치세는 불가리아와의 싸움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먼저 756년 불가리아의 코르미소쉬 칸이 침입했으나 로마군에게 격퇴당하고, 코르미소쉬는 비네흐에게 쿠데타를 당해 쫓겨났다.
759년에 일어난 전투에서는 비네흐가 이끄는 불가리아군이 승리했으나, 평화협정으로 시마이를 치는 바람에 빡친 귀족들이 비네흐를 쫓아내고 텔레츠가 새 칸이 되었다.
763년에는 텔레츠가 이끄는 불가리아군과의 싸움에서 로마군이 승리하면서 텔레츠는 내부의 암살을 당했다. 이후 사빈이 칸으로 즉위했다.
사빈은 로마와의 평화를 원했고 내부의 반발이 커지자 766년에 로마로 망명했다. 그 다음 칸인 파간 또한 협상을 원했으나, 협상 이후 로마가 불가리아의 뒤통수를 때려버리는 바람에 빡친 불가리아 귀족들이 768년 파간을 죽였다.
770년대에도 불가리아와의 싸움은 계속되었으나 775년 콘스탄티노스는 원정 중 폭염으로 인해 회군하다가 사망했고, 아들 레온 4세가 뒤이어 즉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