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스티니아누스 1세
| 로마 제국의 황제 | ||||
|---|---|---|---|---|
| 유스티누스 1세 | → | 유스티니아누스 1세 | → | 유스티누스 2세 |
| 재위기간 | |||||||||
|---|---|---|---|---|---|---|---|---|---|
| 527년 8월 1일 ~ 565년 11월 14일 (38년 105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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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제국의 제61대 황제.
보통 유스티니아누스 대제라고 불린다.
482년 5월 11일 '페트루스 사바티우스'라는 이름으로 마케도니아 촌구석 농부 집안에서 태어나 밭이나 갈면서 살았다.
같이 밭갈던하던 삼촌이 입신양명의 꿈을 품고 콘스탄티노폴리스로 향하면서 유스티니아누스의 인생은 변화하게된다. 수도로 간 삼촌 유스티누스 1세는 문맹에 교육의 ㄱ자도 못본 사람이라 그렇지 사람이 호탕하고 체격이 늠름해 금세 전쟁에서 공을 세워 졸병에서 황제 근위대로 승진했고, 이렇게 수도에서 어느정도 입지를 굳힌 유스틴은 슬하에 자식이 없었기에 고향에서 농사나하던 유스티니아누스를 불러 가르치고 입히고 먹이며 친 아들처럼 길렀다.
시간이 흘러 유스틴은 어느새 근위대장이 되어있었고 유스티니아누스는 자신의 이름을 유스티니아누스로 개명한다(이게 무슨 소리인가 하면 우리가 익히 아는 유스티니아누스란 이름은 개명한 이름이고 전 이름은 앞서 말했듯 페트루스 사바티우스)
한편 518년 7월 9일 유스틴은 섬기던 황제 아나스타시우스 1세가 후사를 정하지 못한채 병사해버리는 사태가 벌어진다. 수도의 귀족들은 당연하게도 유력한 황제 후보인 유스틴에게 뇌물 공세를해댔고, 이에 유스티니아누스는 유스틴에게 받은 뇌물을 시민들에게 베풀라 조언했다.
그랬더니 유스틴은 단지 귀족들만의 지지가 아닌 시민들의 지지도 얻었다. 이제 남은 문제는 전임 황제의 조카들과 군대의 지지인데 이 또한 유스티니아누스의 조언이 큰 역할을 한다. 일단 유스티니아누스는 명망이 높은 장군을 수도로 불러들여 포섭을 시도했고(그러나 장군의 명망이 너무 컸기에 포섭을 시도하다 결국 암살해버린다.) 전임 황제에게 미움을 사 작위가 박탈되거나 투옥된 군인들을 사면하고 고용해 유스틴의 친위 세력을 형성한다. 그리고 이 때 즈음에 테오도라와 만나 연애를 시작하고 결혼하려다 독실한 신자이던 형수에게 빠꾸먹고 잠시 헤어진 척 코스프레했다.
그 후로 그냥저냥하게 시간이 흐르던 중 테오도라를 빠꾸먹였던 형수가 죽고 525년 낮은 신분과의 혼인을 금지하는 법이 사라져 법을 고쳐 테오도라와 결혼할 수 있게 되었다. 얼마 뒤인 527년 8월 1일 유스틴도 사망하자 그 후계로서 유스티니아누스가 즉위한다.
즉위 후 유스티니아누스는 제국 각지에서 명망 높은 인사, 능력있는 인물들을 등용해 제국 개혁에 나선다.
테오도라에 대해 잠깐 얘기하자면, 창녀 출신이다. 스트립쇼나 해대던 비천한 여자였는데 창녀 치곤 빡머가리가 아니었는지 존나 똑똑했다고 한다. 와꾸도 어느정도 먹히고 머리고 좋은 테오도라를 유스티니아누스는 창녀였지만 좋아했다고 한다. 그래서 삼촌인 유스티누스 1세에게 "삼촌 천민하고 귀족하고 결혼할 수 있게 법좀 고쳐주세요"라고 했다가 유스티누스가 "만날 여자가 없어서 창녀나 만나냐 개새끼야" 이럴 정도로 반대했다고 한다. 결국은 유스티니아누스는 즉위하자마자 법을 고치고 테오도라랑 결혼했다고 한다. 이것은 유스티니아누스의 신의 한수가 되어서 테오도라는 결혼 후에는 정숙하게 살았고(다만 프로코피우스의 비사에는 그런 '척'만 했다는 설이 있다.) 거의 공동 통치자급으로 군림했다. 그대신 유스티니아누스가 공처가가 됐다더라.
먼저 제국의 가장 중요한 부분인 재정 개혁에 나선다. 유스티니아누스는 카파도키아의 요한이라 불리는 인물을 발탁한다. 요한은 자리에 앉자마자 그 즉시 개혁에 나서 부패 관료들을 모조리 쓸어버리고 세금 징수를 지방 총독, 관리가 징수함이 아닌 중앙 정부의 공식 징수원이 징수케 만들어 중간에서 발생하는 일종의 짬처리를 원천 배제하였다. 그리고 더 나아가 세금을 낼 능력이 있음에도 세금을 안내려하거나 혹은 그렇게 보이는 인물에게 고문을 허용하는 법안을 상정해 매우 가혹하고 무자비하게 세금을 징수했고 이 개혁을 단행해 얻은 막대한 재정은 훗날 유스티니아누스의 재정복 사업의 큰 영향을 끼쳤다.
다만 카파도키아의 요한은 능력 자체는 로마사에 길이남을 정도로 뛰어났지만, 천성이 잔혹하고 탐욕스러워 그 본인이 막대한 부패를 저지르고 노예를 막대하기로 악명이 자자했다(하지만 그럼에도 유스티니아누스에게 상납하는것을 잊지 않았고, 그리고 무엇보다 요한의 막대한 부패를 감당하고서도 남을 정도로 세수가 막대했기에 별다른 간섭이나 처벌은 없었다.)
그리고 자타공인 유스티니아누스 최대의 업적이라 칭송받는 로마법 대전을 위시한 사법 개혁이 529년부터 534년까지 이어졌다. 이번에는 트리보니안(Tribonian)을 등용해 당시 통일된 법전이 없어 돈만 내면 무조건 무죄방면되던 로마 법체계를 완전히 뜯어고친다. 트리보니아는 대략 1년 조금 넘는 시간만에 기존의 법과 전례를 모조리 집대성하는 법전의 기초를 만들었고 이후 유스티니아누스 본인이 가세해 로마대법전을 제작한다. 이후 트리보니안은 법전 제작하던 중 겸사겸사 변호사들을 위해 조언 및 기존의 판례등과 기타 등등을 집대성한 코르푸스 주리스 시빌리스(Corpus Juris Civilis)를 집필하고 이것이 훗날 민법의 시초가된다.
그러나 트리보니안은 요한을 뛰어넘는 개막장이였는데 첫째는 그가 이교도였으며 둘째는 부패했고 셋째는 심각할정도로 부패했다는 것이다. 트리보니안은 겉으로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이자 청렴한 법학가였으나 그 실체는 남한테 돈 받고 법전을 수정해주는 막장 행각을 저지르고, 웬만하면 자기 측근들의 부패나 스캔들을 봐주던 유스티니아누스도 질려할 정도로 정체 불명의 이교도 혹은 사이비 종교에 심취해있었다.
525년에는 사산 왕조 페르시아랑 맞짱을 떴다. 사산 제국이 '이베리아'(스페인 쪽의 이베리아와는 관련이 없다)라는 캅카스 지역에서 종교 탄압을 벌여놓고는 샤 카바드 1세가 호스로 1세의 후견을 맡아달라는 요구를 해서 사산에 대한 동로마의 민심이 좆박은 상태였다. 유스티누스와 유스티니아누스는 이 요구를 들어주고 싶었지만 좆창난 민심 때메 어쩔 수 없이 거절했다.
결국 525년부터 530년까지 친로마 국가들과 친이란 국가들끼리 대리전을 벌였다. 먼저 아프리카에 있는 국가들끼리 맞짱을 깠는데, 친로마인 악숨 왕국(지금의 에티오피아)와 친이란인 힘야르 왕국(지금의 예멘)이 박터지게 싸웠다.
몇몇 친이란 국가들은 주제넘게 로마의 영역까지 침입했고, 마침내 유스티니아누스는 사산 왕조 페르시아를 막기 위해 벨리사리우스라는 사기 카드를 꺼낸다.
로마 황제 문서들을 정독한 사람이라면 507년~508년에 아나스타시우스 1세가 '다라'라는 동쪽 국경도시에 요새를 쌓았던 걸 기억할 것이다. 그 떡밥이 여기서 회수된다. 530년 마침내 다라에서 로마군과 사산군이 맞붙기 때문이다.
530년 벌어진 다라 전투에서 사산군은 개같이 쳐발렸고, 사탈라 전투에서도 로마군은 또 한번 이겼다. 531년 칼리니쿰 전투에서는 사산에게 패배해 벨리사리우스가 해임당하지만 얼마 안 가 반대쪽 지중해를 재정복하는 임무를 맡게 된다.
사산의 카바드 1세가 죽고 호스로 1세가 즉위하며 532년 협상을 통해 전쟁을 끝냈다.
이리저리 내정에 안정되자 유스티니아누스는 이제 외부로의 확장을 목표로 하려고하는데 532년에 '니카의 반란'이 터진다. 자세한 전후사건은 생략하고 기본만 설명하면 이렇다. 당시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선 전차시합이 유행했는데 대표 팀이 녹색파와 청색파가 있었다. 이들은 지금의 축구 등 스포츠 훌리건들처럼 시작했으나 그 세력이 너무 커져 하나의 정당처럼 기능하게 된 집단이었다.
각각 한명씩 이 두 팀의 기수가 유죄 선고를 받고 사형 집행을 받아야하는데, 어찌저찌 구사일생했고 또 마침 그 사형장에있던 사제들이 이 두 기수를 구해 교회로 데려가고 이에 당연하게도 군대가 나서서 교회를 포위하자(교회는 성전이라 무기 가지고 못 들어가고 폭력 쓰면 안된다) 이에 두 팀이 황제한테 두 기수를 사면해달라 요청한다.
당연하게도 황제는 이딴 개소리를 들어줄 이유가 없었기에 무시했고, 이렇게되자 두 팀이 손잡고 폭동을 일으켜 황제를 죽이려 시도하고(실패한다) 도시를 박살내기 시작한다. 이에 유스티니아누스는 깜짝 놀라 요구를 들어줄 터이니 진정하라 했으나 이젠 음식 나중엔 새 황제를 요구하며 폭동은 더욱더 거세져갔다. 결국 유스티니아누스는 재화와 몇몇 측극들을 대동해 도주하고 멘탈이 박살났는지 퇴위까지 진지하게 논의하나가 테오도라의 '왕좌에 앉아 죽는게 평민으로 사는것보다 낫다' 라는 말에 멘탈을 추스르고 폭도들을 진압하기위한 방법을 모색하기 시작한다.
우선 벨리사리우스와 문두스(장군들)에게 명을 내려 군사를 소집하고 최측근이자 환관인 나르세스에게 꿍쳐온 돈을 청색파에게 먹여 녹색파와 분열을 일으키도록 한다. 본디 청색파였고 청색파의 안배를 여러차례 봐주었지 않냐며 또 옹립된 황제는 녹색파라며 이간질 시켜 청색파의 일부를 해산시킨다. 이후 벨리사리우스와 문두스에게 옹립 황제를 납치해오라 명했지만 경비가 너무 삼엄하여 실패하고 결국 군대를 동원한 진압에 나서고 하룻밤 동안의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고, 결국 폭도들은 약 3만의 사상자를 내며 대패하고 뿔뿔이 흩어지며 니카의 반란은 끝을 맞이한다.
반란의 종결 직후 유스티니아누스는 폭동으로 인해 손상된 도시의 재건에 나섰고, 폭동으로 인해 파괴된 기존의 대성당을 개축하여 현재의 이스탄불 하면 생각하는 하기아 소피아 대성당을 건설케한다. 이렇게 반란 문제도 어찌저찌 수습한 유스티니아누스는 과거 로마 약탈의 복수를 명분으로 전 로마령 북아프리카에 세워진 반달 왕국의 재정복을 계획하나 때마침 반달 왕국의 왕으로 즉위한이가 동로마식 기독교를 신봉하고 친 로마적 인사라 흐지부지된다.
그러나 533년 반달 왕의 조카이자 독실한 아리우스파 기독교의 신봉자이던 겔리메르가 쿠데타를 벌여 힐데리크 왕을 쫓아내고 본인이 반달 왕국의 왕으로 즉위한다.
이에 한창 명분을 찾던 유스티니아누스는 그 즉시 폐위된 왕의 복위를 명분으로 벨리사리우스에게 1만 6천의 육군과 600척의 군함을 붙여 반달 왕국을 정복하러 보낸다(사전에 왕을 복위시키라 외교적으로 요구했지만 당연히 거부 당했다.) 또 유스티니아누스 본인은 외교적 수단을 동원해 533년 반달 왕국 사르데냐에서 반란을 일으켜 반달군과 해군을 뿔뿔이 흩어지게 만들어 벨리사리우스의 군이 아무런 저항 없이 북아프리카에 상륙케한다.
이후엔 벨리사리우스의 뛰어난 군재와 통찰력과 약간의 운의 도움으로 순식간에 본토에 남은 반달군을 격파하고 겔리메르의 형제들을 모조리 참살했으며 겔리메르 본인은 포로로 잡힌다. 결국 534년 반달 왕국은 멸망하고 북아프리카에 다시 한번 로마 제국의 깃발이 휘날리게 만드는데에 성공하며, 이에 유스티니아누스는 벨리사리우스의 공을 치하하고 반달족의 수도에서의 승전식을 거행함을 허가한다(아우구스투스 이후로는 오직 황제나 황제의 혈연만이 승전식을 거행함이 가능했다.)
북아프리카를 수복한 유스티니아누스는 이탈리아 반도 재정복을 준비하였는데, 때마침 동고트 왕국의 아말라순타라는 친로마파 여왕이 군림하고있었고, 자신의 아들을 로마인처럼 키우는 등(프로코피우스나 당대 야사에셔는 유스티니아누스와 아말라순타가 그렇고 그런 사이여서 그렇다는 말이 있다.) 굳이 친하게 지내자는 나라 쳐들어갈 명분도 없고, 필요도 없어서 이탈리아 방면은 잠시 접어둔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않아서 535년에 아말라순타 여왕과 여왕의 아들이 반로마파인 조카에게 살해당한다.
그러자 유스티니아누스는 땡잡았다하는 기분으로 535년부터 재정복을 다시 추진한다. 이번에도 원정군의 사령관은 벨리사리우스였지만, 유스티니아누스는 벨리사리우스에게 모종의 위협감을 느꼈는지 북아프리카 재정복 당시 동원된 1만 6천의 절반도 안되는 7천 5백의 군대로 이탈리아를 재정복하라고 명령한다. 사실상 벨리사리우스에게 죽으러가라는 수준이였는데 놀랍게도 벨리사리우스는 이탈리아 남부 장악에 성공하고 전초기지를 세운다.
그러자 유스티니아누스는 즉각 증원군을 보내 동고트 왕국의 북동쪽을 치고 동시에 갈리아(현 프랑스 권역)의 프랑크 왕국에 돈을 먹여 동고트 왕국의 북서쪽을 치게한다. 그러자 동고트는 사신을 보내 '아이고 황제폐하 자비점..' 하는 등 사실상 항복하는 분위기가 되었으나...
동고트군이 기적적으로 증원군 분쇄하고 프랑크족을 몰아냈으며, 더욱이 정복한 북아프리카 방면에서 반란이 일어나 이탈리아 전선이 고착화되어버렸고 북아프리카는 다시 야만인들의 손에 들어가기 일보직전인 상황이 되어버리고 만다. 당시 로마 제국의 이탈리아 원정은 취소되는 분취기였으나.. 자신감이 급충전된 동고트 국왕이 로마의 사절을 잡아쳐넣는 등 도발을 감행하자 이에 분노한 유스티니아누스는 '다 좆까고 이탈리아 먼저 족친다'는 결정을 내리게한다. 이에 벨리사리우스는 명을 받들어 북진을 감행하고 536년 로마 바로 밑에 위치한 네아폴리스(나폴리) 시를 함락시킨다.
네아폴리스를 함락시킨 벨리사리우스가 로마 함락을 위한 행군을 준비하던 도중 동고트 왕국 내에서는 현임 왕의(아말라순타를 죽인 조카) 무능으로인해 이런 일이 벌어진것이라며 귀족들이 모의해 부르군트 왕국의 왕 비티게스를 왕으로 옹립한다. 그러던 말던 벨리사리우스는 군대를 이끌고 로마로 행군했고 때마침 로마 주교(훗날 교황)의 지지로 손쉽게 로마를 손에 넣는데에 성공한다. 직후 비티게스와 그의 군대는 벨리사리우스를 몰아내기위해 남쪽으로 행군을 개시했고 벨리사리우스는 압도적인 적에 맞서는 것보다는 로마시를 방어거점으로 삼고 버티기를 선택했고 또다시 벌어진 치열한 전투끝에 간신히 로마를 사수해냈고, 이후 연달아 벌어진 수차례의 전투 끝에 끝끝내 비티게스의 군세를 역으로 박살내면서 로마의 사수를 성공해낸다.
그리고 때마침 유스티니아누스가 보낸 2차 증원군이이 도착하면서 상황이 바뀐다. 2차 증원군은 기병을 중심으로 구성된 정예군이였는데 각각 2부대로 나뉘어져 하나는 유스티니아누스의 최측근 환관 나르세스의 부대였고 다른 하나는 최근에 장군으로 승진한 젊은 요한이라는 장군이였다. 벨리사리우스는 나르세스의 부대는 그대로 본대에 합류하고 요한이 이끄는 기병대는 북쪽을 향해 남은 동고트군을 가능한한 무자비하게 박살낼것을 명했다(그리고 후미를 잡혀 포위 당할것을 우려해 결코 적을 뒤에 남겨둔채 전진치 말라는 경고도 했다.)
요한의 기병대는 쾌속 전진을 감행하며 악시무스라는 잘 요새화된 도시에 당도하는데 악시무스의 방비가 철저했고, 요한이 이끄는 기병대는 공성전에 불리하기에 벨리사리우스의 조언겸 명령을 어기고 악시무스 무시한채 진격한다. 또 한참 가다가 우르비누스라는 요새도 마찬가지로 무시하고 진군한다. 그렇게 진군한 요한의 군대는 아리미니움이라는 도시에 도착했는데 아리미니움은 이미 그곳에 살던 로마 시민들의 반란으로 동고트군이 떠난지 꽤 된 도시라서 요한의 군대는 환대 받으며 도시로 입성하였다.
또한 아리미니움은 동고트 왕국의 수도인 라벤나와 매우 가까운 위치에 있어 이곳을 점거시 라벤나 공략에 큰 도움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앞서 설명했듯이 요한이 무시하고 지나온 두 도시의 존재로인해 사실상 고립된 아리미니움은 전략, 전술적 가치를 상실한지 오래라 요한의 아리미니움 점령 소식을 들은 벨리사리우스는 즉각 철퇴할것을 명한다.
그러나 요한은 벨리사리우스의 명을 어기고 독자적으로 아리미니움을 사수하려하였다, 그러나 벨리사리우스의 생각대로 얼마 안 가 아리미니움은 동고트군에의해 포위 당했다. 이 소식을 들은 벨리사리우스는 요한의 부대를 구원키위해 전군을 꼬라박는 위험을 감수 할 수 없다는 판단으로 부대를 이끌고 천천히 도시들을 하나 하나 공략하면서 북상한다는 작전을 수립하고 이에 대부분의 장군들의 동의를 받는다.
그러나 이 작전에 나르세스는 즉각적이고 격렬하게 반대한다(나르세스와 요한이 개인적, 정치적으로도 상당한 친분이 있었던것이 작용했을 가능성이 높다) 나르세스는 대략 '우리가 수가 많나? 아니지 그리고 요한이 이끄는 부대는 정예 기병 부대인데 이걸 안 구한다고? 님 대갈빡 수준이?' 라면서 벨리사리우스의 작전을 맹비난했고 이 직후 요한 부대의 전령이 아리미니움의 상황이 얼마나 안 좋은지에대해 말하면서 나르세스의 '요한 부대를 구원해아한다!'라는 안에 무게가 실린다.
결국 벨리사리우스는 나르세스의 안을 받아들여 요한 부대를 구원키위해 병력을 북상시킨다. 먼저 벨리사리우스는 군을 세개로 나뉘어 하나는 해로로 하나는 해안가로 나머지는 산을 타 아리미니움으로 향하하게한다. 해안가로 향한 부대는 조용히 이동하며 적의 도시가 보이면 밤에 도시 근처에 대규모로 불을 질러 대규모의 군대가 도시를 포위한것처럼 적들을 속였고, 그러던 사이 나머지 두 부대는 아리미니움을 향해 맹렬히 진군하고 있었다.
먼저 해로를 향해 오던 부대가 아리미니움에 나타나자 남쪽의 대군에대한 소문을 들은 동고트군은 예상치 못한 로마군의 함대가 보이자마자 바로 도망치기에 여념이 없었고, 이때 요한군이 추격을 해 동고트군을 분쇄하는대에 성공했다면 이탈리아 정복은 매우 수월해질 수 있었다. 그러나 요한군은 오랜 포위로인해 굶어죽기 직전의 상황에 몰려 적을 추격할 여력이 없었고 로마군은 매우 크나큰 기회를 놓치게 된다.
어찌되엇건 본대와 요한의 부대는 합류하게 되었고 이제 차근차근 이탈리아를 정복하기만 하면 되는 일이였지만 여기서 또 일이 꼬이고 만다. 구출된 요한이 벨리사리우스보다 먼저 자신을 구원하자는 안을 낸 나르세스에게 먼저 감사를 표하자 본인에게 먼저 감사를 표함이 맞다고 생각하던 벨리사리우스는 이에 분노한다.
이후 둘은 사사건건 부딪히며 싸웠는데 이는 곧 군내의 분열로 이어진다. 기존에 벨리사리우스와 함께 싸우던 군인들은 대개 벨리사리우스를 지지했으나, 증원군과 그 외의 병력은 '결국 나르세스가 없었으면 이 승리고 뭐고 없는거였잖아?' 라고 생각했고 거기에 나르세스가 군인들에게 봉급을 주는 역할을 맡았기에 군대는 사실상 반쪽으로 나뉘어져 버린다.
이 분열은 조금씩 조금씩 싸여오다가 메디올라눔 구원전에서 표출된다. 메디올라눔은 이탈리아 내에서 가장 부유한 도시중 하나로 로마를 지지하고 있었는데 최근에 동고트군에의해 포위를 당하였고 이 소식을 들은 벨리사리우스는 즉각 군대를 북상해 메디올라눔을 구원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나르세스는 너무 위험하다며 우르비누스를 먼저 함락해 우르비누스 -> 아리미니움 -> 메디올라눔 이렇게 안전하게 진로를 뚫어놓고 가야한다고 주장하였고 그리하지 않는다면 나르세스와 그의 부대는 따로 행동하겠다는 엄포를 내건다.
또다시 자신의 안이 나르세스에의해 반대 당하자, 분노한 벨리사리우스는 유스티니아누스가 그에게 내려준 명령장을 들먹이며 오직 자신만이 군대를 어디로 움직이고 어디서 싸울지 결정할 권한을 가지고 있다며 나르세스는 그저 자신의 명령에 복종하면 된다고 말했다. 그러나 법학에 능했던 나르세스는 명령장을 찬찬히 살펴보더니 '로마에 이익이 될 때에 한해서' 라는 구절을 들먹이며 메디올라눔 구원전은 로마에 이득이 되지 못한다고 주장하였고 당황한 벨리사리우스는 말로 해봐야 답이 안나온다는걸 알고 나르세스의 안대로 하기로 한다.
그렇게 군대는 우르비누스로 진군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정작 우르비누스에 도착한 나르세스는 우르비누스의 방비가 너무 철저하니 차라리 적의 수도 라벤나를 공략함이 더 낫다 라고 말하며 요한을 설득해 나르세스 본인은 동고트 왕국의 수도인 라벤나로 요한은 근처 지역의 정복을 맡기로 하였다. 문제는 이 행동을 벨리사리우스의 동의도 받지 않고 독단적으로 진행한 일이라 벨리사리우스는 무척이나 분노했고.
참을만큼 참았다고 판단한 벨리사리우스는 본국의 유스티니아누스에게 직통으로 '나르세스가 내 말 안들어요!'라고 항의하는 편지를 썻고, 이 편지를 받은 유스티니아누스는 즉각 나르세스를 소환해 해임하고 다시 한번 벨리사리우스만이 유일한 원정대의 총사령관이자 현장 지휘관임을 공포했다. 이후 드디어 군대를 원하는대로 주무를 수 있게된 벨리사리우스는 빠른 속도로 이탈리아를 정복해나가며 비티게스의 군대를 깨강정 내버리고 비티게스를 사로잡는데에 성공하고 전후 협상에 나서기 시작한다(이 때 즈음에는 로마군의 위엄이 워낙 높아 로마군이 나타나기만 하면 줄줄이 도망치기에 바빴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로마의 확장에 겁을 먹은 사산조 페르시아가 로마와 맺은 화평 조약을 깨고(이 화평 조약을 맺기위해 유스티니아누스가 피똥 싸면서 노력했다) 동부 침공을 개시한다. 이런 급사태가 벌어지자 유스티니아누스는 일단 벨리사리우스를 불러와 급한 불 먼저 끄려했다. 그러나 벨리사리우스는 다 이긴 전쟁을 그만두고 돌아갈 맘 따위는 없었기에 명령장에 '원로원이 결정한 바...'(사실상 이 때 즈음엔 거수 기관 이외로는 기능치 않았다) 라는 부분을 문제삼아 유스티니아누스 본인의 직명이 아닌 이상 못 믿는다면서 일주일간 더 뻐팅기고 결국 540년 동고트의 수도인 라벤나를 초토화시키는데에 성공한다.
근데 같은 해 협정으로 휴전 중이던 사산 왕조의 호스로 1세가 통수를 치고 침입해오며 잠시 고토 수복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541년에는 고대판 코로나인 유스티니아누스 페스트가 퍼지며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갔다.
이 지랄이 난 상황에도 벨리사리우스는 사산 왕조군을 퇴각시켰다. 그런데 542년 모함으로 잠시 짤리게 된다.
545년 동로마가 돈을 내는 조건으로 두 나라는 싸움을 잠시 멈췄다.
이맘때쯤 541년에는 동고트 왕국에서 토틸라라는 놈이 집권해 동로마를 통수쳤다. 542년 무켈리움 전투에서도 승리하며 동고트는 기고만장해지고 있었다. 543년에는 이탈리아 지역의 동로마 거점인 나폴리까지 다시 뺏겼고 토틸라는 나폴리 시민들에게 관용을 베풀며 민심까지 장악했다.
동로마는 이렇게 힘들게 먹어놓은 이탈리아를 다시 빼앗길 위기에 처했다. 이때 다시 컴백한 것이 벨리사리우스였다. 그는 544년에 군대를 모으고 545년 이탈리아로 들어갔다.
545년 말부터 동고트 왕국은 동로마 손에 넘어가 있던 로마 시를 포위했다. 벨리사리우스는 로마를 구원하기 위해 테베레 강으로 들어갔으나, 문제는 오기로 했던 베사스가 파토를 냈고 보급 기지의 이사키오스가 gg쳤다는 가짜뉴스까지 퍼지며 사기를 잃고 후퇴하고 만다.
결국 546년 말 로마는 동고트군에게 다시 먹혔고, 이번에는 관용을 베풀지 않아 수많은 로마 시민들이 도륙났다.
547년 이탈리아의 나머지 동로마군을 썰어버리기 위해 토틸라가 나선 틈을 타 벨리사리우스는 다시 로마를 처들어갔고 재탈환하는 데에 성공한다.
이후 루카니아로 쳐들어가다가 토틸라군과 만나 줘털리고 시칠리아로 런한다. 벨리사리우스는 아내 안토니나를 보내 원병을 요청했지만 548년 안토니나와 친한 황후 테오도라의 사망으로 아무 것도 얻지 못했다. 이후 549년 벨리사리우스는 시칠리아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소환되어 은퇴했다.
550년 로마는 또 동고트에게 먹혔고 이번에도 약탈이 자행되었다.
그러나 나르세스가 나서면서 전세는 뒤집혔다. 551년 나르세스, 요한네스, 발레리아누스가 이끄는 동로마 해군은 세나 갈리카 전투에서 동고트군을 개쳐박살내고 육지에 상륙해 이탈리아 북부로 진격하기 시작한다.
552년에는 '타기나이'라는 곳에서 동고트의 토틸라군과 맞붙었는데, 토틸라는 프랑크 왕국에 헬프콜을 보내놓았고 시간을 끌면 되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동고트군은 동로마에게 개털렸다. 심지어 우두머리인 토틸라까지 전사하며 동고트는 매우 불리해졌다.
이후 동고트의 왕은 지원군으로 왔던 테이아가 되었으나 그마저도 553년에 산으로 몰렸고 산에서 농성했다. 식량이 다 떨어지자 말까지 잡아먹었고, 그마저도 떨어지자 산에서 내려와 돌격했으나 나르세스의 로마군에 패배하며 동고트 왕국은 멸망했다.
동고트 멸망 이후에는 프랑크 왕국이 쳐들어왔으나 554년에 또 나르세스에게 격퇴당했고 이로서 이탈리아는 다시금 완전한 로마 제국의 영토가 되었다.
근데 전쟁 동안 날린 돈이 산더미만한 탓에 나르세스는 이탈리아 총독으로 부임하면서 세금을 존나 뜯었고, 로마 시민들은 차라리 동고트인한테 통치받던 때가 낫다는 드립까지 쳤다.
이탈리아나 북아프리카로 만족했다면 유스티니아누스가 대제가 아니다. 그는 로마 최전성기 서쪽 영토였던 히스파니아도 수복하려 시도했다.
당시 히스파니아에는 프랑크 왕국의 클로비스 1세에게 털려 이베리아 반도로 쫓겨난 서고트 왕국이 있었다. 그리고 549년 아타나길드라는 인물이 왕 아길라 1세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키고 있었는데 동로마에 도움을 요청했다.
552년 동로마군은 지금의 스페인 무르시아 근처에 있는 항구 도시 카르타헤나에 상륙했다. 554년에 아길라 1세를 몰아내고 아타나길드가 왕이 되었으나, 바로 통수를 치고 동로마 제국을 공격했다. 그러나 당시의 로마는 아타나길드 따위가 상대할 수 있는 국가가 아니었다. 동로마가 점령한 영토를 수복하지 못하고 국경이 고착되었다.
이렇게 손에 넣은 이베리아 남부는 동로마의 속주로 편입되어 7세기의 이슬람 제국에게 빼앗길 때까지 100년 넘게 동로마의 통치를 받았다.
그 외에도 548년부터 557년까지 동로마와 사산 왕조 페르시아 사이에 있는 라지카라는 나라에서 대리전을 벌이다가 562년에 협약을 맺었다.
지금까지 살펴본 이른바 고딕 전쟁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황후 테오도라가 죽자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매우 무기력해진 상황이었고 전염병, 지진 등까지 연달아 터져 550년대를 넘어가면 시민들로부터 여론이 나빠진다.
558년 (훗날 불가르족으로 재탄생하는) 쿠트리구르라는 이름의 듣보 부족이 쳐들어오자 유스티니아누스는 벨리사리우스를 다시 데려와 559년 멜란티아스 전투에서 격파했다.
벨리사리우스는 이놈들을 끝까지 뒤쫓으려고 했는데 갑자기 황제가 그만하자노를 시전하며 돈을 내는 조건으로 전쟁을 물리면서 욕을 엄청 먹었다.
562년 황제가 죽기 직전까지 가자 벨리사리우스는 유스티니아누스를 디스했다. 그러나 몇몇 귀족들이 뇌절로 반란을 일으키고 벨리사리우스를 황제로 추대하려다가 걸렸다. 벨리사리우스는 이를 알고 있었다고 자백하면서 군대에서 쫓겨났다.
그러나 이듬해인 563년 벨리사리우스의 누명이 풀렸다. 허나 그는 두 번 다시 복귀할 생각이 없었고 565년 3월에 죽었다.
565년 11월 14일 유스티니아누스 1세도 사망하면서 그의 긴 치세가 끝나고 외조카 유스티누스 2세가 즉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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